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판넬 위에 붙인 우드락에 실리콘, 수성왁스 등 복합재료를 사용하여 형태와 질감을 만들고, 그 위에 수성페인트, 아크릴, 오일칼라 등을 이용하여 색깔을 낸 김성지의 작품은 고안된 구성요소들이 이합집산 하면서 일상적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수직과 수평, 직선과 곡선, 음각과 양각 등, 서로 대조되는 쌍들의 조화이다. 구성적 요소 뿐 아니라, 소재면에서도 대조되는 상징어법을 구사한다. 가령 많은 작품에 나타나는 시원하게 공간에 드리워진 발의 도상은, 그 뒤에 있는 주체로 하여금 세상과 연결되면서도 거리감을 부여하는데, 그것이 일상의 평화를 낳는다. 사다리나 계단처럼 보이기도 하는 발은, 평화 속에서 진보하는 긍정적인 삶에 대한 도상이다. 작가라는 존재에게 진보란, 아파트 평수를 늘리거나 새 차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에 전념하는 삶을 의미한다. 작업은 무의미하게 흩어지려는 힘에 맞서, 개인의 역량을 모아주며 무엇인가에 온전히 집중하게 하고, 삶에 강력한 맥락을 형성해준다.




그러나 삶은 우주의 진화와도 같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려는 경향을 가진다. 엔트로피(entropy)의 사전적 정의는, 열역학에서 물체가 열을 받아 변화했을 때의 변화량을 가리킨다. 문명 비평가 제레미 리프킨에 의하면,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이 가능한 것에서 사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또는 질서 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 무질서를 강조하는 이러한 엔트로피의 개념은, 근대 이후 과학기술에 의해 더욱 탄력을 받은 낙관적 진보주의를 뒤흔들었던 패러다임으로 평가된다. 작가에게 진보란 하나의 방향만을 지시할 뿐인 지배질서의 도그마와 반대로, 삶에 예술의 자리를 인정하고 마련하려는 대안의 질서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이상주의로 간주되어 왔다. 김성지에게 얽히고설킨 상태와 착종된 현실을 상징하는 것은 씨줄과 날줄의 이미지이며, 이는 발의 반대편에 놓인다. 이 직물의 이미지는 바탕 면에 깊이 파여져 울퉁불퉁한 촉각성을 자아내며, 평탄치 않은 삶의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미끈한 발의 이미지가 미지의 것과 대면하는 기대와 닿아있다면, 거친 직물의 이미지는 지나간 세월에 대한 팍팍한 감정과 연결된다.

곡선과 직선의 의미도 비슷하다. 직선에는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걷고자 하는 단호함이 내재되어 있다. 직선의 변형으로 나타나는 사각형은 밀물같이 쏟아지는 자극에 대항하여, 자신 만의 성찰적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는 요구가 표현되어 있다. 화가에게 성찰은 창문을 통해 보는 세상과 관련되며, 이는 사각 캔버스 위에 구현된다. 곡선의 변형으로 나타나는 작은 동그라미들은 세상 사람들을 상징하는데, 현대인이 주체이자 대중인 것처럼, 자신 또한 이들에 속해 있다. 자기만의 방에 존재하면서 어떤 자족성과 완벽을 꿈꾸는 자아의 상태와 다수의 익명성 속에 어울리는 삶의 공존은, 지극히 인간적인 요구로 다가온다. 캔버스가 아닌 우드락이라는 바탕 소재를 통하여 표면과 질감을 통일시킨 김성지의 작품에서, 원은 표면에 뚫린 미세한 구멍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주체의 심연으로부터 뽀글뽀글 올라오는 욕망을 형상화한다. 상징적 질서로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 속에서 욕망은 또한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요컨대 욕망은 소통의 문제와 연결된다. 소통은 언어를 매개로 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냥 소통, 즉 기성의 언어를 통한 소통이 아니라, 자기가 창조한 언어를 통해 소통하고자 한다. 이러한 욕망은 생산과 유통으로 변질되어버린 현대적 소통에 대한 대안의 가치로, 흥미로운 기표들로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다소간 무겁고 어두워 보일 수 있는 예술의 존재 의미를 밝혀준다. 김성지의 작품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다기 보다는 시공간의 구조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그것은 대조되는 상징군의 공간적 배치에서 전형적이다. 작품 [그림자놀이]는 보라색 계열의 색채를 바탕으로, 좌측에 직물 이미지와 우측에 발의 이미지가 배치된다. 위에서 내려오는 나선 형태는 마치 팽팽히 당겨진 현이 끊어진 듯이 말려 올라간다. 아지랑이 형태는 위에서 내려오는 공간을 관통하면서도 자체의 탄성과 관성에 의해 부유한다. 음표나 아지랑이처럼 흘러내리는 선은 느긋한 삶의 율동에 몸을 맡기게 하며, 수직적 공간성과 수평적 시간성이 종합된 형태이다. 장 삐아제는 구조주의에 관한 책에서, 인간의 지식을 하나의 피라미드로 보거나 모종의 건축양식으로 볼 것이 아니라, 회전적 나선운동에 의해 그것의 반지름이 커져 가는 하나의 나선체(spiral)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통시성 보다 공시성을 우선시 하는 구조주의적 사고에 거슬러서, 변형과 생성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시 부제인 ‘PASSING OF TIME-그림자놀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간적 이미지와 시간적 이미지가 복합된 표현이다. 김성지는 인생을 그림자놀이에 비유하는데, 인생 자체가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유희인 것이다. 상징들은 대조되는 항을 이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공간에는 시간이 내재되어 있다. 작품 [어제 오늘 내일, 그리고 평화]는 거친 직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드 형태를 거치며, 공간적 추이에 의해 질서가 잡히는 양상이다. 왼편의 혼돈과 갈등이 오른 편의 질서와 평화로 변모하는 것에는, 시간이라는 변수가 핵심적이다. 작품 [흐르는 세월처럼]은 왼편의 발이 사람무리와 회오리를 거치면서 무정형의 색채 그자체로 변모한다. 엔트로피의 상승은 시간의 흐름을 전제한다. 시간의 흐름은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혼돈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자연 질서의 일부인 것이다. 김성지의 작품에서 공간성은 화면 위에서 불규칙한 간격으로 죽죽 내려오는 선들로 구현된다. 이 선들은 화면을 여러 크기와 질감과 색조로 분할한다. 시간성은 화면 왼쪽에서 오른편으로 전개되는 상징적 소재의 배치로 나타난다. 그녀의 작품에 곧잘 나타나는 구조인 수직/수평은 기호학적인 대조를 이룬다.

소쉬르적 기호학에서 수직(공간)의 범주는 공시성(synchronity)으로, 수평(시간)의 범주는 통시성(diachronocity)으로 구별된다. 엄격하게 정의된 기호학이 아닌, 일반 용법에서 공시성은 동시성(simultaneity)과 통시성은 시간성(temporality)과 혼용해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자체가 역설적이다. 공시성에는 시간이 내포되어 있고, 통시성에는 공간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성지의 작품에 나타나는 혼돈과 질서, 개인과 다수 같은 공시적 표현들은, 혼돈에서 질서로 개인에서 다수로 향하는 식의 변모가 내재한다. 또한 그녀의 작품에서 시간의 흐름은 좌에서 우, 또는 우에서 좌로 흐르는 공간적인 배치에 의존한다. 그것은 기호의 엄격한 대조에 의거하는 구조적 경직성을 벗어나, 구조 자체가 발생하고 변화하는 시간적 계기를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시간의 절단면에 불과한 공시적 구조를 영원한 질서로 물신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물신화는 경직된(또는 선험적으로 받아들여진) 구조에서 사건이 생성되는 계기를 간과하는 무감각을 낳는다. 한편 무작정 시간에 흐름에 매몰되어, 삶의 질서를 강력하게 틀 지우는 구조적 힘에 대한 무지와 맹목도 거부해야 한다. 구조적 특성이 강한 김성지의 작품은 시간에서 공간을, 공간에서 시간을 감지하려는 이중의 전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