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터클이 현실로 내려오면 사람들은 쉬이 조루해진다. 스펙터클을 가동하고 가속하는 기계가 자본주의라면, 조루증은 자본주의가 낳은 병이다. 스펙터클, 파사드, 클리셰들, 구조와는 상관없는 표면들, 의미와 겉도는 기호들이 사람들을 조루하게 하고, 조로하게 하고, 쉽게 피로감에 빠지게 만든다. 속도와 피로감. 가속과 조울증. 자본주의의 두 축(현상학과 병리학)이다. 즉각적으로 유혹하고 욕망하게 하라. 그리고 일단 유혹한 연후에는 그 욕망을 곧장 폐기시켜라. 그리고 다른 욕망, 더 큰 욕망의 파사드를 꿈꾸게 하라. 자본주의로 하여금 꿈의 산업이 되게 하라. 김기라의 작업은 이런 자본주의 물신의 지상명령에 반응하고, 간섭하고, 비튼다.
이를테면 <표준>(2002), <주변 혹은 전체>(2003), <신기루 궁전>(2007), <선전 공화국>, <황금 크리스털>(각각 2008), <슈퍼메가팩토리>(2009) 등 김기라가 매번 자신의 개인전에 부친 주제를 일별하는 것으로 소위 스펙터클소사이어티와, 자본주의 물신의 성격이 읽힌다.
표준이란 기준이다. 누가 기준을 정하며, 또한 그 기준은 어떻게 표준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여지는가. 여기서 작가는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관계를 다룬다. 제도가 개인에게 기준을 정해주면, 개인은 그 기준을 표준적인 준칙으로서 내재화한다. 그 표준, 그 준칙이 상식과 합리, 관습과 관례로 자리하며, 그 관습을 어기면 사회로부터 거세된다. 이렇게 거세된 개인들이 사회의 주변부를 형성하는데, 이렇듯 주변인으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전체의 일원으로서 예속되어져야 한다. 전체의 프로파간다는 말할 것도 없이 전체주의로 나타나고, 몰개성과 균질화, 규격화와 패턴화의 기획과 더불어 개인은 자본주의의 한갓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 프로파간다는 <우리는 하나>로 나타난 글로벌리즘,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의사유토피아로 확대 재생산된다.
이렇듯 <표준>과 <주변 혹은 전체>에서 작가는 사회에 의해 주변인으로 내몰린 사람들, 제도에 의해 거세된 사람들, 사회적 약자가 처해있는 현실을 조망한다면, 다른 작업들에선 자본주의의 자기논리에 주목한다. 자본주의는 궁전을 약속하지만 실상 그 궁전은 신기루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욕망을 약속하지만 실상 그 욕망은 신기루처럼 손에 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실체 없는 욕망이 자본주의 공화국의 이면이라면, 그 부재를 숨기기 위한 선전이 그 표면이다. 자본주의가 약속한 욕망은 이처럼 진즉에 실체를 결여한 것이기에 그 욕망에 대한 프로파간다는 오히려 그 만큼 더 절실해지고 절박해진다. 그리고 그 절실함과 절박함이 일종의 강조화법으로 나타난다. 즉 황금과 크리스털, 슈퍼와 메가는 각각 강조에 강조가 중첩된 이중강조화법이다. 이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작가의 진단은 실체를 결여하고 있는 만큼이나, 오히려 그 표면에 더 강박적으로 천착하는 것으로 내려진다. 실체 없는 표면들의 놀이, 기의 없는 기표들의 유희란 점에서 그 놀이, 그 유희는 폭력적이다(표면으로 실체를, 기표로 기의를 가장함으로).
이처럼 작가는 (주로 전작에서) 사회적 약자 혹은 주변인의 문제를 다루고, (주로 근작에서) 자본주의의 욕망을 다룬다. 작가의 주제의식은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크게 두 갈래의 지층으로 나눠지지만, 실은 그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 실제로 전작과 근작의 경향성이 일정정도 겹칠 뿐만 아니라, 어느 경우이건 종래에는 개인과 제도의 관계에 소급되는 주제의식을 공유(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성과 비정상성
김기라의 첫 개인전은 2002년으로 소급된다(갤러리 보다). 당시 작가의 작업은 주로 영상작업으로서, 비디오 매체의 가장 전형적인 형식이랄 수 있는 싱글 채널 비디오의 형식을 띤다. 흔히 싱글 채널 비디오는 일정한 스토리 전개에 바탕을 둔 문학적 서사가 특징이며, 사실상 단편영화 또는 실험영화의 한 유형으로서 범주화된다. 그리고 내용면에서 작가는 비디오를 사회에 만연한 위선과 편견의 더께를 벗겨내는 일종의 정치적인 도구로 전용한다. 소위 정치적 비디오로 유형화되는 것인데, 이로부터 도출되는 일군의 개념들, 이를테면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 계급과 권력문제는 향후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으로 심화되고 변주된다.
그리고 그 주제의식은 무엇보다도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구분에 맞춰진다. 이를테면 다운증후군의 선천성 장애인과 자폐아를 등장시킨 <표준>(2001)이나, 세 명의 다운증후군 환자가 수영장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을 비디오로 녹화한 후 빠르게 재생한 <댄스 댄스>(2001)와 같은 일련의 영상 작업에서 작가는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구분하는 사회적 편견을 비판한다. 일반인이 춤추는 모습을 빠르게 재생해도 우스운데, 장애인의 경우에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장애인을 자신의 작업에 끌어들이는가. 그들을 희화화하는 것이 목적인가. 당연히 그것이 목적일 수는 없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분하고, 관리하고, 게토화하는 한편, 이를 관습화하고 내재화하는 정신병리학의, 위생학의, 우생학의 이상을 의문시한 것이다.
그 이면에선 미셀 푸코의 소위 생물 권력의 개념에 대한 공감이, 그리고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제도에 대한 공감이 확인된다. 말하자면 모든 제도는 건강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건강하지 못한 개인들을 가려내 격리수용하는데, 예전에는 사회 밖에 격리수용했다면(육체적 감금시대에는 정신병원이 그 기능을 도맡았는데, 정신병원은 특히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개인들과 함께 잠재적으로 사회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는 불건전한 개인들을 격리수용했다), 근대 이후에는 사회 속에 격리수용한다(사람들의 의식 속에 정상과 비정상의 규준을 심어, 그 편견으로 하여금 감시기능을 수행하게 하는데, 여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교육이 동원된다). 그리고 지라르에 의하면 모든 건전한 제도는 희생양을 요구한다. 민중의 폭력을 투사할 수 있는 희생양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제도의 가장 중요한 과업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에는 익명적 대중이 그 기능을 대리한다.
이후에도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장애인을 곧잘 등장시키곤 했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경우로는 장애인 부부로 하여금 마음에 드는 웨딩드레스를 고르게 한 후 사진을 찍는 <웨딩 프로젝트>(2003), 그리고 유명 디자이너인 알렉산더 맥퀸이 디자인한 옷을 장애인들에게 입혀 촬영한 사진작업들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옷이다. 그것도 예사스럽지 않은 옷. 꿈의 날개와 명품. 특히 후자의 경우 영국의 현지전시에서 선보인 작업으로서, 당시 사람들의 곱지 않은 항의에 직면했다고 한다. 상품을 선전하기 위한 구실로서, 자본주의의 프로파간다를 극화하기 위한 소품으로서 장애인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이제는 장애인까지!!). 좀 과장시켜 말하자면 일종의 충격요법이며, 낯설게 하기 기법이 읽히는데, 정작 그 방법론(광고에 비정상성을 끌어들이는 것) 자체는 이제 상업광고에서 공공연한 현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하튼 이 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아마도 장애인을 향한 사람들의 편견을 교정해주고 싶었을 것이며(장애인은 왜 안돼?), 나아가 무차별적인 차용과 접붙이기에 능수능란한 자본주의의 욕망과 방법론을 대리하고(반어법적으로)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장애인에 대한 자본주의의 포용력? 제3세계에 대한 다국적기업과 선진제국주의의 포용력? 지역성과 문화적 차이에 대한 다원주의의 관용? 작가의 작업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의식은 동시에 자본주의의 욕망과, 그리고 문화사회학의 지평과 겹친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제도가 그어놓은 금이며, 편견이며, 독사(doxa)며, 비활성의 지식이다. 그 문제의식은 장애인에게서 아줌마로, 잠재적인 자살자(죽음은 가장 지극한 금기란 점에서 비정상적이다)로 확대 재생산된다. 이를테면 〈give a fair〉(2004)에서 작가는 에어로빅에 열중인 아줌마들을 보여준다. 중년의 아줌마들이 살 빼기에 열심인 보통의 녹화필름을 편집해 보기에도 민망한 살덩이들, 숨이 턱에 턱턱 차오르는 살덩이들, 강박적으로 육박해오는 살덩이들, 그로테스크한 살덩이들에 직면케 한다. 살마저도 금지된 시대, 살마저도 비정상적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살은 게으름의 소산이며, 무능력의 증명이다.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군대에서조차 살찐 장교는 진급할 수가 없다(진급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작가는 <29층>(2002)에서, 비디오 캠코더를 들고 29충에 달하는 고층 아파트의 계단을 힘겹게 오른 후 곧장 캠코더를 옥상 바깥으로 던져버린다. 캠코더가 본 것이 그대로 기록되는데, 마치 29층을 힘겹게 오른 후 곧장 옥상 밖으로 몸을 날린 미지의 자살자가 그 긴박한 순간에 본 장면과 겹친다. 자살자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살자가 본 것을 기록한(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실제로는 기록 불가능한)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준다. IMF 이후 여러 이유로 자살이 빈번해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었던 시기에 나온 작업이다. 현실을 증언하는 매체로서 뿐만 아니라, 정작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기체적 매체, 스스로 보고 듣고 재생하는 매체, 자족적인 매체를 실현한 것이다.
그리고 비정상성은 조폭으로, 파시스트로, 프로레슬러로, 나아가 애완견으로 변주된다. 이를테면 <신기루 궁전>(이 개념은 2007년 아시아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초대 전시된 영국 킹스린 아트센터에서의 개인전에서 동명의 주제로 다시 등장한다)에서는 조폭이 웃음마크가 그려진 풍선에 힘겹게 바람을 넣다가 마침내 터져버린다. 그리고 <파시스트>에서는 바람 빠진 풍선으로 된 지구본을 마구 주물럭거리는 파시스트의 탐욕적인 손과 불꽃축제의 이미지를 대비시켜 제국주의의 욕망을 극화한다. 그런가하면 프로레슬링을 테마로 한
더불어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를 권투선수로, 어머니를 역도선수로 둔갑시켜 극화하고 있는데, 사회로부터 가정을 자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바친 부모 세대들의 희생을 무슨 투사처럼 그려놓고 있다. 그 이면에선 한국 근대화의 이면에 가려진 소외를 부각하고 복원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리고 강아지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데, 사실은 우울증에 걸린 개, 비만으로 고통 받는 개, 성대제거 수술로 짖지 못하는 개들이다. 카메라를 주시하는 개들의 눈 속에 주인이 들어있다. 졸지에 주인과 내가 동일시된다.
이처럼 작가는 제도가 정의한 비정상성을 증언하기 위해 장애인, 아줌마, 자살자, 조폭, 파시스트, 프로레슬러, 애완견, 심지어 부모를 호출한다. 이렇게 열거해놓고 보니, 한눈에도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제도의 기획은 체계와 질서를 가장하지만, 사실은 무차별적이다). 이들은 외관상 멀쩡해 보인다(정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멀쩡하지 않은가. 무엇이 멀쩡하지 않게 하는가.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자, 사회적 주변인을 생산하는 것은 제도의 오랜 기획이며, 공공연한 기획이다. 루이 알튀세는 제도가 개인을 호명할 때 주체가 생성된다고 했다. 제도가 개인에게 부과해준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며, 제도적 주체며, 이데올로기적 주체들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제도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들이다. 이로써 작가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한갓 제도의 기획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드러내고, 제도의 제국이 사실은 그 기획의 터전 위에 축조된 것임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욕망
그리고 김기라는 2004년 YBA 작가들의 산실인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 유학한 후 2007년 귀국한다. 이 시기의 정점은 2007년 영국 킹스린 아트센터 전시(신기루 궁전)에 초청받은 것이며, 이 시기를 전후해 발표한 작품과 그 경향은 대개 이 전시에서 선보여졌던 것들을 변주하고 확대 재생산한 것들이다. 그 경향은 지금까지의 경향과 일정부분 겹치면서도 사뭇 다른데, 전작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사회적 편견과 그 편견에 대한 실질적 계기로서 작동한 제도의 기획을 폭로하는 것에 맞춰졌다면, 이후 작업들은 자본주의의 욕망과 그 욕망이 만든 사회풍경 즉 본격적인 스펙터클소사이어티를 조망하는 것에 맞춰진다. 개별주체에서 문명사적 비전으로까지 그 범주가 확장된 것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 중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일련의 텍스트 작업들이다. 〈Coca Killer〉, 〈I Love U〉, 〈Love U 4ever, Power 4ever〉, 〈We are the One〉, 〈haven, hell〉. 그대그때 상황에 맞춰 LED와 네온, 그리고 할로겐을 적절하게 사용한 이 일련의 문구들은 뻔한 메시지, 과도한 메시지, 차고 넘치는 메시지를 흘리면서 번쩍번쩍 유혹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표면들이며, 파사드들이다. 말장난과 과장법과 반어법이 적절하게 구사된 이 선전문구들의 속내를 그대로 옮겨보면, 정크푸드를 먹으면 죽는다(다국적기업), 사실은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클리셰), 우리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글로벌리즘과 코스모폴리타니즘)는 메시지가 된다. 이런 반어적 메시지를 유혹적인, 섹시한 조명이 덮어 가리는 것이다. 특히 말장난에서는 일종의 의미 비틀기(낯설게 하기)와 함께 타자의 문화를 수용해 자기화하는 상호영향사의 과정을 희화화하는 재치가 엿보인다.
이 가운데 정크푸드는 현대판 바니타스 정물화로 변주된다. 버거킹 애플파이, 코카콜라, 스타벅스 모카커피, 허쉬 초콜릿, 맥도날드 감자 칩과 같은 기호식품(?)이 무분별하게 어질러진 테이블 한쪽에 말보로 담배가 수북한 재떨이 위로 피다 만 담배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그리고 메멘토모리의 숨은 뜻을 전해주던 해골 대신 용기의 표면에 들러붙어 즙을 빠는 파리가 그려져 있다. 그 의미가 적나라하고 표면적이란 점에서 키치적이다. 자본주의 물신이 현현하는 자리는 이처럼 언제나 키치적이다. 키치, 표면, 파사드, 클리셰,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독으로 하여금 살찐 돼지가 되게 하고, 일단 돼지가 된 연후에는 가차 없이 내쳐라. 그리고 웰빙과 다이어트, 성형과 살 빼기 전쟁으로 내몰아 마지막 남은 지방까지 남김없이 짜내라. 고색창연한 그림 속에 이런 현대판 낭만주의 이데올로기(죽음은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기호로 알려져 있다)가 스며있다면, 이는 지나친 과장일까.
그리고 상호영향사와 관련해 흥미로운 작업이 〈Security Garden as Paranoia〉와 〈Super Heroes Monsters〉 시리즈다. 〈Security Garden as Paranoia〉에서 작가는 각종 도자기와 분재를 잡동사니 물건들과 함께 진열한다. 그 수집품목이 일관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저 일상에서 흔히 볼 법한 물건들을 아무 생각 없이 배열해놓은 것 같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물건들은 서양인들에게 진즉에 동양적인 것으로 알려져 온 아이템들이다. (사실은) 국적불명의 오브제들, 일상적인 물건들을 통해 동양적인 혹은 한국적인 모습의 스테레오타입을 제시하면서 오리엔탈리즘에 반영된 서구적 시각을, 그 한계와 왜곡을,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해석을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Super Heroes Monsters〉시리즈에서 작가는 일종의 영웅이데올로기를 다룬다. 무슨 원시부족의 목각 가면 같고 주술인형 같은데, 자세히 보면 친숙한 기호들이 눈에 띤다. 배트맨의 머리, 원더우먼의 황금 머리띠, 스파이더맨의 피복 등 대중매체 속 영웅들의 지표들이 무분별하게 뒤죽박죽돼 있어서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기도 하고, 괴물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코믹하게 보이기도 한다. 괴물처럼 보이는 영웅들이 바로 주제다. 우리가 (순진하게도) 영웅으로 알고 있었던 대중매체 속 캐릭터들이 알고 보니 (패스트푸드와 함께) 선진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도맡은 서양귀신들이고 괴물들이었다는 것이다(괴물 이데올로기는 영웅이데올로기의 짝패다). 그 괴물들은 무슨 부속품처럼 이목구비를 자유자재로 갈아 끼울 수조차 있다. 자유자재한 변신과 변태. 트랜스포머. 자본주의는 이렇듯 천의 얼굴로서 다가온다.
그리고 작가는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작품 〈21th Century World and Universal Experience〉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인트로 영상으로 영화 <스타워즈>의 도입부 장면을 반복해 보여준다. 21세기라고 해서 무슨 큰일이나 일어날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가 않는다. 여기서 영화관을 찾은 관객의 기대는 여지없이 배반당하고 만다. 스펙터클이, 야단법석이 반복될 뿐. 그뿐.
이외에도 작가는 어른들을 위한 미간행 동화 <노란 뱃지>를 직접 집필하기도 했으며, 수년 전부터는 <김기라 상상공작소>를 운영해오고 있다. 그리고 현재, 최근 몇 년간 상승과 추락을 거듭해온 증시 그래프를 오케스트라의 악보로 바꿔, 그 음계 그대로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구상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