2009. 10.24-12.23 (갤러리 아트 사이드 베이징)
베이징 갤러리 아트 사이드의 200평 규모의 공간에서 열린 김무기의 ‘중얼거리는 나무-베이징으로의 여행’은 2002년 일민 미술관에서의 전시 이후, 국내외의 여러 전시에서 보여주었던 나무 시리즈의 새로운 버전들이다. 스파게티로 전시장 건물 외부의 지붕과 벽에 사람과 나무 모양으로 설치한 작품은 금속 와이어와 비슷한 재질과 질감으로, 동서양의 소통과 교감을 위해 2007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의 전시와 고양 미술 스튜디오에서의 귀국보고 전 때 도입한 것을 중국 전시에 다시 적용한 것이다. 국수는 돌고 돌아 원래의 고향으로 간 셈이다. 식물에서 추출한 재료로 만들어지는 국수라는 식문화는 나무만큼이나 보편적인 것으로, 자연에서 문화적 상징을 끌어내려는 그의 작품에 또 다른 소재로 자리 잡았다. 한자리에 뿌리 내리는 나무는 동물(인간)을 매개로 여기저기로 문화의 홀씨를 퍼트리고 다니며, 각 지역의 문화 생태계에 맞는 변종으로 탈바꿈한다. 그것은 인체 모양에 잔가지들이 달려 있는 이전의 작품이, 홀씨처럼 또는 로켓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문화의 매개자 노릇을 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스테인리스나 알루미늄 등 금속으로 만들어지는 나무가 견고한 조각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면, 스파게티는 설치 형식으로 다양한 오브제들과 결합한다. 이번 전시에서 스테인리스 와이어를 용접하여 만든 나무의 가지는 종전의 3갈래에서 4갈래로 변화되었다. 금속 나무라 할지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분지의 체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촘촘하고 숱이 많은 잔가지들은 여전하다.
둥근 나무 둥치는 실제 나무와 대략 형태가 비슷하나, 나뭇가지에 해당되는 부분은 실제 나무보다 훨씬 밀도가 높다. 빛에 반응하는 털 복숭이 같은 잔가지들은 정지된 형상에도 불구하여 움직이는 느낌이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낼 것만 같다. 이전 작품에서는 철사나무에도 모니터를 달아서 소리와 동영상이 흘러나오곤 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철사나무에 내포된 동적 측면을 더욱 강화했을 뿐이다. 김무기의 철사나무는 천상의 빛을 지상에 필요한 공기와 물질로 전환하기 위해 빽빽한 촉수를 가동한다. 나무 기둥 아래에 둥글게 받쳐놓은 것은 힘차게 작동하는 생명의 실험실이자 발전소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장치이다. 작품 [중얼거리는 나무]와 옆에 놓인 [말하는 나무]는 각각 높이가 2.5m, 3.2m여서 관객은 실제의 나무를 바라보는 규모를 체험하게 된다. 지상에서 우뚝 솟은 거대한 수직적 구조로서의 나무는 인간에게 기념비에 대한 원형을 제공했으며, 김무기는 이것을 조각의 기념비성과 연결시켰다. 둥근 머리를 가진 [말하는 나무]는 [중얼거리는 나무]가 오므린 것 같은 모습으로, 어린이가 크레파스로 나무를 그린 듯한 형태이다. 거기에는 자연이 가지는 단순함, 그것의 힘과 진실이 느껴진다. 실제 나무를 깍아서 알루미늄으로 캐스팅을 한 작품 [그들의 정원]은 철사나무와 달리 누운 형태로 설치되어 있다.

알루미늄으로 된 팔각형 나무는 스테인리스로 된 철사나무에 비해 빛을 반사하기 보다는 흡수하여, 더 잔잔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스테인리스 나무에 비해 가볍고 밀도가 덜한 알루미늄 나무는, 나무로부터 출발한 형태지만 팔각형이라는 기하학적 단면과 오브제들과 결합하여 원초적 자연과 대비되는 문명의 양상을 보여준다. 중국에서의 전시라는 특징을 살리기 위해 베이징의 야경을 찍은 동영상을 비롯하여, 부처 손, 진시황 유물 미니어처 등을 캐스팅하여 붙여 놓았다. 인간, 자연, 문명의 단편들이 흘러나오는 화면은 나선형으로 꼬이며 나아가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맥락 속에 배치된다. 문명에 관한 보다 직접적인 언급은 중국의 유물상과 스파게티를 결합시킨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베이징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등신대의 진시황 상의 머리를 들어내고 머리 부분에 모니터를 달은 등신대의 작품 [중얼거리는 나무]에 대해, 작가는 고대와 현대의 현실을 소통시키려 했다고 말한다. 진시황 몸체를 싸고 있는 노란 스파게티는 나무 조직의 변주이자, 나무 형상에 내포된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그것은 인간의 직립상과 나무조직의 변형을 결합시킴으로서 자연사와 역사, 자연과 문명을 교차시킨다. 조각과 설치 작품 외에 전시된 평면 작품은 나무 사진 위에 드로잉을 한 것과 철사나무 형태를 오일 바로 그린 한 쌍의 작품이다. 사진 위의 드로잉 작품에서 바탕 사진은 1992년에 화순 운주사에서 운명처럼 만난 당산나무이다.
자연 속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의 감흥을 일깨워 준 이 나무는, 이후 김무기가 숱하게 만들어 왔던 나무 상의 정신적 원형이 되었다. 작가에게 원초적 체험과 강렬한 추체험을 가능케한 나무는 그 존재 자체가 근원적이다. 지구상에 등장한 최초의 생명체는 무기물을 흡수하여 유기물을 만들어내는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대지에서 힘차게 뻗어 나와 많은 숱으로 분지되며 빛을 난반사하는 김무기의 나무는 땅 속의 물을 흡수하는 도관들과 빛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전환시키는 무수한 접촉지점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식물 덕분으로 인간을 비롯한 종속 생물체들의 번성이, 그리고 문명이 가능했다. 스파게티 더미는 인류 최초의 식량이 식물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무 열매는 가루로 만들어 일용양식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자크 브로스는 [나무의 신화]에서 나무열매와 성림의 도토리가 부족해지기 시작하면서 농업이 탄생하였다고 인용한다. 황금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시작된 쇠퇴는 인간들의 노동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채취이든 농사이든 나무를 비롯한 식물은 인간에게 풍요를 선사했다. 김무기의 작품에서 나무의 주기적 재생이 가지는 다산성은 수직형태에서 얼핏 연상되는 남근적 형상 보다는, 실제의 많은 종의 나무들이 그러한 것처럼 자웅동체와 연관된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크게 만들어진 철사나무들은 큰 키와 부피감을 가지며, 이는 인간과 달리 키와 둘레가 계속 자라나는 차이를 가진 나무의 특성이다. 그러나 대지 위에 서있는 존재로 인간과의 유비는 불가피하다.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대지에 땅을 딛고 있는 바로 그 존재, 인간 말이다.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 잔가지들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반짝거리며 태양에너지를 한껏 받아들인다. 그것은 기둥 아래에 생략된 뿌리의 존재를 대칭적으로 암시한다. 양분과 수분을 길어 올리는 뿌리는 빛을 끌어들이는 가지들과 거울상을 이루면서 지지조직의 양끝에서 작동한다. 수많은 스테인리스 선의 다발이 연결된 조직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두 가지 흐름을 형상화 한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이러한 분지체계를 추상적인 계획이나 수학적 분석과 비교한다. 그러한 분석들은 번개만큼이나 강줄기에 잘 맞고, 나무에게서 만큼이나 혈액순환 기관의 분맥에 잘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최대한 가능한 만큼 공기 중의 나뭇잎들 못지않게 땅 속의 뿌리가 주변 환경과 접촉하고 있는 면적을 늘린다. 김무기의 작품에서 나무는 구체적인 나무를 닮았으면서도 다양한 층위의 실험을 행하는 자연의 모형을 형상화한다.
김무기의 나무는 2008년 초 예맥 갤러리에서의 전시제목인 ‘노래하는 세계수’에 나타난 바와 같이, 세계수의 이미지가 있다. 천상과 천하를 연결하는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나무는 우주적인 상징을 가진다. 자크 브로스는 인간에게 가장 숭배되던 나무는 우주목(宇宙木)이었다고 말한다. 우주목은 자연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이며, 물질적인 동시에 추상적인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축으로, 세계의 중심에서 자라난 기둥이다. 그것은 나무들이 삼 세계, 즉 바다 깊은 곳과 땅의 표면과 하늘을 서로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특권을 부여받았고, 그래서 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존재로 여겨졌다. 김무기의 나무 역시 자연적 물질로부터 종교적 상징으로의 도약이 이루어진다. 언제나 실재의 중심에 서있는 강력한 존재감 속에서 삼 세계 간의 교류가 시도된다. 수직적 축을 이루는 나무기둥은 우주적 축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로베르 뒤마는 이러한 축의 비유가 세 개의 세상을 지탱하는 원주로서 그것은 보이지 않는 지하세계와 지상세계, 그리고 끝없이 연장된 천상세계를 받치고 있다고 말한다. 수직의 축은 지상의 조건을 건너뛰는 상승의 역학을 보여준다. 그것은 높이를 지향하는, 하늘을 향한, 빛으로의 길을 가리킨다. 기둥 위에 뻗친 수많은 금속 촉수들은 상승과 비상의 이미지를 집약한다.

김무기의 나무는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우주적 상징주의와 연결되어 있지만, 인간의 삶과의 관련성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고대 유물부터 LCD같은 현대적 물건들이 동원되는 알루미늄 나무나 스파게티 설치물에서 인간과 나무는 보다 친숙해진다. 현대기계 문명을 비로소 열어젖혔던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식물들의 거대한 사체라 할 수 있는 석탄이다. 그것은 인구의 폭발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농업 혁명과 더불어 인류사에 큰 획을 긋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나무는 인간에게 강력한 에너지원을 제공했던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추상화된 가공된 물질과 에너지를 선점하기 위한 인간들 간의 투쟁이 수많은 사회, 정치, 역사적 갈등을 낳았고, 이러한 갈등과 투쟁은 개인의 실존적인 삶 속에도 반복 된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역사로 친다면 신생국과 다를 바 없는 중국사회의 역동적 단면들이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수집된 영상들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모순들과 비슷하다. 나무 아래에서 갖가지 역사들이 펼쳐졌듯이,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나이테 속에 저장한 나무들처럼, 시간의 축을 따라 흘러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역사적, 혹은 고고학적 유물처럼 기록된다.
나선형으로 꼬여가며 저 멀리 달아나는 듯한 작품 [그들의 정원]은 나무에 내포된 시간성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스테인리스 나무가 세계수같은 상징성을 통해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과 비교된다. 바닥에 고정된 스테인리스 나무에 비해 공중에 둥 떠 설치된 알루미늄 나무는 아직 시간의 시험을 다 이겨내지 못한 듯하다. 유물이나 예술품, 물건 등 갖가지 사물들이 캐스팅되어 붙어있는 [그들의 정원]은 변이의 과정 중에 있다. 여기에서 나무는 이질적인 여러 요소들을 집합시키며 변모를 꾀한다. 나무둥치처럼 꼬여 있는 잔가지 위의 다양한 형태들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도출된 사물들이며, 그것은 자연이 행하는 실험을 문명사나 역사의 단위에서 반복한다. 분지의 체계는 계통수와 같은 양상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나무는 진화하는 모형이 된다. 진화론자 다윈이 생물은 시간 속에서 갈라지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고 말했듯이,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된 흐름들은 서로의 차이를 드러내며 분산되고 있다. 뿌리와 분지체계를 가지는 계통수의 이미지는 인간의 정신이 성장하고 사고가 전개되는 모습과 중첩된다. 그것은 또한 구별되는 여러 차원들의 중개자인 예술가의 이미지와도 부합된다.
출전: 월간미술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