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명은 예전 개인전 당시 자신이 겪었던 일화를 들려준다. 한 아주머니가 찾아와선, 며칠 전 신문에 난 상처투성이의 작품 이미지를 보고 불현듯 자신의 깊은 상처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20년 가까이 표현하지 못했던 상처를 가족에게 얘기하고 나서, 그 신문 조각을 들고 직접 전시장을 찾아왔다고 했다.
물론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상처를 그리고 만드는 작가들도 많다. 그러나 대개는 암시적이고 상징적이고 추상적이다. 천성명의 조각을 보면 먼저 와 닿는 단어가 상처다. 그가 표현하는 상처는 직접적이다. 온통 찢겨지고 깨지고 터져 있는가 하면, 칼집과 핏자국이 낭자하다. 더욱이 그의 조각은 하나같이 인물들이고, 그 인물들은 대개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한 것이어서 직접성에 진정성마저 더한다. 자신의 상처를 되새김질하는 작가, 그 상처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일깨워주는 작가, 해서, 우리 모두의 상처에 눈 뜨게 하는 작가는 결코 자신을 속일 수가 없다. 진정성이란 이처럼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행위에 따른 절실함과 투명함과 순진무구함을 형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말이다. 물론 남용되고 오용되고 더럽혀진 나머지 그 처음의 의미를 거의 상실할 지경에 이른 말들 중에 진정성도 포함되는 것이어서 이 말을 사용하기가 조심스럽긴 하다. 여하튼 형식은 없고 담론만 무성한 시대(모더니즘의 형식주의와 아방가르드의 형식실험에 연이은, 개념미술의 갈래들이 종횡하는 시대)에 이처럼 몸으로 부닥쳐오는 작가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고, 그의 작품이 감동을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일 것이다.
상처는 꿀꿀하다. 이 말은 진정성과 대면하는 것은 꿀꿀하다는 말과도 같다. 보통, 사는 것도 꿀꿀한데 예술에서마저, 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이 생각을, 적어도 예술에서만큼은, 이라는 생각으로 고쳐 잡아야 한다. 사는 것이 꿀꿀하면 예술도 꿀꿀하고, 그렇게 꿀꿀한 것이 당연하고 당연해야 한다. 예술은 피로회복제도 아니고, 재치를 겨루는 각축장도 아니다. 더욱이 상처에 직면하고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니체는 미학의 최종 지점을 용기라고 했는데, 상처에 직면하고 상처를 드러내는 행위를 너무 표피적으로 이해하지만 않는다면, 용기란 말을 상처란 말에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상처의 의미가 이처럼 표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작가의 조각이 하나같이 칼집과 핏자국이 낭자하지만, 해서, 상처가 몸 바깥으로 나와 있지만(작가는 폭력적 현실을, 특히 사회적 현실을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정작 그 상처는 몸 안쪽에 있던 것이 몸 바깥으로 나와진 것의 표상이며, 비가시적인 외상의 표상이며, 존재론적 외상의 표상이며, 트라우마의 표상이다. 결핍과 결여의식의 표상이며, 공허감(절박감의 다른 이름인)에 따른 존재론적 위기의식의 표상이며, 끝내 자기 자신을 붙잡을 수 없다는 무지의 표상이다. 상처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 칼부림한 자폭과 자해와 자상의 흔적이다. 자기 자신? 자신과 칼부림한다? 자살?
광대, 별을 따다(2000), 잠들다(2001), 길을 묻다(2002), 거울 속에 숨다(2003), 달빛 아래 서성이다(2005), 그림자를 삼키다(2007, 2008)로 이어지는 작가의 작업은 문학적이고 연극적이다. 내러티브가 강하고, 마치 연극무대에 올려진 상황극을 보는 것 같다. 자기가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영화로 치면 로드무비 같다. 그 여로에서 작가는 자기가 분열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렇게 분열된 자기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종래에는 그렇게 분열된 자기를 찾아내서 죽인다. 그렇게 살아있는 자기가 죽어있는 자기를 본다. 문턱이고 관문이며 통과의례다. 작가의 작업에는 그 과정이 일관되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열어 보이는 비전은 그대로 우리 모두의 전망으로 열리기도 하는 것이다.



자기분열과 자기분신

광대, 별을 따다(2000). 다이아몬드나 스페이드 문양이 그려진 헐렁한 옷차림과 고깔모자, 그리고 입술을 온통 덮으면서 그려진 웃음마크. 광대에 딸린 부수물들이다. 특히 웃음마크는 광대를 더 광대답게 해준다. 광대다움은 웃음에서 온다. 웃음은 광대의 운명이다. 사람들은 크게 그려진 빨간 마크에 가려 입술을 보지 못하고, 심지어 입술이 울 때 오히려 더 크게 웃는다. 광대는 울 때조차도 웃고, 쉴 때마저도 웃는다. 광대에게 마크는 가면과도 같다. 광대는 가면과도 같은 마크 뒤에 숨는다. 마크와 입술이 나뉘고, 가면과 광대가 분리되고, 현실과 이상이 분열된다. 광대는 사람들의 웃음 속에 자신의 현실을 내맡긴 채 그의 이상은 별을 꿈꾸고, 별을 따러 떠나고, 별을 찾아 헤매지만, 어디에도 별은 없다. 그래서 광대는 사람들의 웃음 속에 별이 있다고 상상한다. 웃음을 별로 바꾼 것이다(연금술). 사람들의 웃음을 질료로 하여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별무리를 생성시킨 것이다.
광대는 작가가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끄집어낸 분신이다. 작가는 광대를 매개로 하여 현실적인 자기와 이상적인 자기로 분리된다. 그리고 그렇게 분리된 이상적인 자기를 떠나보내지만, 그는 어디에서도 현실에 붙잡힌 자기를 구원해줄 만한 계기를 찾지 못한다. 광대는 처음부터 현실에 붙잡힌 자기를 구출해줄 만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오히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우는 자기분열을 재확인시켜 줄 뿐이다. 일종의 이방인 의식이며 자기소외다. 스스로를 낯설다고 느끼는 경험이다. 보들레르는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그 어디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 현실 속에?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이상이 될 수가 없다(사람들의 웃음이 별이 될 수는 없다). 이후 이렇게 분열된 자기는 작가의 다른 작업들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된다. 자기 위에 포개진 자기, 자기의 입을 틀어막는 자기, 자기를 죽이는(칼로 위협하는?) 자기.



잠들다(2001), 길을 묻다(2002). 잠든다는 말은 잠긴다는 말과 겹친다. 꿈과 현실 사이, 미몽이 펼쳐지는 어떤 지평 속에 잠긴다는 말이다. 여기서 작가는 자궁 속으로의 퇴행을 감행한다. 의식 이전의 무의식이 침전된 심연 속으로, 미처 발화되지 못한 말들이 웅성거리는 침묵 속으로, 의미화 되기 이전의 선의미들이 잠재된 원천에로의 퇴행을 감행한다. 일종의 존재론적 그리움이며 원형의식이다. 경계도 없고 끝도 없는 그 막막함에 서면, 질서보다 카오스가 먼저고, 구분보다 무분별이 선행한다. 이후 작가의 작업엔 마치 흑경과도 같은 검은 물이 담겨진 수조가 곧잘 등장한다. 검은 물 속에, 어둠 속에, 심연 속에 내가 들어있다. 그 속에서 나는 흔들리고, 흐릿해지고, 불분명해진다. 조각조각 해체되고, 마침내는 지워지고 만다(지워지는 것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복원되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작가는 빛을 투과하는 소재의 천(혹은 비닐?)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중첩시켜 설치한다. 그리고 그렇게 중첩된 막을 스크린 삼아 그 전면에서 자기의 초상을 영사한다. 이렇게 투사된 초상 이미지는 마치 두께가 없는 자잘한 절편처럼 분리되고 포개진다. 자기 속에 잠든 자기를, 심연 속에 잠긴 자기를 표현한 것이다. 그 심연 속에서 자기는 자잘한 자기들로 분리되고 포개진다. 이렇게 분리되고 포개진 자기들 가운데 나, 자아, 주체, 에고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는 어떤 자기인가? 작가의 이 작업은 리어왕의 자기고백(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을, 그리고 특히 롤랑 바르트의 양피지 이론을 떠올려준다. 나는 양피지 위에 나를(나에 대한 정의를) 쓴다. 그리고 그 정의를 지우고 다시 고쳐 쓴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마침내 양피지는 너덜너덜해졌지만, 나는 결코 만족할 만한 나를(나에 대한 정의를) 붙잡을 수도 없고, 그렇게 고쳐 쓰기를 그만 둘 수도 없다. 나는 그렇게 지워진 텍스트들의 총체이며, 미처 기술되지 않은, 기술될 텍스트들의 총체이며, 자기 부정성(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다.
그리고 한 소녀가 어둠 속에서 양팔을 내밀어 허공 속을 더듬어 찾고 있다. 더욱이 소녀의 눈은 띠로 가려져 있다. 어차피 어둠 속인데? 어차피 보지도 못할 터인데? 볼 수 없음에 대한, 자기부정성에 대한, 타자성에 대한 강조화법이다. 강조화법은 볼 수 없음이 현실적이고 감각적이고 의식적인 층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이고 비물질적이고 무의식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주지시킨다. 소녀는 길(자기)을 찾지만 그 길(자기)을 찾지 못한다. 작가의 작업엔 이 소녀 외에 상반신의 일부가 벽 속에 흡수된 사람들이 곧장 등장한다. 아마도 소녀처럼 길(자기)을 더듬어 찾던 포즈 그대로 고정된 사람들일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 자기를 찾아 헤집어보지만, 유감스럽게도(당연하게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도 찾지 못하고 자기도 찾지 못한다. 여하튼 작가가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불러낸 또 다른 분신인 소녀는 이후 다른 작업에서 여러 차례 재등장하는데, 주로 자기 부정성(타자성)을 극복하게 해주는 빛(등불을 들고 있는 소녀)과 길잡이(풍경을 들고 있는 소녀) 역할을 도맡는다.

거울 속에 숨다(2003). 거울은 자기반영성의 상징이다. 시종 자기정체성 찾기에 천착해온 작가의 작업엔 이런 거울이 곧잘 등장한다. 거울은 사진이나 그림 속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하고, 수면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검은 물이 담긴 수조나, (특히 그림자를 삼키다 시리즈에서) 늑대가 내장을 다 파먹어 텅 빈 뱃속에 담긴 검은 물로 변주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죽은 자기를 뒤로 하고, 또 다른 자기가 벽면에 붙은(사실은 그림으로 그려진) 거울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거울이 높이 걸려 있어서 자기 모습을 비춰보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고, 오히려 거울 속에서 다시금 분열된 또 다른 자기가 거울 밖 자기를 내다보고 있는 것 같은, 거울 속 자기와 거울 밖 자기가 분열되고 불일치하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실제와 상의 관계가 전도된다고나 할까. 이렇게 거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자기반영성의 연쇄(죽은 자기와 거울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기, 그리고 거울 속에서 거울 밖 자기를 내다보고 있는 자기)를 수행하고, 그 수행과정 속에서 실제와 반영상과의 관계를 따져 묻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에서 거울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자기분열을 상징한다.
이와 함께 이 일련의 작업들은 자크 라캉의 거울반영이론을 떠올려준다. 각각 상상계(실재와 개념이 분리되기 이전의 자족적이고 충만한 세계)와 상징계(실재와 개념이 분리되고, 그렇게 분리된 실재가 개념에 의해 억압되어지는 단계로서, 유아가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맞닥트리는 최초의 억압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렇게 억압된 것이 무의식의 지층을 이룬다)와 실재계로 이어지는 자아발달단계 중 그 처음단계인 상상계에서 유아는 거울을 보고 웃는다. 거울 속 반영상이 완전하다고 상상하고 웃는 것인데(완전한 존재 곧 타자와의 대면에 매혹되는 웃음), 이에 반해 정작 거울 밖의 자기(실체)는 불완전하다고 상상한다. 최초의 분리와 분열이 일어나고, 처음으로 타자와 대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계에서 실체와 그 실체로부터 유래한 반영상과의 관계가 전도된다는 것이다(실체는 불완전하고, 오히려 반영상이 완전하다는). 어쩌면,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맞닥트리는 이 사건, 이 경험, 즉 자기가 다른 자기(타자)로 분리되고, 이에 다른 실체와 반영상과의 관계 전도현상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라캉은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업엔 유독, 마치 도자기 파편을 얼기설기 조합해 놓은 것 같은, 깨지고 터진 자기표현이 많다. 몸통이 깨진 경우도 있고, 마치 상처로 뻥 뚫린 가슴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내려앉은 가슴을 손으로 간신히 추스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깨지고 터진 자기표현은 특히 거울과 대비될 때 그 형태나 의미가 더 뚜렷해지는데, 아마도 유아가 처음으로 맞닥트린 이후 내내 무의식의 지층으로 억압된 자의식(나는 불완전한 존재다)을 재확인시켜주는 경우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살해와 자기구원

달빛 아래 서성이다(2005). 숲 속 연못 위로 어스름한 달빛이 투영된다. 여기서 연못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반영성을 위한 계기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계기를 자기 속에 품고 있는 숲은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세계, 상상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 상실된 유년을 암시한다. 그 숲 속 어딘가에서 유년의 놀이소리가 들려오지만, 그 소리는 적막한 숲의 어스름 속에 파묻혀 공허한 울림만을 되돌려줄 뿐이다. 그 숲 한가운데에는 날개가 부러진 자기(천사로 변주된 자기?)가 누워있고, 그 다른 한 쪽 방에선 또 다른 자기가 재봉틀을 이용해 열심히 날개를 만들고 있다. 여기서 추락한 자기의 부러진 날개는 저당 잡힌 유년과 그 꿈을 암시하며, 또 다른 자기의 날개를 만드는 행위는 그 꿈을 애써 복원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암시한다.
그런가하면 어스름 달빛 아래 정맥을 절단하는 또 다른 자기에게선 트라우마가, 죽음이 강력하게 환기된다. 어스름 달빛은 광기를 부른다. 그 부름은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카뮈의 이방인이나, 미에 이끌려 금각사를 불태우는 미시마 유키오의 주인공에게서 나타난 미학적 부조리를, 미학적 (자기) 선고를 떠올리게 한다. 그 숲 한쪽에는 흐드러진 꽃밭 속에 온몸이 깨지고 터진 소녀가 누워있다. 작가를 구원하기 전에 죽음을 예비(예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달빛이 비치는 숲은 상실된 유년, 거세된 유년을 넘어 일말의 광기마저 함축하고 있다. 달빛 아래 서성이는, 이 장은 작가의 자기서사가 전개되는 지평 중 죽음의 장에 해당한다.

그림자를 삼키다(2007, 2008). 유명한 향수광고 중, 향수를 서로 먼저 잡으려고 모델이 자신의 그림자와 다투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그런가하면 중세 이야기 중에는 자신의 그림자를 악마에게 판 사람의 이야기가 여러 다양한 버전으로 변형돼 전해져 온다. 예나 지금이나 그림자에 대한, 자기 분신에 대한, 자기분열에 대한 인식에는 크게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오죽하면 회화의 기원을 그림자(실루엣)에서 찾기조차 한다. 이 일련의 사례들에 나타난 그림자에 대한 이해는 이중적이다. 이를테면 중세 이야기와 회화의 기원에서 그림자는 실제와 동일시된다. 실제와 이미지의 동일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그림자는 영혼과 동일시되고, 전장에 나간 애인과 동일시된다). 이에 반해 향수광고에서 그림자는 자기 동일성보다는 타자성의 인식이 강하다. 자기동일성과 타자성이 그림자의 양면이며(마치 야누스의 얼굴과도 같은), 상보적인 두 축이다.
이처럼 그림자는 자기분신이며, 타자성의 인식과 관련이 깊다. 작가는 그 그림자를 삼킨다. 자기분신을 삼킨다? 상처와 죽음을 삼킨다? 이 장에선 유독, 마치 무슨 대전환이라도 맞듯, 자기분열이 두드러져 보인다. 자기가 다른 자기 위에 포개져 있고(샴쌍둥이처럼 자기가 자기로부터 분리되는?), 자기가 다른 자기의 입을 틀어막고(의식적 자기가 무의식적 자기가 하는 말, 속말, 몸말을 제어하는?), 자기가 다른 자기를 칼로 살해하려고 위협한다(자기의 타자성을 끝장내는? 극복하는?).
그 여로는 작가의 다른 작업들에서처럼 어스름 숲에서 시작된다. 한 사내가 포박된 채 숲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먼발치에 죽어있는 자기의 분신을 본다. 그 분신은 늑대들이 내장을 헤집어 뱃속이 텅 비어있다. 그리고 그 뱃속엔 내장 대신 검은 물이 거울처럼 담겨져 있다. 이 죽음과도 같은 무의식을 뒤로하고, 그는 숲 속에(아마도 나뭇가지?) 걸린 거울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그 거울은 너무 높이 걸려 있어서 자신을 비춰볼 수가 없다. 그런데, 정작 거울 속에선 또 다른 자신의 분신이 거울 밖 사내를 내다본다. 자기분열과 자기죽음, 이 모든 광경을 숲 속의 새들이 침묵 속에 지켜본다. 사내는 그 새들을 잡아먹는다. 그 새들의 피는 파랗다. 숲 속의 정기가, 달빛의 광기가 스며있는 색이다. 숲 속에는 사내와 늑대들과 새들 말고도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아마도 사내가 자신의 분신을 죽이고,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그림자를 삼키는 순간을 지켜보며 기다려왔을 것이다. 그녀의 손엔 풍경이 들려있고, 등불이 들려있다. 등불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을 죽인(자신의 그림자를 삼킨?) 사내가 죽음을 넘어 어두운 숲 저편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길잡이며 빛이다. 그리고 풍경(목어)은 불교에서 항상 깨어있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소녀는 사내에게 그 목어를 안겨준다. 그렇다면, 그 사내는 정말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그림자를 삼킨 것일까? 사내들만 사내의 분신이 아니라, 늑대도, 새도, 물고기도, 심지어는 소녀마저도 사내의 분신들이다.

자신을 소재로 한 천성명의 조각은 두려움과 공포, 불안과 욕망, 결여와 분열 같은 존재론적 상처를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길어 올려 보여준다. 그 상처는 우리 모두의 상처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서사, 자기 자신의 타자(성)에게로 소환되어지는 서사가 일인극(분열된 자기들을 극화한)을 보는 것 같고, 상황극(존재론적 상처의식을 극화한)을 보는 것 같고, 무언극(침묵은 더 많은 말을 한다)을 보는 것 같다. 인생은 한편의 연극(요샌 영화?)과 같다고 했다. 그 연극무대 위에 천성명은 자기살해극을 올려놓는다(자기살해는 정화의식과 통과의례와 관련이 깊다). 아마도 그 연극은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 아예 끝이 없을 것이다. 혹, 매번 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