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또는 생산의 입장만을 강조하면서 미술을 보는 습관은 소통 또는 유통의 문제를 소홀히 한다. 소통의 문제는 창조보다는 수용을 중시하면서, 미술에 대한 정의도 변화시킬 수 있다. 생산과 소비, 창조와 수용 사이의 긴밀한 피드백은 작품의 온전한 향유를 위해서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이다. 소통이 활발해지면 거짓된 진실은 자리 잡기 힘들며, 한 예술가의 꿈과 무의식에나 존재할 법한 허구라도 강력한 현실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소통의 현실은, 발신하는 만큼 수신이 안 되는 답답한 상태, 수신하는 만큼 발신하기 힘든 무력한 상태가 만연해 있다. 그 와중에 자기 지시적일 뿐인 사이비 소통이 대신한다.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이란, 말과 사물이 분리되고 언어의 자율성이 성립되기 시작한 모더니즘에서 나오는 개념이지만,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아전인수 식으로 운용되는 매체의 속성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더 이상 외적 현실이 아니라, 자기 참조적 모델로부터 파생하는 실재들이 지배하는 정보화 시대를 설명하는데도 유효하다. 매체에 대해 매체가 말할 뿐인, 메시지 없는 약호는 발신자도 수신자도 없이 자기들끼리 수다를 떤다.
구조와 체계는 그 자체를 재생산 할 뿐인 메시지를 은연중에 내면화시킨다. 미디어의 자기지시성 역시 어떤 이해관계의 산물이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는 소통을 촉진시키기도 방해하기도 한다. 문화사가들은 자본주의가 전개됨에 따라 이해관계가 열정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흐름에 의하면, 대체로 열정의 산물인 예술은 풍요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큰 이익을 보지 못한다. 오늘날 너무 열정적인 사람은 손해를 본다.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최소한 소외되지 않기 위해 발휘되는 자기 방어체계 중의 하나가 무관심이다.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미술계에 종사하면서도 미술에 냉소적인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무관심은 각자가 수행하고 있는 작업의 객관적 맥락을 놓치게 할 수도 있는 중대한 과실이다. 이러한 요구는 시류에 성공적으로 편승하기 위해 주변을 항시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기회주의를 촉구하는 것은 아니다. 자발적이거나 강제된 고립무원의 상태가 반드시 독특한 창작품을 낳게 하지는 않는다. 제풀에 지쳐 매너리즘에 빠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마찬가지로 한 작품의 새로움이나 독창성이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모든 정보와 지식을 섭렵하고 종합해야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경향은 소재주의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 가령 이미지나 개념의 집약 없이, 많은 자료들을 늘어놓거나 쌓아놓는 아카이브 스타일의 전시는 작가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 소화불량의 부담을 안겨준다. 뒤샹이 제시한 소변기 이후, 작가의 의도에 의해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은 소통의 혁명이라기보다는 축소였다고 생각한다. 현대미술에 대한 비판자들이 주장하듯,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면, 동시에 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개념보다 손기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 작가의 개념이 충분히 소명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속도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작품에 머무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뭉쳐 있는 개념의 끈을 관객이 풀어보게 할 만큼의 동기부여나 유혹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면 모를까. 결국 개념을 통한 소통 역시 획기적인 창안과 창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개념을 중시하든, 기술을 중시하든 필요한 것은 각자 생산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는 활발한 대화이다.
한 작품에 대해 또 다른 작품으로 대답하고, 한 비평에 대해 또 다른 비평으로 대답하며, 작품에 대해 비평이, 비평에 대해 작품이 묻고 대답하는 과정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이상적이다. 미술이나 비평, 미학의 역사 자체가 그러한 꼬리 물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우리 미술계에는 이러한 담론의 순환구조가 막혀있다. 소통이 원활치 못한 상황은 창작에 대해서도 비평에 대해서도 치명적이다. 미술에 관련된 적지 않은 매체가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는 관계 속에서, 모두들 제자리에서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형국이다. 대화는 겉돌고 껍데기만 남아서 각자의 독백 못지않은 공허함을 준다. 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아직 역부족이다. 역부족이기 때문에 냉소주의는 더욱 확대되고, 냉소주의는 다시 소통에의 의지를 위축시킨다.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질수록 더욱 목마름을 느끼게 된다. 물론 미술은 여기 있는 것을 저기에, 저기 있는 것을 여기에 옮겨 놓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강한 밀도가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고체에서 곧장 기체 상태로 변화(sublimation)하듯, 서서히 번져나가고 스며들며 전염되는 것이다.
미술 작품은 공간적으로 동시 결정되는 공시(共時)적 성격을 가지며, 선형적 명료성과는 거리가 있기에, 미술에 대한 담론 역시 쉬울 수가 없다. 현대미술은 ‘그것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가’에 대해 단답식으로 말하기 힘들다. 그러한 어려움은 미술이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한 작가의 세계관과 형식적 기술이 고도로 응축되어 있는 미술작품이 다양하게 해석되기 위해서는 훈련된 감각과 지식이 요구된다. 쉽게 얻어지지 않는 만큼 가치도 있다. 아무런 심적 지적 투자를 요구하지 않는, 요컨대 쉽게 얻어지는 것들은 끝없는 권태로움을 야기할 뿐이다. 아무런 자질도 필요 없는 수동적 몰입은 자신을 깍아 먹는 중독일 뿐이며, 그 앞에는 머지않아 크고 작은 소비목록이 진을 치게 될 것이다. 미술을 대중적 눈높이에서 소통시키기 위해 재가공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가령 세계 명작 전시를 들여와서 대량적으로 소통을 시킨달지, 학생들을 위한 교육용 미술 프로그램은 기획사나 관련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꽤 활성화 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1차 생산물이 예술에 해당된다면 재 가공되는 2차 생산물은 문화에 해당된다.
2차 생산물의 문화 역시 1차 생산물인 예술이 이미 마련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세계최고의 인터넷 속도와 인프라를 자랑하는 한국은 2차 생산물의 문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속도와 양적 폭주를 채워줄 콘텐츠나 창조적 소프트웨어의 부족은 늘 지적되는 사항이다. 최신 휴대폰에 하루 종일 매달려 사는 사람을 볼 때, 그리고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매체를 켤 때마다 정보가 많아지면 무의미도 많아진다는 법칙을 깨닫게 된다. 가히 소통의 인플레 현상이다. 그러나 무엇을 소통하고 있는가, 소통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소통의 인플레 현상은 현실 속에서 진정한 소통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난 집단적 강박관념은 아닐까. 개인이 점차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는 현대적 삶의 구조를 이용한, 통신 관련 사업의 맹렬한 마케팅의 결과는 아닐까 의심된다. 우리 주변을 둘러싸는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들은 고립된 개인이 몰입할 수밖에 없는 나르시시즘적 에너지로 구동되고 있는 듯하다. 나날이 손쉬워지고 있는 소통경로에 비한다면, 힘겨운 심신의 노동의 산물인 그림이나 조각은 거의 박물관의 유물로 보일정도이다. 그것도 정보사회에서 각광받는 진기함이라면 진기함이라할 수 있겠다.
불과 한세대 동안 급격한 변화를 거친 매체 계는 우리의 생활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모두들 컴퓨터, 노트북, 넷북, 휴대폰, MP3, PMP 등의 디지털 기기로 중무장을 하고 있으며, 적절한 시기에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으면 뒤쳐질까봐 초조해한다. 새로운 통신 기기에 관한 한 세계에 유례가 없을 만큼 신상품에 열광한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시대 미술의 동향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러한 기기들이 동시대 미술을 소통시키는데 도움을 주기나 할까. 아이 폰 같은 첨단 기기는 온라인 경매 같이 기능적인 면에서는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전시장을 직접 찾아가는 대신 인터넷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누군가에 의해 생산되어진 작품이나 담론은 각자의 블로그에 퍼 나르는 항목의 하나로 만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주변을 둘러싸는 크고 작은 모니터들은 노동은 물론 여가 생활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 속에서 변화된 삶의 조건이 미술작품을 포함해 대상들을 보는 관습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이미 보편화되기 시작한, 인터넷까지 가능한 손안의 통신기기는 바퀴, 알파벳, 종이, 인쇄, 전신 등 역사에 굵은 획을 그었던 소통의 연대기 중 아직도 진화 중인 만능 도구이다. 인류의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를 살펴보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과 버금가는 소통방식을 고안하려 했다.
랜슬롯 호그벤은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만화경](1949)에서 인간은 아득한 옛날부터 음성과 몸짓, 그림과 조각, 천문과 달력, 문자와 숫자, 영상과 전파 등 수단을 통해 어떻게 하면 거리와 시간을 극복하여 의미 있는 신호 메시지를 정확히 주고받는가에 끊임없이 고심해 왔다고 지적한다. 매체의 변화는 또한 재현기술의 변화를 가져왔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기술과 신념의 공동의 진화는 우리를 보이는 것의 역사 속에 세시기들로 이끌어간다고 말한다. 인공적 이미지는 세 가지 다른 존재 방식을 거쳐 왔다. 그는 마술적 시선에서 미적 시선, 그리고 경제적 시선으로의 변화를 설명한다. 첫 번째 것은 우상을, 두 번째 것은 예술을, 세 번째 것은 영상적 시각을 불러낸다. 시선은 하나의 환상(성상), 한 점의 초상(예술), 한편의 뮤직 비디오(영상)에서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소통의 지배적 모델은 초상으로 존재하는 성자(현전성)에서 재현으로, 그리고 시뮬레이션 모형으로 변화 하였다.
각 단계에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것, 자연, 허상 등은 세 가지 심정적 태도를 암시한다. 우상은 두려움을, 예술은 사랑을, 영상적 시각은 관심을 각각 불러일으킨다. 첫째 것은 원형에 따른다. 둘째 것은 전형에 따르며, 셋째 것은 그 자체의 상투형을 지배한다. 그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한 세대라는 짧은 시간에 매체계가 변화하였다. 레지스 드브레의 분류방식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영상의 논리가 지배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영상의 논리는 상위차원에 대한 가능성을 지니지 못한 채, 단 하나의 현실차원에서 병렬과 첨가의 방식에 의해서만 진행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고는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무(無) 논리적인 것이다. 그것은 모자이크 형상을 띠고 있고 중층적인 구문의 입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픽셀은 무엇을 바깥의 무엇을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의 구조를 가리킨다. 즉 운반자와 운반된 것이 동일하다. 정보과학은 빠르고 그 파급력이 광범위한 공간에 미치지만 다양한 삶을 낳게 하는데 충분한 조건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을 급속히 동질화시킨다. 동질화의 결과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낳는다.
인간을 겹겹이 둘러싸는 거대 통신망은, 그렇지 않았으면 각자 달랐을 인간의 욕망을 하나로 수렴시킴으로서 피 흘리는, 또는 총성 없는 전쟁이 항시적으로 벌어지게 한 것이다. 휴대폰으로 대표되는 첨단기기는 무의식적으로 흘러가 버리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이용하여 가격을 매기고 이윤을 창출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팔수 있는 것만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점차 팔 수 있는 것만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레지스 드브레는 전달매체가 비물질화 하면 할수록, 사회생활에서는 비물질적인 것을 위한 자리가 더욱 줄어든다고 경고한다. 자본주의적 풍요는 공공성과 초월성을 사라지게 하고, 과잉생산과 소비를 추동한다. 공동체와의 소통은 물론, 하나의 조약돌 한그루의 나무, 별과도 소통할 수 있었던 상징적 교환의 시대는 사라졌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더불어 더 이상 집단적 역사와 공유하는 신화적 장치를 통과해야할 필요가 없는 현대 예술이 탄생했다. 공동체 없는 접촉, 시선의 완전한 사유화는 그 이미지의 마술을 무력화시켰다. 오늘날 현대미술은 대중들에게 ‘기술의 상실과 우아함의 타락, 사기 혹은 속임수’(수지 개블릭)로 여겨지곤 한다. 현대미술관 속에 가득 채워져 있는 ‘불안한 오브제’(해롤드 로젠버그)는 관객들에게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야기한다.
개인을 공동체에 복속시켰던 전통이 무너지고, 외견상 합리적으로 보이는 관료주의에 의해 개인들은 재배치되었지만, 각자의 이해관계를 위해 무한 경쟁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밑바탕에는 혼돈과 무정부주의가 깔려 있다. 수지 개블릭은 [모더니즘은 실패했는가]에서 자유주의는 생활의 사적인 즐거움과 자유를 위해서 모든 초월적인 목표를 포기하도록 한다고 지적한다. 공식적인 경로와 제도적 절차에 대한 복종을 통해서 얻어진 이익만이 합법적으로 간주되면서 구조를 위한 구조라는 거대한 자기 지시적 틀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이 틀을 거부하기 위해 순간적으로만 존재하는 미술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예술가에 대한 지원제도나 미술관 등 거대한 관료주의에 점차 흡수되었다. 자동화된 삶의 방식을 낯설게 하는 예술의 효과가 점점 발휘되기 힘들어진 것이다. 기술과 관료, 자본으로만 수렴되고 있는 소통방식을 깨기 위해서는 이러한 동질적 질서를 내부로부터 전복하려는 밀도 있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대안의 움직임 중의 하나는, 기술에 의해 한동안 잊혀 진 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일단의 동향이다. 기술적 코드화로부터 탈주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은 원시적 퇴행이라기보다는, 이질성과 접촉하려는 현대미술의 근본적 모험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출전: 조형 21호(서울 시립대학교 환경 조각과)
이선영
#4707
소통 인플레 시대의 예술적 소통방식
이선영
2010. 02. 28.
이선영
서울 출생
인명사전 바로가기 : www.daljin.com/author/3059
미술평론가 이선영(b.1965)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하였으며, 웹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1996-2006)과 [미술평단] 편집장(2003-2005)을 역임했다.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상(이론부문)(2009),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2014)를 수상 하였다.
미술평론가 이선영(b.1965)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하였으며, 웹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1996-2006)과 [미술평단] 편집장(2003-2005)을 역임했다.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상(이론부문)(2009),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2014)를 수상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