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병마로 유명을 달리한 천기원 화백(1948-2006)이 30년 넘게 안양에서 거주하며 작업한 풍경화들에는 작가의 종교적 심성이 깊이 배어 있다. 지금은 유작이 된 그의 많은 작품들은 안양 근교의 풍경과 고향 안성의 풍경을 리얼리즘 화법으로 그린 것이다. 천기원의 작품이 평범한 풍경화를 넘어서는 지점은, 그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암을 비롯한 삶의 역경들을 겪는 와중에 생성된 독특한 비전에 있다. 지금도 안양 비산동 성당과 서울의 성모병원에는 화가가 기증한 그림이 걸려 있다. 서울 인근의 추레한 풍경들은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오래 연마된 솜씨에 의해 의미 있는 장면들로 변화되었다. 그의 작품은 단지 도시인의 여가적 관점으로 포착된 서정적 풍경이나 자아표현 욕구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 표현적 풍경과도 다르다. 천기원의 작품에 나타나있듯이, 지고한 목적에 의해 창조된 만물들에 내재된 평등성은 현상계의 질서를 초월한 또 다른 비전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만물이 평등할 수 있다는 사고는 어떤 초월적 관점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 초월적 관점은 종교에서 비롯되었지만, 근대 민주주의를 비롯한 혁명적 사상에도 관철되었다. 과학과 산업의 시대인 근대에 이르러, 초월성은 제거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나, 인간의 이해관계로 점철된 사이비 초월성으로 대치된 경향이 있다. 근대의 민주주의의 기획은 아직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볼 수 없다. 봉건적이거나 근대적인 계급사회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실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잠재적, 명시적 계급성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이상주의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거대담론은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염려와 달리 어떤 이상과 초월의 세계관이 억압적인 질서로 다시 안착될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필자는 이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관점이, 현대에도 가치 있는 것이고 꼭 필요한 것이라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물질적 가치만이 판을 치는 이 일차원적 사회의 파행성에 대한 유력한 대안 가치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유의미한 삶의 태도와 지향성을 부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천기원의 많은 작품이 지상의 존재들에 자신의 자리와 맥락을 부여하는 초월성과 소통하려 한다. 그의 작품에서 지상의 크고 작은 것들은 모두들 자신의 자리를 잡고 나름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가령, 1994년의 유화 작품 [호수가 보이는 꽃길]을 보면, 전경의 수풀은 자연이 창조한 보색 대비를 최대한 살려 경쾌한 색 점의 터치로 가득 메우고, 중경에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나무가 솟아 있다. 산위에는 빛을 머금은 구름과 먹구름이 뒤섞이면서 변화무쌍한 하늘의 얼굴이 만들어진다. 2003년의 유화작품 [가을과 안테나]에서 전경에 쓰러질듯 한 농가의 가건물 옆에 세워놓은 높은 안테나는, 마치 마을 어귀의 솟대처럼 또 다른 세계와의 교신하는 듯하다. 마을을 감싸 안는 멀찍한 산 위에 펼쳐진 하늘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천기원의 그림에 나타나는 재현성은 현상의 관찰에 충실하면서도 즉물적으로 다가오는 현실성을 넘어, 좀 더 깊은 실재감과 연결된다. 그의 작품 속 현실세계는 ‘신으로 불리는 원초적인 현실적 존재와 시간적인 현실적 존재를 다 같이 포함하는 공동체’(화이트헤드)를 의미한다.

지상의 한포기 잡초부터 창공의 영험한 구름의 표현에 이르는 천기원의 작품 속 존재들은 모든 실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언어를 통과한다. 그것은 단순한 현실 반영이라기보다는, 신의 위임을 받은 인간의 창조적 언어의 힘과 관련된다. 그의 작품 속 자연들은 살아있는 형상들이자, 신학의 시대에 가정된 ‘자연의 책’이나 ‘자연의 거울’처럼, 일련의 독해 가능한 상징적 세계를 이룬다. 루이 뒤프레는 [종교에서의 상징과 신화]에서 중세문화에서 언어는 그자체가 이미 창조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인 것이지, 인간 해석자로 하여금 자연의 의미를 임의로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이 만든 별도의 우주는 아니라고 말한다. 언어와 자연은 하나의 신적 창조세계를 구성하는 상호보완적인 두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자연(실재)과 언어(상징화) 사이의 이러한 연결은 점차 와해되어 간다. 그러나 이전의 상징적 우주에서는, 높은데서 낮은 데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무의미 한 것이 없는 존재들 간의 단절 없는 전이가 존재했다. 반면 현대는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고, 의미는 기호들의 망 속에서의 변별적 차이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고 가정된다. ‘사물들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말들의 세계’(라깡)라고 대표되는 현대적 사고는 ‘모든 진리들이 참조될 수 있는 초월적 기의, 즉 신, 인간, 정신 등을 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기의의 있음’(캐서린 벨지)을 거부한다.

그러나 ‘있음’의 형이상학의 시대가 끝나고, 이전의 ‘중심’에 근거를 두는 모든 설명과 해석의 방법들이 종말을 고했다는 현대의 진단들은, 건전한 삶의 희망보다는 음울한 냉소주의를 양산하면서 모순에 가득한 현실 질서와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음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동의할 수 없는 하나의 지배적 질서에 직면하여, 단순히 현실을 베껴내는 것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 천기원 같은 부류의 화가에게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상위에 있는 어떤 차원의 통합이 다시금 중요해 진다. 그것은 언어의 자기지시성으로 인해 야기된 무의미와 무질서에 대한 대안의 논리가 되어, 근대의 파괴적 진보로 인해 텅 비워진 시공간 속에 새로운 질서를 불어넣고자 한다. 특히 천기원의 작품에서 빛은 이러한 질서감각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2004년의 유화 작품 [가을하늘]은 마치 봄 같은 늦가을(indiansummer)의 햇빛을 가리는 파라솔과 그 아래 놓여 진 빈 의자 둘이 놓여있는데, 따스한 전경의 분위기와 달리, 가을을 어김없이 알려주는 저편의 하늘과 산등성이가 눈이 시릴 정도이다. 1996년의 유화작품 [모교]에서, 나무 그림자로 얼룩진 밝은 길은 화가가 그곳을 응시하던 시간이 여름 한낮임을 알려준다. 이 길 뒤에 논이 펼쳐져 있고, 그 뒤에 자리한 작은 건물이 화가의 모교이다. 천정이 가장 높아지는 정지된 순간, ‘정오의 그림자’(니이체)가 드리워진 자연 풍경들은 재현성과 형이상학적인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킨다. 영원한 현재 속에 포착된 자연은 변치 않는 모습으로 있는 모교처럼 늘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계절의 여운을 간직한 빛살이 자연을 감싸 안는 장면들은 실재의 힘을 증거 한다. 그의 풍경은 ‘객관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것과 주관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 모두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실재’(뒤프레)를 향한다.

천기원의 작품에는 삶의 터전과 자연이 사실적으로 등장하지만, 그 안에서 사람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대신에 1997년의 수채화 작품 [들국화]처럼, 자연화 된 삶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가을 무렵 지붕과 담장이 나지막한 시골동네 어귀에 가득 피어난 들국화를 맑은 수채화로 그린 것인데, 구체적인 인간 삶의 흔적은 저 원경으로 밀려나 있고, 사람들을 대신하는 것은 주인공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때가 되면 피고 지는 초목들이다. 여기에도 이 모든 자연의 주기를 가능하게 하는 축복의 빛이 가득하다. 천기원의 작품에서 신학적 가설에서 크게 상치되지 않는 리얼리즘적 시각은 자연주의 기법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특히 그의 수채화는 해맑았을 화가의 성품을 투영하는 동시에, 동양의 수묵화 같은 느낌을 준다. 2000년의 수채화 작품 [길]은 봄 햇살을 가득 받는 마을의 언덕배기를 그린 것인데, 오르내리려면 꽤나 숨이 찰 것 같은 경사로,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담장 아래로 길게 가꾸어 놓은 텃밭이 보인다. 흉물스러울 전봇대는 밝은 기둥으로만 간단하게 처리하였고, 칠하다 만듯 한 공간들은 마치 수묵화의 여백 같은 느낌을 준다. 1996년의 수채화 작품 [가을]은 물기가 많은 시원한 붓질로 쓱쓱 칠한 나무숲이 왼쪽 하단의 노란 색 덩어리처럼 곧 옷 색을 바꾸어 입을 것임을 예시한다. 나무의 음영은 먹의 농담 같이 처리되어 있다. 그의 많은 수채화가 수묵 담채 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어법은 단지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에 한정되는 기호와 달리, 상징들 속에서만 계시될 수 있는 어떤 세계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작가에게 삶과 예술의 지침을 부여했던 천주교뿐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동양적 세계관을 표현하기에도 적합한 형식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