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상 형상미술을 사실주의에 바탕을 둔 고전주의 스타일과 표현주의에 바탕을 둔 신형상미술로 구분해볼 수 있다. 전통적인 구상회화로서의 고전주의 스타일이 대상의 충실한 재현에 초점을 맞춘 경우라면, 신형상미술에서 대상의 재현은 다만 구실일 뿐 이를 통해 암시되는 어떤 상황의 전달이 더 결정적이다. 주제의식이 상대적으로 더 강조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구분을 인정한다면, 김진의 회화는 신형상미술의 한 갈래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일군의 인물화를 통해 시대와 개별주체, 시대와 인간 일반의 관계를 파헤친다.
이처럼 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 김진의 작업이 갖는 특정성은 정작 그림보다는 오히려 퍼포먼스 〈I am transparent 검문검색에 의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의상과 가방〉에서 더 잘 드러나 보인다. 2000년대 초 프랑스 유학시절 퐁피두센터 앞에서 벌인 퍼포먼스로서, 당시 김진은 알몸 위에 투명한 레인코트를 입고 벌인 퍼포먼스를 통해 제도와 개인과의 관계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과의 관계를 다룬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퍼포먼스로 인해 작가는 경찰에 연행되고, 옷과 가방 모두를 압수당한다. 예술의 인준을 받을 경우에 행위는 퍼포먼스가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단순한 풍기문란죄와 같은 경범죄에 저촉될 뿐이다.

누드와 네이키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남성주체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여성주체의 몸이 누드며, 그저 벌거벗은 몸에 지나지 않는, 보기에도 민망한 여성주체의 몸이 네이키드다. 누드는 제도적 장치고, 네이키드는 자연 그대로이다. 제도적 장치는 제도의 인준을 받은 경우이며, 자연은 제도에 의해 금지와 금기와 터부로서 억압된다. 미술관 역시 제도적 장치다. 행위가 퍼포먼스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이 제도적 장치(미술계)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그 관습적 틀 내에서의 행위이어야 한다. 작가의 행위는 이렇듯 누드와 네이키드, 퍼포먼스와 풍기문란을 구분하는 근거가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렇듯 제도적 장치의 개입에 의한 것임을 주지시킨다. 이로써 예술과 일상, 예술적 행위와 일상적 행위를 나누는 임의적인 경계와 그 임의적인 잣대에 기생하는 제도의 논리를 폭력적인 계기로서 부각한 것이다.
누가 벌거벗은 몸을 감시하고, 수색하고, 금지하는가. 미술관 안에서 벌거벗은 몸과 미술관 바깥에서 벌거벗은 몸을 구분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미술관에는 레인코트(심지어 작가는 속옷마저 갖추어 입은 상태였다고 한다)는 고사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허다한 벌거벗은 여인들이 모셔져 있다. 당시 작가는 옷과 가방 모두를 압수당했으며, 2006년 이를 오브제로 재 제작해, 2008년 전시(불량배전, 갤러리 쿤스트 독)에서 텍스트를 보충해 아카이브 형태로 재구성해 보여준다. 예술과 금지, 예술과 제도와의 관계를 테마로 한 이 퍼포먼스는 향후 작가의 회화작업을, 그 성격을 결정짓는 상징적 사건으로 보인다.

일련의 초상 작업들(milles feuilles 시리즈, 2008년 갤러리 더 케이). 멀게는 1999에 그린 그림에서부터 가깝게는 2008년에 새로 그린 그림에 이르기까지의 일군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일종의 초상화를 보여준다. 마구 겹쳐진 붓질과 무분별하게 흘러내리며 맺힌 물감자국, 북북 그어댄 스크래치, 음영 속에 묻혀 그 세부가 지워진 이목구비. 얼굴은 그 비정형의 자국들 뒤로 사라진다. 작가의 그림은 초상을 테마로 한 것이지만, 초상을 그린다기보다는 초상을 지우는 것 같고, 얼굴을 드러낸다기보다는 얼굴을 숨기는 것 같다. 지움으로써 그리고, 숨김으로써 드러내기?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드러내는가? 얼굴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지우고, 내면을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내면이 외면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할 적이 있다. 내면이 외면이 되는 것? 내면은 어떻게 외면이 될 수가 있는가?
얼굴과 머리. 질 들뢰즈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분석하면서 얼굴과 머리를 구분한다. 얼굴은 사회적 기호인 만큼 모두가 공유하는 기호이며, 따라서 엄밀하게는 개인에게 속해져 있지 않다. 우리는 흔히 표정을 연출하고 연기할 수가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나는 너를 결코 사랑하지 않아 라고 마음속으로 말할 수가 있다. 나는 나를 나로부터 분리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이중분열과 도플갱어, 그리고 정신분열). 이렇게 나로부터 분리된 내가 머무르는 지표가 얼굴이며 표정이다. 그러므로 (그) 얼굴에는 내가 없다(자크 라캉은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들어있지 않다고 한다). 우리가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우울한, 꿀꿀한, 거만한, 건방진, 젠체하는, 선량한, 우호적인, 착한, 그리고 못된 표정 모두는 이처럼 나로부터 분리된 내가 만들어낸, 연출하고 각색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기호를 즉각 알아보고, 그 기호를 그 자신과 동일시한다(자기동일성의 논리).
그렇다면 머리는? 머리는 당연 이런 자기동일성의 논리로 환원되지가 않는다(비동일성의 논리). 자기발생적인 사유며 표상 없는 자극의 흔적일 뿐인 머리는 다른 사람들을 낯설게 하고 때로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낯설다. 제도에 의해 억압된 것들, 무의식의 지층에로 추방된 것들, 자연성과 본성, 동물성과 식물성, 야성과 야생, 폭력충동과 파괴충동과 살해충동, 사디즘과 마조히즘, 두려움과 불안, 금지와 금기, 위반과 도발, 숭고와 신성의 흔적?(시인 랭보는 나는 동시에 신이며, 악마며, 타자라고 했다). 엄밀하게는 이것들과 동일시되지도 않고, 다른 무엇과도 동일시되지가 않는다. 현실 속에서 그것에 대응하는 어떤 대상도 찾아볼 수 없는 실체들이며, 일회적 실체들이다.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얼굴 뒤쪽에는 이처럼 우리가 알아볼 수 없는 머리가 있다. 캐니와 언캐니. 친근한 얼굴 뒤쪽에 가려진 낯 설은 머리.
작가는 어쩌면 이처럼 얼굴(기호) 뒤에 가려진 머리(기호로 환원되지 않는)를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로써 작가는 얼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교정하게 하는 한편, 하나의 성질이나 상태로 환원되지가 않는 인간의, 인간 일반의 복잡성에 대한 관념을 투사한 것이며, 작가의 말마따나 일종의 반초상적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기억에 대하여. 작가는 2005년 갤러리 숲 전시에서 기억을, 특히 이데올로기적 기억을 다룬다. 기억 자체는 개인적인 층위에 속한 것이지만, 여기에 제도의 기획이 매개가 되면서 기억은 집단적인 경험으로 변질된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 물신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동원되는데, 그 전형적인 예가 동상이며 초상화이다. 세계를 영원히 통치하고 싶었던 파라오의 조상에서부터 종교적인 성상(혹은 신상), 레닌의 동상, 후세인의 동상, 맥아더 장군의 동상, 그리고 이순신과 세종대왕의 동상에 이르기까지. 이 일련의 동상들은 비록 생명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들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생명을 부여받는다. 살아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을 들뜨게도 하고 분노하게도 한다. 시공을 이겨낸 역사적 물신으로서 숭배 받는가 하면, 사람들의 편을 갈라 서로 싸우게도 만든다. 점령군이 우선적으로 상대편 지도자의 동상을 깨부수고 초상화를 짓밟는 것은, 그것도 보란 듯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발휘하는 상징적 위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은 실제와 이미지의 동일시 현상에 호소해오는 쇼의 문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서의 기억과 집단적인 경험으로서의 기억. 작가는 제도의 이데올로기가 매개가 되어져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 기억하게 하기와 망각하게 하기를 심는다고 본다. 기억하게 하기. 앙각으로 붙잡은, 높게 올려다 보이는 동상에서 기억하게 하기는 숭배하게 하기와 동의어가 된다. 망각하게 하기. 그리고 바닥에 나뒹구는, 깨진 동상의 파편들에서 기억과 숭배, 영원성과 기념비성은 회수된다. 동상에 물신의 정령을 불어넣는 것도, 이를 철회해 망각 속으로 밀어 넣는 것도 제도의 일이며 이데올로기의 기획이다. 그렇게 철거되면서 졸지에 생명마저 잃게 된(사람들이 동상을 폐기하면서 생명도 같이 회수해간) 동상들이 한 시대의 죽음과 역사의 죽음, 이데올로기의 죽음과 같은 상징적 죽음으로 인해 어떤 비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동상들 중에는 정작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산 경우도 많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우조차 있다. 사람들은 때로 살아있는 사람보다 동상에 더 열광하고 분노한다. 결국 문제는 상징이며, 상징의 헤게모니를 누가 쥐느냐는 것. 어떤 상징을 어떻게 조장하고 제안하느냐는 것. 하나의 패가 된 상징. 여기서 기억은 이미지의 정치학으로 그 논의의 층위가 확장된다. 이로써 작가는 파괴된 동상, 우상, (역사의) 물신을 통해 이데올로기와 역사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더 이상 개인의 향수를 되새김질하는 기억의 효용적 가치(혹은 작동 여부)가 가능한가에 대한 회의와 함께, 제도가 개인에게 심겨준 기억장치의 실체를 주지시킨다(이제 기억은 개인에게보다는 제도에 속해져 있다. 심지어는 기억마저도!).

나는 나의 두려움이 두렵다. 2007년 갤러리 킹 전시와 연이은 2008년 웨이방 갤러리 전시에서 작가는 두려움을 다룬다. 만연된 두려움의 기호들을 채집하고 재구성해 보여주는데, 두려움에 들러붙어 사로잡히게 하기보다는 두려움을 객관화시켜(거리두기 즉 소외효과 내지는 소격효과를 통해) 두려움에 대해 관조하게 만든다. 작가는 두려움을 개체로부터 자기 발생적으로 유래한 것이거나 실존적인 자의식의 소산으로 보기보다는 제도의 기획이 두려움을 조장하고 이를 개별주체에게 내재화한 것으로 본다.
이를테면 <최후의 심판>(2002)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궁극적으로는 교권을 확장하고 강화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로 작동한 것으로 본다. 그 두려움의 표면적인 의미는 내세를 향한 것이지만, 이는 다만 구실일 뿐, 사실은 이를 통해 현실적인 삶을 통어하기 위한 것이다. 중세와 아이콘(종교적인 도상)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광고와 결탁한다. 예컨대 세재를 선전하는 광고에서 이 세재를 쓰지 않으면 당신의 주방은 세균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거나(선택, 2001), 피부가 손상된 모델을 보여주면서 이 화장품을 쓰면 손상된 피부가 재생될 뿐만 아니라 애기 같은 피부를 유지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피부가 손상된 얼굴 이미지, 2002). 전에 없던 불안이며 상품의 논리가 만들어낸 두려움이다. 자본주의의 욕망은 소박한 욕망을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할 큰 욕망으로 부풀리고, 없던 욕망마저 만들어내 사람들로 하여금 욕망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리고 지구 한쪽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어 지구촌 전체를 테러의 공포 속으로 몰아가는가 하면(테러 이미지, 2002), 범죄 사건은 매체를 통해 여과되고 극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범죄 현장 이미지>(2002). 무슨 취조 파일처럼 무미건조한, 중성적인 제목이 인상적인 이 그림은 작가의 다른 그림들에서처럼 거칠고 표현적인 붓질과 피를 떠올리게 하는 짙은 선홍빛의 색감이 어떤 격렬함을 불러일으키지만, 정작 그려진 포맷을 찬찬히 뜯어보면 연극적인 상황으로 조심스레 재구성되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현실이 극화되고, 범죄현장이 재구성된다고나 할까. 분명 현실에서 발췌해온 것이지만 현실 자체로 보기에는 왠지 미심쩍은 이미지들(테러 이미지는 무슨 초현실주의 그림 같고, 범죄사건 이미지는 연극무대에 올려진 한편의 상황극 같다), 현실을 잘라내고 덧붙여진 이미지들, 극화되고 강조된 이미지들.

스펙터클 소사이어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소설보다 더 픽션 같은 현실. 오염이 더 진척되기 전에 당신은 지금 당장 이 세제로 당신의 가정을 지켜내야 하고, 이 화장품만이 적으로부터 당신의 피부(생명)를 보호해줄 수가 있다. 누군가가 언제 어떻게 당신에게 린치를 가해올지도 모르니 제3세계 인종은 무조건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며, 그 누구도 섣불리 믿어서는 안 된다. 있을 수 있는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검문검색을 강화해야 하고, 묻지마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나라 전체를 감시 카메라로 뒤덮어야 하고, 따라서 당신은 전적으로 당신 자신의 안전과 보위를 위해 경찰국가와 전자정부의 기획에 승인하고 동참해야 한다. 작가의 일련의 그림들은 이처럼 전에 없던 불안, 기획된 두려움의 실체를 극적인 장면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일련의 역사화 시리즈 에서 작가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의 집단 초상화를 보여준다. 당대의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며 제도를 기획하고 관장했던 주체들이다. 그들이 입안했던 제도가 수렁이 되어 그들 자신을 빠트린 다. 역사의 장에 개별주체를 위한 자리는 없다. 다만 공동체의 이상이 있을 뿐. 어쩌면 역사야말로 현실을 빙자한 허구며, 현실원칙의 얼굴을 한 공허한 추상일지도 모른다. 그 이데올로기의 늪에 나도 빠지고 너도 빠진다. 무슨 수욕이나 하듯 담담한 그 얼굴들 위로 땅바닥에 나뒹구는 동상의 마스크가 겹친다.
그리고 배설하는, 혹은 지구에 똥 누는 녀석들(Club Merde). 역시 정치인들이고 경제인들이며 당대의 지식인들이다.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희대의 사기꾼들? 그러나 여기서 섣불리 오해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작가는 어떤 인격적인 대상을 겨냥한다기보다는 예컨대 자본주의와 같은, 다국적 기업과 같은, 후기식민주의와 같은, 신자유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의인화해 그린 것이다. 그들이 무슨 신처럼 구름궁전에서 회합을 갖고 있다. 구름 위에 지은 집. 모래 위에 쌓은 성. 그들이 걱정하는 지구는 한갓 탁자 위에 올려진 지구본으로 충분하다. 이로써 그들이 정박해 있는(사실은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인) 현실원칙이 공허한 추상임이 밝혀지고, 그들이 내세운 공리가 사리인 것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롭게도 구름궁전이 사람이 죽을 때 본다는 빛 터널을 닮았고, 이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그들이 무슨 저승사자처럼 보인다. 자본주의의 죽음? 천국? 지옥? 현세는 물론이거니와 내세마저도 관장하는 신? 죽음마저 넘어선 자본주의 물신? 그들의 얼굴 위로, 그리고 얼굴 없는 사람들(얼굴 없는? 신은 얼굴이 없다!) 위로 늪(죽음)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의 초상이 중첩된다.

물물교환. 작가는 2005년 갤러리 숲 전시에서 일종의 물물교환을 제안한다. 똑같은 소품 크기의 사과, 자동차, 화분 그림을 실물과 교환해주는 퍼포먼스다. 사과와 화분은 모르겠지만, 자동차를 그림과 교환할 수가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물물교환이란 등가치로 평가되는 물건과 다른 물건을 상호 교환하는 행위로서 원시경제의 한 형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물건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갖는다. 사용가치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교환가치에 대해서는 이를테면 희소성이나 개인적인 취향과 같은, 물건 자체에 속하지는 않는 외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그림은 사용가치 대신 교환가치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해서, 일단은 자동차 그림과 자동차를 교환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혼의 산물이라는, 나의 분신이라는, 한갓 물질적 가치로 환원할 수는 없다는, 예술(예술작품)과 관련한 무성한 신화들은 모두가 진실일까? 작가는 바로 이 부분을 의심한다. 그림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상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등식을 부인할 수야 없겠지만, 창작주체가 작품에 불어넣은(사실은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혼의 추상적 가치를 곧장 재화적 가치로 환산하는 미술시장의 생리에 대해서 의심해볼 수는 있다. 이로써 작가는 예술의 교환가치와 효용가치(그 진정한 존재의미)를 묻는 한편, 실물경제(미술시장)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그리고 사물의 위계질서와 함께, 그림의 위계질서를 결정하는 메커니즘의 실체를, 미술제도의 작동방식을 의심한다.

거인의 시선은 어디에나 있다. 작가 김진의 근작을 관통하는 주제이면서 낱낱의 작품에 부친 제목이기도 한 이 말에서 거인은 누구인가. 신화에서 거인은 신에 도전하는 반신(영웅)이며, 현재(아들)를 잡아먹는 과거(아버지)로 묘사된다. 종교에서 거인은 압도적인 크기로서보다는 상징적이고 유비적인 형식으로 진화하는데, 인성과 신성이 부합됨으로써(신인동형설) 신(곧 거인)은 인간의 세계에 더 살갑게 파고들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신화적 호기심이나 종교적 경외감을 상실한 시대, 자본주의의 욕망이 모든 반신과 신들을 몰아낸 시대, 다만 감각적이고 피상적인 표면만이 현란한 시대, 내면이 표면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표면이 내면을 가늠하는 규준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경박한 시대에도 거인은 있는가. 신화와 종교, 신과 반신, 그리고 거인은 자본주의의 욕망이 요리하기에는 너무 거친 재료로 보이고, 그런 만큼 적어도 외형상으론 모두 폐기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자본주의의 욕망은 그 실체를 폐기하고, 그 아우라만을 취한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취해진 아우라는 때로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낭만주의적 향수를 자극하기도 하고, 때론 집단무의식으로, 신드롬으로, 휴머니즘의 얼굴을 한 배타적인 논리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자본주의의 욕망을 선전하기 위한 매력적인 포장술로 변질된다. 새로이 등극한 형이하학의 신(감각신, 물신)이 형이상학의 신을, 그 권위를 전유한 것이다.
전유는 초현실주의와 관련이 깊고, 작가의 근작에 나타난 패러디와 관련이 깊고, 자본주의 시대의 신 곧 물신의 실체를 추적하는 작가의 기획과 관련이 깊다. 작가는 더 교묘해진 자본주의 신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종교적인 도상학을 차용한다. 삼면제단화의 방식을 차용한 것인데, 이 형식은 차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예수의 12제자처럼 각각 독립된 12개의 그림이 하나의 풀세트를 이루면서 완성될 예정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삼면제단화는 성부 성자 성신(성령)을 아우르는 성삼위일체를 상징하며, 이는 그대로 부(경제)와 권력(정치)과 명예(인간학)를 아우르는 자본주의 신의 신성에 부합한다. 그리고 이 신성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 욕망, 즉 무자비한 탐욕과 탐식으로 나타난 욕망이다. 이로써 만찬형식으로 나타난 작가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연찮게, 작가가 차용한 르네 마그리트의 <마술사>도, 작가가 향후 전체 그림으로 구상 중에 있는 다반치의 <최후의 만찬>도 하나같이 만찬그림이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지구라는 거대한 식탁에 올려진 정치(덫과 사슬과 컴퓨터로 나타난 도상들은 육체의 감금으로부터 점차 정신을 파고드는 것으로 진화해온, 제도의 지배 도구를 반영한다), 경제(황금 알을 낳는 거위), 인간학(와인 잔으로 나타난 교제술)의 요리를 탐식하는 자본주의 신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신은 탐식할 것이 너무 많아 두 손으로는 모자랄 지경인데,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마치 문어발과도 같은 여러 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차용한 것이면서, 동시에 천안천수 불상의 도상을 떠올리게 하는데, 세상천지 못 미치는 곳이 없는 신의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처럼 자본주의 신의 탐욕 역시 세상 끝까지 가 닿는다. 이런 신의 편재성(루시앙 골드만의 숨은 신에서 예증된 것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주제에 부합하는)은 머리가 없는 초상으로 되풀이되고 강화된다. 물신은 더 이상 머리가 필요가 없다. 그의 감시하는 시선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충분히 내재화돼 있어서, 그는 그저 욕망의 계기들을 거머쥘 수 있는 손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머리가 부재하는, 시선이 부재하는(역설적이게도 시선의 편재, 신의 편재를 암시하는) 인물 초상을 통해 자본주의의 물신을 의인화하고 인격화한 것이다.

퍼포먼스 <검문검색에 의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의상과 가방>과 <물물교환>, 일련의 초상그림들과 역사화 시리즈, <기억에 대하여>, <나는 나의 두려움이 두렵다>, <배설하는, 혹은 껄렁한 녀석들>, 그리고 <거인의 시선은 어디에나 있다>와 같은 일련의 주제화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그림은 주제 혹은 제목에서부터 서사가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일련의 서사를 통해서 작가는 제도의 실체를 추적하는데, 제도는 이미, 충분히 개별주체의 의식 속에 내재화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역사 이데올로기의 물신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물신을 조망한다. 모든 길은 이데올로기로 통한다. 루이 알튀세는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제도가 개인을 호명하고 호출할 때, 개인의 주체가, 정체성이 성립된다고 본다. 그리고 롤랑 바르트는 문화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로 전이시키는 것에서 신화가 발생한다고 본다. 예술은 분명 문화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예술을 자연적 사실인 것으로 치장하고 선전하는 것에서 예술은 신화가 된다. 그리고 그만큼 예술의 교환가치도 더 높아진다. 예술의 신화화와 교환가치의 극대화, 이런 부분을 작가는 미술제도와 미술시장의 실체를 빌려 조망한다. 그리고 다른, 의미 있는 곁가지들.
작가의식과 시대정신에 관한한 작가의 태도는 분명한 편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태도의 용기인 인간을, 인격을, 인성을 표면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논리로 재단하고 판단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인간에 관한한 그는 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가 않는 불분명하고 불투명하고 복합적인 실체로 본다. 그 복잡한 실체에 연유한 서사, 태도, 삶의 방식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위에 색을 입혀 이념을 드러내 보이는 회화적 성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작가에게 회화는 내면을 외면화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며 방법이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호와 공공연한 물신을 그릴 때조차 그의 그림에는 이 기호, 이 물신에로 환원되지 않는 내면의 질감이 묻어난다. 작가는 이처럼 탄탄한 회화적 역량을 바탕으로, 이 시대를 반영하는, 인간 실존을 투사하는, 자기 몫의 작업(예술)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