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국내 미술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대안공간의 출현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말 대안공간 루프, 대안공간 풀,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쌈지(현재에는 문을 닫은) 등이 연이어 문을 연 이후, 현재에는 전국적으로 수 십 개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동안 대안공간은 뚜렷한 자기 몫을 해왔지만, 그 시점과 지금의 사정이 많이 달라진 만큼 그 정체성도 적잖은 변화를 겪은 것이 사실이다. 성과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는 대안공간이 신진작가 발굴채널을 다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발굴된 신진작가는 다양한 형식으로 미술계 전반의 체질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생리적으로 끊임없이 새 피를 필요로 하는 비엔날레에 신진작가를 수혈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나아가 점차 비엔날레와 아트페어의 성격이 희석됨에 따라서 대안공간 출신 작가들이 비엔날레와 함께 유명 상업화랑에 진출하는 일도 생겨나기에 이른다. 주지하다시피 비엔날레와 상업화랑은 제도권미술의 두 축이며, 따라서 대안공간 출신 작가들이 제도권 미술에 흡수되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비엔날레는 물론이거니와 상업화랑의 컨텐츠를 강화한 것은 분명 대안공간의 성과지만, 이제 그동안의 성과를 뒤로 한 채 또 다른 대안의 가능성의 지점을 모색해야할 시점에 와 있는 것 같다.
대안공간이 신진작가 발굴 채널을 다원화했다면, 각종 창작스튜디오의 잇따른 개설은 신진작가의 창작환경을 눈에 띠게 개선시켰다. 심지어는 기금지원마저 신진작가에게 쏠려 오히려 중견작가들의 상대적인 소외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2002년에 창동스튜디오가, 그리고 2004년에는 고양스튜디오가 각각 개설된 이후 그동안 적지 않은 작가들이 배출되었고, 이제는 상당할 정도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사립미술관이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나 지역 창작스튜디오 사업 그리고 각종 개별주체들이 운영하는 유사 프로그램의 설립을 이끌어낸 것은 가장 중요한 성과라 할 것이다. 이제 창작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지역 사업 중 하나가 되었고, 작가들마저도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과정이나 주요 이력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더불어 그 자체가 대안공간의 활성화를 견인하는 보이지 않는 원동력으로마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대안공간과 창작스튜디오의 네트워크 형성). 얼마전만해도 생소했던 창작스튜디오나 레지던시 프로그램 그리고 대안공간과 대안미술이라는 용어는 이제 제도권 미술을 움직이는 핵심 개념이 되었고, 심지어는 상업화랑의 생리마저도 바꿔놓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자체(지역자치체제 혹은 지역분권체제)가 정착되면서 줄 이은 비엔날레 창설과 연이은 시립 혹은 도립미술관의 건립 역시 신진작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는데 적잖은 역할을 도맡고 있다. 여러 형식으로 신진작가 발굴프로젝트를 가동하는 한편, 사진, 영상, 설치 등 현대미술의 표현형식과 범주를 다양화하는 실질적인 계기로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뚜렷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선 지역이기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은데, 무슨 비엔날레 천국이니(비엔날레가 너무 많다), 붕어빵 전시니(다른 비엔날레와의 차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출혈경쟁이니(같은 해에, 그것도 비슷한 시기에 수개의 비엔날레를 동시에 치러내는 것은 분명 낭비다) 하는 냉소들이 있고, 심지어는 비엔날레 무용론까지도 공공연한 것이 현실이다. 시립 혹은 도립미술관 역시 건립단계에서부터 운영단계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더불어 세계미술시장 특히 중국현대미술시장의 활황에 힘입은 국내 미술시장의 호황과 잇따른 옥션(현재 10여개에 달하는 경매사가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집계) 및 무분별한 아트페어의 개설이 주목된다. 경매제도는 철저한 경제논리에 의해 작동되는 것인 만큼 자칫 미술계의 건전한 유통환경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부정적 견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테면 소위 블루칩 작가들의 해외 인지도가 형성되는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블루칩 작가들 대부분이 메이저급 화랑에 소속돼 있다보니 화랑의 작가 밀어주기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수치상으로 높은 낙찰가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경매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독 가격대가 높은 유명작가의 일부 작품이 거래된 것이 결과적으로는 전체적인 낙찰가를 끌어올린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수혜가 대개는 미처 검증되지 않은 신진작가 위주로 편중되는 것인 만큼, 현재 꽤나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그밖에도 소위 시장성 있는 아이템(이를테면 팝코드와 극사실주의 회화 경향)에의 쏠림현상이 종 다양성의 부재와 함께 소재주의에 편향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국민의 정부와 연이은 참여정부체제의 10년 동안 소위 생활 속에 예술 심기가 문화정책을 위한 슬로건으로 채택되면서 이를 실천하고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와진 공공미술 프로젝트 역시 이 시기의 한 특징이랄 수 있다. 원래 조형물 제도의 폐해를 바로잡아보려는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조형물 제도와는 별개의 프로젝트 형 사업을 활성화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미술의 사회적 기능이나 효용과 관련해서, 특히 미술계 전반의 체질개선과 관련해서 분명한 역할을 했지만, 아직 그 성과를 운운하기에는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그 형식실험은 현재 진행 중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청계천 복원사업과 각종 재개발건축 프로젝트 관련 아이템이 이 시기에 주요 기획전의 인기품목으로 채택되어진 점이 눈에 띤다. 둘 다 한국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아이콘인 점을 생각하면, 동시대 작가들의 시대정신이 어디서 오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 않을까 싶다.
한마디로 2000년대 들어서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채널에 눈에 띠게 다변화되어졌고, 적어도 외관상 그 창작환경 역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호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지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면에서, 정책적인 면에서, 그리고 미술시장의 측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지지되어진 것으로 사료된다. 그 스펙트럼의 한 지점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전>이 있다. 비록 그 채널이 다양화돼 신진작가를 발굴한다는 취지는 처음만 못하지만, 이렇게 발굴된 작가를 지속적으로 육성하고, 관리하고, 프로모션 한다는 사후관리의 측면에서 볼 때 이전보다 눈에 띠게 강화되어졌고, 이는 전시와 창작스튜디오를 연계하는 네트워크 형성으로 인해 차후에 더 힘을 받을 것으로 사료된다.
세기가 바뀌는 만큼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라는 다소간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제 11회 전시(2000.9.1-11.5)에는 유근택, 정서영, 이재효, 권혁, 김나영, 김상길, 김주현, 김홍석(일종의 상상소설을 재구성한 설치작업), 문경원(비디오), 박경주, 양주방, 유승호, 이기영, 장혜연, 정수진(일종의 자유연상기법에 의한 뉴에이지페인팅) 등 16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유근택은 수묵화운동 제2기로 특징되는 <동풍>을 이끈 핵심멤버로서, 그동안 답보상태에 놓여져 있던 수묵화의 세대교체를 이뤄낸 것으로 평가된다. 작가는 아파트의 거실 정경이나 도회적 삶의 단면을 그림 속에 끌어들여 전통회화가 안고 있던 소재적 난점을 해소한 것으로 사료되며, 이는 대략 사회적 풍경과 일상적 풍경에 의해 지지된다.
하나의 풍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표현한 <어떤 국가주의적 풍경>. 집이 떠내려가고, 소파가 떠내려가고, 맥도날드가 떠내려가고, 스타벅스가 떠내려가고, 삶이 떠내려가고, 시대가 떠내려가고, 이데올로기가 떠내려가는 <풍덩>. 작가는 사회적 풍경이란 프리즘을 통해 제도와 개인과의 관계를 본다. 그리고 그 관계의 장인 일상으로부터 일상이라는 의미의 더께를 걷어내고, 미처 의미화 되기 이전의 일상의 맨 살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렇게 드러난 일상은 친근하고 낯설다. 그림 속에 아파트와 공원이 등장하면서 유근택은 전기를 맞는다. 아파트의 실내 정경을 그린 <어쩔 수 없는 난제들>. 꼬마의 장난감으로 어질러진 실내 정경은 그대로 어수선한 세계의 축소판이다. 그 난장판의 바다 위로 장난감 배가 떠가고, 플라스틱 모형 비행기가 전등갓을 스칠 듯 날아오른다. 세상살이는 이처럼 어쩔 수 없는 난제들로서 육박해오지만 그 와중에서도 꽃은 피고 꿈나무는 자란다.
이재효의 작업은 언제나 재료 본래의 소재적 특질을 유지하는 한에서 최소한의 인공적인 손길만을 허용한다. 그러니까 나무, 돌, 나뭇잎 등의 소재는 그 자체 자연으로도 그리고 하나의 작품으로도 여전히 최초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자연과 거의 구별되지가 않는다. 자연을 빼 닮은 작품이 자연과는 또 다른 자연의 한 원형을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자연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서도 이로부터 어떠한 식으로든 자연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작품을 위한 최소한의 근거를 찾아낸다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감각적인 문제인 것이며, 자연과의 친밀하면서도 치열한 교감의 과정이 없이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교감의 과정이 있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자연은 자기를 열어 보이는 것이고, 또한 작가는 그 순간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의 조각은 자연과 인공이 교감하는 극적인 순간을 엿보게 한다.
김상길은 영화 속의 간접광고 이미지를 일상 속에서 재현한 연출된 사진 찍기를 통해 사진의 재현적 이데올로기에 주목한다. 자본주의의 욕망은 의식을 넘어 무의식을 파고든다. 우연을 가장한 광고 이미지를 통해 하나의 이미지란 그 자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사실은 조작되고 연출된 것임이 드러난다. 이와 함께 각종 인터넷 동우회를 소재로 한 집단초상사진에서는 일종의 가상현실 커뮤니티로 나타난 신종 문화 풍속도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마샬 맥루한은 컴퓨터상의 가상 커뮤니티가 국가, 민족, 영토의 물질적 경계를 대체할 것이라고 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취미를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는 세상에, 그렇게 맺어진 친구가 살과 피를 나눈 부모와 형제보다도 더 살가운 세상에 우리 모두는 살고 있는 것이다.
김주현의 작업은 조각의 본질에 맞닿아있고, 이는 각각 쌓기와 확장하기로 나타난다. 같은 크기의 종이와 알루미늄 판을 중첩시킨 쌓기와 마찬가지로, 같은 크기의 함석 조각을 경첩을 사용해 계속 이어 붙여나간 확장하기를 어떤 원칙, 규준, 방법론으로서 받아들인다. 여기서 같은 크기의 함석 조각이 연이어져 만들어낸 구조가 정형화된 패턴을 만들어낼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 나타난 기울기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그 자체는 기하학적이기보다는 유기적인 형상에 가깝다. 유기적 기하학?). 여기서 각각의 함석판은 전체 형상을 위한 최소한의 단위, 세포, 입자, 모나드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낱낱의 단위들이 조합된 결과는 같은 단위에 기초한 자기 동일성의 원칙을 유지하기보다는 비동일성의 우연한 조합으로서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어떤 원리가 이미 자기 속에 내포하고 있었을 우연이나, 자기 동일성의 원칙이 포함하고 있었을 비동일성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렇듯 작가의 작업에서는 조각이 어떤 개념(쌓기와 확장하기)으로 환원되고, 조각과 탈조각의 개념이 상호 삼투된다.
유승호의 작업은 일종의 문자로 된 그림, 문자드로잉, 칼리그래프의 한 형식으로 범주화된다. 칼리그래프의 범주를 수용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그것을 벗어나는 양가적인 태도와 과정으로 읽혀진다. 문자와 그림, 의미와 이미지 사이의 경계 위에 있는 그 과정은 현재진행형의 비결정적이고 불안정한 인상을 준다. 이는 그림이 발생시키는 의미를 공고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의미를 흔들어 의미의 토대를 해체시키는 전략적인 장치를 형용한다. 그리고 그 장치는 어떤 거대담론에 힘입은 것이기보다는 의미세계 곧 의미로 축조된 세계를 자기의 안쪽으로 불러들여 이를 해체시키고 재편집하는 놀이와 유희의 유기적 본성과 관련이 깊다. 말하자면 작가는 문자의 두 성분인 의미론적인 속성과 시각적 쾌감(그림)과의 사이에서 (심지어는 여기에 슈 같은 소리마저 합세하는) 노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촉발된 의미가, 그리고 이미지와 의미와의 관계가 전적으로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가하면 석고 받침대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행거에 무슨 망토처럼 드리워진 스펀지<조각적 신부>, 유리에 에칭 된 실루엣 형상<유령 파도 불>, 조악하게 깎아 만든 스티로폼 덩어리<꽃>, 알 듯 모를 듯한 드로잉<괴물지도>. 정서영의 작업은 그 의미가 열려있고, 비결정적이고, 암시적이어서 얼핏 보면 그 대상을 종잡을 수가 없다. 그나마 <전망대>같은, <기둥>같은 작업이 겨우 대상과의 연관성을 떠올려줄 뿐이다. 가녀린 행거에 드리워진 스펀지가 웨딩드레스 같고, 유리에 드리워진 실루엣 형상이 유령 같고, 스티로폼 덩어리가 꽃 같긴 하다. 그러나 조형물과 개념들, 이를테면 웨딩드레스, 유령, 꽃과의 의미연관은 그나마 제목이 없다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 만큼 그 개연성이 희박하다(제목 역시 개연성이 희박하다는 점에서 조형물에 결코 뒤지지 않지만, 여하튼). 심지어 조형물과 개념과의 관계는 객관과는 거리가 먼, 순전히 주관적이고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만 연관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그렇다고, 더욱이, 작가의 작업이 현실과의 의미연관으로부터 동떨어진 추상이나 초현실로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엄밀하게는 추상과 초현실 역시 현실과 현실인식에 연유한 것이지만).
괴물지도. 괴물? 작가는 현실에 늘 출몰하는 비현실(감)을 괴물로 본다. 살다보면 비현실감에 빠질 때가 있다. 어떤 일에, 어떤 생각에 몰두할 때, 몰두와 몰두 사이의 막간에, 넋 놓고 멍하니 있을 때. 그 종류와 질과 강밀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든 한 번쯤은 경험하는 일이다. 비현실(감)이 정해진 형태가 없으니 괴물이 맞다. 괴물이 정해진 형태가 없으니 알 듯 모를 듯한 흔적(비현실감의 흔적)으로나 겨우 기술(드로잉)될 수 있을 뿐인 것이 맞다. 작가가 현실과 만나고, 그 감(현실감)을 조형으로 옮기는 것은, 이런 식이다. 사물과 사물의 개념은 다르다. 사물과 개념 사이에는 의미의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사물의 개념은 그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한 의미, 의미의 한 자락, 한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해서, 작가는 그렇게 굳어진 사물의 개념,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사실은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념)의 바깥을 탐색한다. 의미론적 바깥? 의미론적 타자? 작가의 작업은 현실에 대한, 비현실에 대한, 재현에 대한, 탈재현에 대한(이 모두는 현실인식이 갈래진 것들이다) 산포하는 의미의 지점들을 열어 놓는다.
2000년대 한국현대미술의 특징으로는 세계미술계와의 교류가, 특히 일본과 중국 현대미술계와의 교류가 눈에 띠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비엔날레를 계기로 제기된 아시아성 담론(아시아 권역 국가들의 특수성을 반영한 담론으로써 서구미술과의 차별성을 꾀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으로 나타난)에 힘입어 한국, 중국, 일본의 현대미술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정착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봐도 될 듯싶다. 그리고 중국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한 미술시장의 폭발적인 증가세 역시 이러한 삼국간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실질적인 계기로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지금은 약간 답보상태에 놓여져 있는 감이 없지 않은데, 아마도 최근 조정국면에 접어든 미술시장의 일시적 침체와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반영해 제 13회 전시(2004.11.24-2005.1.23)는 한중일 3국 작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합동초대전 형식으로 열렸다. 전시에는 권오상, 박혜성(눈속임효과에 착안한 미술과 마술의 접점 찾기), 양아치(전자정부로 나타난 제도와 개인과의 관계), 이형구, 조습(현실을 비판하는 도구로서의 자기연출사진), 천성명, 황혜선(사물과 개념의 차이)(이상 한국), 펑 정지에, 홍 하우, 홍 레이, 왕칭송, 웨이 동, 자오 반디, 싱 단웬(이상 중국), 카와시마 히데아키, 무라기미 마나부, 쿠와쿠보 료우타, 나카무라 테츠야, 켄지 야노베(이상 일본) 등 총 19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참여 작가들 가운데 권오상은 사진과 조각을 결합하는 독특한 방식을 예시해준다. 잘게 나눠진 사진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등신대 크기의 인체나 사물을 재현한 그의 작업은 사진 한 장 한 장의 리얼리티가 모여 전체를 이루는 일종의 데오도란트 타입의 사진을 실현한 것이다. 이러한 프로세스 상의 특질로 인해 그의 작업은 흔히 조각적 사진 또는 사진적 조각이란 말로서 형용되며, 이는 곧 조각과 사진의 범주와 방법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마치 환조에서처럼 3차원적인 입체감과 질량을 가진 덩어리로써 일정한 공간을 점유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진의 표면적 세부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조각과 사진과의 경계를 허무는 한편, 실제를 흉내 내면서도 그 조작적 과정을 공공연하게 노출시킴으로써 오히려 특유의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이로써 실재와 재현, 실재와 이미지, 실재와 허구로 나타난 존재의 양면성을 동시에 열어 놓는다. 부분 이미지의 편린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조합한 결과, 실제와는 다르게 크게 왜곡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그대로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신뢰감을 심각하게 재고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잡지에서 오려낸 낱장의 이미지들을 바닥에 펼쳐놓고 중첩되게 세팅한 후 그 전체 모습을 다시 카메라로 촬영한 <더 플랫> 시리즈, 일상적인 사물 그대로를 조각으로 재현한 재 제작된 레디메이드 등 사진과 조각, 실재와 이미지간의 접점을 탐색하는 작가의 형식실험은 다변화되고 있고, 매번 의외의 지점들을 열어놓는다.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비롯한 유사 실험도구를 이용하여 얼굴의 특정 부위를 왜곡시켜 보여주는 이형구의 작업에서는 그로테스크한 인상이 감지된다. 그 이면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콤플렉스에 대한 반성, 그리고 마치 사이보그와도 같은 도구화된 인간, 기계화된 인간이 느껴진다. <베니스비엔날레 2007>에 출품되어졌던 <호모 아니마쿠스>는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일종의 전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서, 외관상으론 자연사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공룡 뼈 화석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정작 그것은 작가 자신이 유년시절에 즐겨 보았던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차용하고 변용한 것이다. 가상세계 속 캐릭터에게 현실의 살과 뼈를, 실체를 부여해주는 것에서 일종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로써 일종의 유사고고학(가상 캐릭터도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될 수 있다)을 실현한 것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동시대 작가에 관한한, 가상현실도 감각적 현실과 똑같이 현실감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한 천성명의 조각은 문학적이고 연극적이다. 내러티브가 강하고, 마치 연극무대에 올려진 상황극을 보는 것 같다. 자기가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영화로 치면 로드무비 같다. 그 여로에서 작가는 자기가 분열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렇게 분열된 자기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종래에는 그렇게 분열된 자기를 찾아내서 죽인다. 그렇게 살아있는 자기가 죽어있는 자기를 본다. 문턱이고 관문이며 통과의례다. 작가의 작업에는 그 과정이 일관되게 그려지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두려움과 공포, 불안과 욕망, 결여와 분열 같은 존재론적 상처를 보여준다. 그 상처는 우리 모두의 상처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서사, 자기 자신의 타자(성)에게로 소환되어지는 서사가 일인극을, 상황극을, 무언극을 보는 것 같다. 인생은 한편의 연극과 같다고 했다. 그 연극무대 위에 천성명은 자기살해극을 올려놓은 것이다(자기살해는 정화의식과 통과의례와 관련이 깊다). 아마도 그 연극은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 아예 끝이 없을 것이다. 혹, 매번 끝일지도 모른다.
제14회 전시(2006.9.29-11.26)에는 안정주, 조해준(다국적기업과 후기식민주의의 표상), 진기종, 김신일, 김안녕, 김홍희, 목진요, 박미경, 안강현, 이강원(크레파스로 만든, 재 제작된 레디메이드), 이해민선, 잭슨 홍(기계 장기), 정재호(일상으로부터 차용해온 이미지의 편린들을 재구성한), 최상아, 홍보람, 황종명 등 16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현실은 이미지와 소리가 합성된 것이지만, 보통은 이미지가 워낙 강해 정작 그 소리의 실체를 간과하기가 쉽다. 허나, 보통의 영상에서 음향을 묵음으로 처리하면 그 장면이 대번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에서 소리의 실체는 여지없이 드러난다. 안정주는 이처럼 이미지와 함께하는 소리의 실체에 주목한다. 일단은 현실 속 장면을 채집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도쿠멘타로 보인다. 이를테면 군인들의 열병식 장면이나, 삼삼오오 모여 게임이나 마작을 노는 장면, 포크레인이 낡은 건물을 해체시키는 장면, 그리고 공장에서 소주가 생산되는 장면. 작가는 그 장면의 부분 부분을 잘라서 반복해 편집함으로써 일종의 패턴을 만든다. 열병식의 어떤 동작을 되풀이해 보여주거나,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하는 건물. 때로 영상과 음원을, 음원과 음원을 분리해 따로 조작한 후 재차 하나로 편집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영상과 음원 모두에서 반복과 리듬과 패턴이 생겨난다. 이는 곧 도식화를 가능하게 하고, 인터렉티브를 가능하게 한다. 비록 조작된 것이지만, 현실에서 채집된 영상이며 음원 그대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편집된 도쿠멘타며 또 다른 현실이다. 그것은 동시에 사회문화적 현상에 작가가 개입하고 간섭하는 기호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박이나, 근대화의 과정을 극화시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이런 사회문화적 현상이나 이데올로기적 현실이 개인과 가장 가깝게 만나지는 장이 미디어다. 미디어와 개인과의 관계는 쌍방통행인 것 같지만, 사실은 일방통행이다. 이처럼 미디어가 일방으로 전송해오는 정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디어는 개인의 감각을 자극하고, 의식을 넘어 무의식을 파고들고, 판단과 가치관의 근거로까지 작동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그 정보를 근거로 웃고 울고 분노한다. 그 정보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정보가 알고 보니 조작된 것이고, 그 정보가 알려준 실제가 연출된 것이라면? 작가 진기종은 바로 이 지점을 다룬다. 일종의 가상 방송제작센터를 재구성해놓은 설치작업은 크게 제작 스튜디오와 방송이 방영되는 최종 단계로 나뉜다. 모니터를 통해 본 장면이 스튜디오에서 어떻게 제작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이를 통해 실제는 가상임이 드러나고, 현실은 가공된 것임이 드러난다. 이제는 상식이 된 이미지의 정치학(예컨대 여론조사를 빙자한 여론조작)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조작된, 연출된, 만들어진 리얼리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트루먼 쇼에 출연한 트루먼 버뱅크처럼,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가상현실이 미처 도래하기도 전에, 이미 진즉에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I am an artist〉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15회 전시에는 강석호(전형적인 기호로서의 정치적 제스처), 고등어(치유와 제의), 권경환, 김시원, 김윤호, 나현(역사의 재구성), 릴릴, 안두진, 오석근(바른생활에 숨겨진 이데올로기), 위영일(영웅 이데올로기), 이완, 이은실(금기와 터부), 이재훈(화석화된 이데올로기의 기념비), 이진준, 이혜인, 임승천, 최원준 등 17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어둠의 장막을 찢고 하늘 높이 차고 오르는 미사일, 폭발과 함께 혀처럼 날름거리는 화염, 핵폭탄이 터지면서 만들어낸 버섯구름, 무슨 불꽃놀이라도 하듯 명멸하는 성운으로 밤하늘을 수놓는 기관총소사. 전쟁은 스펙터클하다. 그러나 스펙터클은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이지도 않는, 그저 연신 단추만 눌러댈 뿐인 전투기조종사의 몫이며, 정작 지상에서는 참혹한 현실이 있을 뿐이다. 스펙터클과 지옥의 묵시록이 대비되고, 시뮬레이션과 리얼리티가 대비된다. 단추를 눌러대는 조종사는 그대로 버튼을 두드려대는 게이머와 겹친다. 전쟁과 오락. 전쟁을 전쟁으로 겪을 때 리얼리티가 발생하고, 전쟁을 오락으로 즐길 때 스펙터클이 발생한다. 모니터 화면으로 접해지는 전쟁이 오락이며 스펙터클이며 시뮬레이션이다. 9.11사건은 테러리즘이지만, 장면으로 전송될 때 그 사건은 초현실주의적 풍경으로 와 닿는다. 실제가 불러일으키는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감동. 권경환의 작업은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벽을 뚫고 들어온, 오라클로 명명된 미사일. 오라클은 미사일의 이름이면서, 미국의 유명한 소프트웨어 제조 회사명이면서, 고대 그리스어로는 신탁을 의미한다. 이 다중적인 의미를 가진 오라클의 몸체에는 사용설명서가 부기돼 있는데, 그 내용이 오리무중이다. 무슨 장비나 화공약품 설명서 같기도 하고, 약물 설명서 같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은 리얼리티가 스펙터클로 체험되는(변질되는) 지점을 예시해주며, 다층적이고 오리무중인 의미의 크랙을 열어 보인다.
그리고 작가 이완의, 흔한 축구공과 야구공. 그런데 알고 보니, 축구공은 고양이 사체를 갈아 만든 것이며, 야구공 또한 생닭을 갈아 만든 것이란다. 죽음(혹은 주검)이 매개가 돼 극적 반전을 이끌어내고 있는 이 공들은 푼돈을 받고 하루 종일 가죽 공을 꿰매는 일에 동원된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풍경의 설원 또한 케이크로 만들어진 것이며, 풍경이 케이크와 함께 썩어가고 있다. 썩음과 부패가 불러일으키는 죽음에의 환기가 낭만적인 풍경과 충돌하면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낭만적인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썩음과 부패를 내장하고 있고, 죽음과 파멸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아름다움을 결합시킨 것은 낭만주의의 위대한 유산이다. 선한 것이 아름다운 것(선미합일사상)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죽음의 순간이 아름답다. 숭고의 미학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이 감정은 극적이고 장엄하다. 그런데, 여기에 자본주의의 욕망이 덧붙여진다면? 감미로운 선율과 함께 각종 명품 브랜드가 디스플레이 된다. 그리고 그 사이로 부패한 죽은 참새가 눈에 들어온다. 명품은 죽음마저도 넘어선다는(넘어서게 해준다는) 뜻일까. 불현듯, 감미로운 선율이 자본주의의 욕망에 바쳐진 레퀴엠처럼 들린다.
나는 작가, 라는 타이틀에서도 엿볼 수 있듯 <젊은 모색전>에는 주제가 없다. 특정한 주제의식의 부재를 탓할 수도 있겠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해당기간(2년)동안 가능성이 엿보이거나 뚜렷한 문제의식을 부각하는 작가들을 다방면으로 선별하는 방식이다 보니, 어떤 주제를 내걸기가 쉽지가 않다. (특히 참여 작가들에게서 두드러져 보이는) 탈장르 현상과 탈재현의 논리, 비동일성의 논리와 차이의 논리가 팽배한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근 30년간 지속해온 본 전시의 방향과 성격에 대한 전환을 현재 심각하게 모색 중이라고 한다. 그렇게 달라진(달라질) 다음 전시가 기대된다.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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