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자의 도시풍경에는 온통 흐물거리는 선과 색채로 가득하다. 거기에는 도시를 이루는 화려함과 밀집성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제각각의 소유 표지로 구획된 본래의 경계들은 완전히 해제되어 있으며, 상호 침투하는 힘들의 역학관계로 충전된다. 근작은 명확한 형태를 특정할 수 없는 추상적 패턴이 화면을 압도하지만, 그저 붕 떠 있는 장식이 아니라 재현적인 요소, 무엇보다도 자신의 강렬한 감정에 뿌리를 둔다. 작품의 소재가 된 곳은 작가가 살고 있는 근처인 삼송, 화정, 연신내, 일산 등 서울 근교로, 이미 개발되었거나 한창 개발되고 있는 지역이다. 작가는 경기도 변두리 지역의 번화가를 주로 찾는다. 거기에는 서울 중심가나 유럽의 도시 같은 문화적으로 잘 정돈된 대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역동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코드화된 디자인이라는 획일적 장치로 조정되기 이전의 들쭉날쭉한 모습들이 아직 남아 있는 그곳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욕망들이 맞부딪히며 뒤섞이는 장이다. 그 장소들의 무질서함과 불안정성이 작가를 자극한다.

혜자는 자신을 둘러 싼 환경의 변화에 대해 매번 반응해 왔다. 작가는 근 몇 년간 주변의 자연이 도시화되고, 도시 자체가 자연화 되고 있음을 목격했다. 이전의 작품에 보였던 칡넝쿨 같은 뿌리 형태들이나 복잡한 선의 흐름은 도시라는 인공적인 환경으로 이어진다. 문명과 자연은 정리되지 않은 채 발산되는 에너지를 통해 하나의 생태계처럼 다가온다. 현대적 풍경에 내재된 야생성이나 물활론적인 열기는 몇 년 전까지 비닐하우스에서 작업했던 경험에서 비롯된다. 비닐하우스에 들어설 때, 피부에 와 닿는 습한 기운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꼈으며, 그것이 작업실 안의 사물과 시공간이 뒤엉키는 풍경을 낳았고, 이후에 작업실 바깥인 도시까지 관심을 넓힌 것이 이 전시의 작품들이다. 혜자의 작품에는 많은 대상과 사람들이 쇄도하면서, 혼란과 활기가 동시에 느껴진다. 그녀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간대를 선택한다. 완전한 밤풍경도 있지만, 대부분이 자연의 빛이 남아 있으면서도 인공조명이 켜지는 순간에 집중되어 있다.




그 시간대는 집이나 학교, 직장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때이며,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에서 활기가 느껴진다. 그녀의 그림에 나타나듯이 낮의 끝 무렵, 완전히 어둡지 않을 때 켜지는 간판이나 네온사인은 경계의 시간대를 알려준다. 기호들은 정지되어 있다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모여든 군중들과 역동적으로 합쳐진다. 그곳에서는 어떤 장소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 같은 존재들은 발견할 수 없다. 수많은 간판들은 기억할 새도 없이 매번 바뀌며, 거리를 가득 메우는 차와 사람들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불특정의 다수일 뿐이다. 사물과 인간은 함께 엉켜 일련의 흐름을 형성한다. 이러한 흐름은 그 장소들이 무엇보다 소비의 장소라는 사실과 밀접하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이 한데 모이는 장소들은, 욕망과 유혹을 야기하려는 기호의 흐름과 그 지배 아래에 놓인다. 현대인의 정체성이 점차 소비자로 환원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을 둘러 싼 환경은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환영이 되어 시시각각 개개인에게 침투하는 것이다.

생산자의 정체성과 달리, 소비자의 정체성은 고정 되지 않고 계속 변한다. 욕망이 끝없이 부추켜지지 않으면 체계 자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소비자 군중으로부터 누구도 초월하기 힘들다. 일반 대중과 달리, 작가라는 존재는 자연스럽게 밀고 들어오는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환경의 실체와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자라는 차이가 있다. 혜자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본능적이다. 그것은 목전에 펼쳐지는 상황들이 좋다/싫다, 옳다/그르다의 차원을 넘어서,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몸으로 반응하게 되는 어떤 강렬함과 관련된다. 작가는 어떤 장면에 직면하여 움찔한 경험을 낳는 그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표현한다. 혜자의 작품에는 사소해 보일수도 있는 소재들이 길게 꼬리를 물며 화면을 잠식하고 생각지도 못한 패턴으로 증식한다. 동질적인 상품이나 대중들은 그녀의 화면에서 변모하며, 이질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작가는 ‘세포의 움직임 같은 것이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색과 색, 그리고 형태와 형태의 만남이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일회성을 가진 것이며, 작품은 계획된 출발과 다른 지점을 향해 정처 없이 떠돌고 절묘한 순간에 멈추어 선다.

도시에 대한 많은 그림이 그려져 왔지만, 혜자의 도시풍경이 주는 독특함은 몸의 감각에 호소하는 직접성이다. 이 직접성은 도시에 관한 어떤 사회학적 연구보다 더 많은 공감을 자아낸다. 작가가 집중적으로 선택하는 구도는 양쪽에 상가가 늘어서 있고 그 사이를 움직이는 군중들이다. 작품에는 관객의 시선이 들어가는 입구가 존재하며, 복잡한 형상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화면의 기층이 드러나 있고, 원근법적 구도가 잠재해 있다. 고정되어 있는 모든 것을 들뜨게 보이기 위해 최소한의 중력에 대한 감각은 보존되어야 했다. 전경에 등이나 앞을 보이는 인물들, 화면 저쪽으로 시야를 끌어들이는 사선은 관객 참여적인 공간감을 부여한다. 작품 제목에서 많이 발견되는 ‘acade’나 ‘passage’같은 단어는, 작품 속의 시공간이 어떤 통로를 움직이는 인간의 시점을 예시한다. 그들이 통과하는 장소는 이동하는 시간의 축을 따라 양쪽에 상품이 죽 늘어선 아케이드로, 현대적 소비 공간을 대표한다. 아케이드는 일종의 축소된 도시, 즉 도시 안의 도시라는 구조를 가진다. 아케이드는 고급 백화점부터 재래시장에 이르는 대표적인 건축 구조로, 대중을 양쪽으로 화려하게 펼쳐진 소비의 세계로 초대한다.




실제로 일산 지역에 존재하는 아케이드를 소재로 한 시리즈 작품 [acade]는 천정이 거대한 돔으로 되어 있는 상가를 시간대와 각도를 달리하여 그렸다. 복잡한 선과 색의 흐름와중에도, 밝고 조밀한 빛의 흐름이 주도적인 아래 장면과 깊숙한 공간감을 암시하는 윗부분이 구별된다. 인공의 빛과 엉켜있는 인간들, 즉 소비 대중들은 자연을 배제하기 위해 조성해 놓은 거대한 천정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자연에 지배된다. 이 새로운 자연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소비의 욕망이다. 사람과 대상들은 용이하게 엉키기 위해 상호적으로 변모한다. 도시 및 건축 계획상으로 잘 조직화 되어 있든 아니든, 근대적 계몽이 극복했다고 가정된 마법과 신화가 부활된다. 특히 변두리 지역의 번화가라는 작가의 선택은 그곳이 끝없이 새로움으로 유혹하지만, 이미 한물간 진부함이 횡행하는 곳임을 알려준다. 거기에는 새로움을 가장한 구태의연함이 지배적이다. 끝없는 자극을 촉발하는 도시는 매혹적이지만 진부하다는 이 양가감정은 19세기 세계의 수도인 파리의 파사주(acade)를, 요술 환등이 켜진 미혹의 장소로서 규정한 발터 벤야민의 저작에서도 두드러진다.

이 선진적인 도시 문화 연구가 역시 번쩍거리는 현대성의 절정에서 대중의 꿈과 무의식, 곧 신화를 발견했다. 벤야민에 의하면 숭배되는 상품에게 헌정된 신성한 장소이며, 상품자본주의의 신전인 파사주는 꿈을 꾸는 집합체의 공간이다. 그는 건물과 보도로 이루어진 파사주에는 외부가 없는 것이 마치 꿈과 같다고 말한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그를 도시의 신비한 표면을 벗겨내는 도시 관상학자로 자리매김한다. 벤야민의 해석학적 시선에 의해 고도 자본주의 시대가 고취되어 있는 환상과 속임수는 벌거벗겨져 역사적 깨달음의 섬광 속에서 조명된다. 벤야민의 미완성 연구에서, 파리의 파사주로 대변되는 도시의 이미지는 19세기 유토피아의 충동을 파편으로 조각난 현대성의 꿈 풍경으로 보존하고 있다. 근대 도시에 대한 이러한 선행 연구들은 백년 가까운 시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비정형 패턴으로 넘실대는 혜자의 도시풍경이 야기하는 기이함은 건립되자마자 낡기 시작하는 근대도시 풍경과 정확히 겹쳐지기 때문이다. 영원한 오래됨이나 새로움 그자체가 아니라, 반대되어 보이는 범주 사이에 오가는 상호적 교환이 도시의 초현실성을 특징짓는다.

혜자의 작품 속 인간들, 곧 무엇인가를 소비하기 위해 상가가 늘어선 거리를 통과하는 대중들은 전통적 공동체나 근대적 시민들과는 달리, 대화가 아닌 침묵, 곧 보고 보이는 관계망으로 얽혀있다. 그들은 물건을 살 수 있건 아니건 보는 것을 즐긴다. 보는 것은 사기 위한 징후적 행동이다. 그들의 시야에 펼쳐진 스펙터클은 다름 아닌 상품들이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스펙터클을 화폐의 다른 면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라고 정의한다. 스펙터클은 분리된 것을 재결합하지만 분리된 상태 그대로 재결합한다. 또한 그것은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로, 우리가 그 안에 붙잡혀 있는 역사적 운동으로 규정된다. 기 드보르가 지적했듯이, 삶의 각각의 측면에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들은 공통의 흐름 속으로 융합된다. 그 흐름은 삶의 통일성을 재건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살아있지 않은 것의 자율적 운동이기도 한 스펙터클은 물질적으로 인간과 인간 간의 분리와 소외의 표현이다. 물건과 인간이 혼연일체가 되는 공간, 구경꾼 자체가 물건들 및 공간과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 혜자의 작품은 스펙터클의 진면목, 요컨대 인간들로부터 빠져 나간 바로 그 힘들은 인간에게 다시 흡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공간 전체가 상품으로 변화한 환경 전체에서 흘러나오며 홀리는 분위기는 상품이 가지는 물신성과 밀접하다. 인간의 노동으로 완성된 상품들은 노동의 흔적을 지우고 자체의 자율성을 가지며 지배적인 사물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살아있지 않은 이 비유기적인 것들은 인간의 노동으로부터 취한 에너지로 생기 얻으며 유혹의 열기를 뿜어내는 한편, 소비자 천국의 사회에서 껍데기만 남은 생산자는 소비기계가 되어 상품이 주도하는 회로의 일부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혜자의 작품에서 소비자는 단순히 소외된 노동자나 대중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소외된 노동이나 불합리한 생산관계에서 발생되는 모순들을 소비 혁명을 통해 다독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선진국에 다가가 있는 국민들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일하며, 이러한 소비의 미혹은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다른 지역들로 전가하면서 유지된다. 노동은 나날이 합리적으로 조직화되지만, 소비를 지배하는 것은 비합리이다. 낯선 사물이 되어 돌아온 상품들은 마법의 사물이 되어 아케이드에 늘어선다. 아케이드를 매일 갱신하고 있는 상품의 행진은 생산과정을 은폐하는 망각의 산물이며, 망각은 바로 물신의 이면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현대도시는 망각의 장소이다. 과거가 망각되었기 때문에 오래된 것은 새로운 것으로 나타난다. 혁신과 신기함은 반복동일성의 쉼 없는 행진이다. 근대적 계몽은 신화를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고, 계몽 자체가 신화가 된다. 현대성의 전형적 장소인 도시는 신화의 장소이다. 대도시는 신화의 새로운 징후와 현대성의 환영이 나타나는 곳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연 대신에 상품에 굴종한다. 벤야민이 고찰한 19세기의 파리는 ‘세계의 수도’였지만, 근대화 역사의 과정은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어 재생된다.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신화의 지배는 더욱 적나라해진다. 대중의 갈망이 환상적으로 물질화된 파사주는 고대 아르카디아의 왜곡된 현현이다. 벤야민은 전통적 좌파들과는 달리, 19세기의 상품 문화가 왜곡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욕망이 물질화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그는 미메시스, 놀이, 열중과 본능에 포함되어 있는 긍정적인 유토피아의 요소들을 강조한다. 혜자의 작품에 나타나는 도시풍경 역시 아케이드를 통과하는 소비대중들의 갈망과 열망으로 인해 완성된다. 작품을 채우는 활기는 관찰자의 감정이입이나 동조성(synchrony) 없이는 불가능하다.

혜자의 작품에서 사물과 인간 사이의 동조성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확정할 수 없는 액체의 이미지로 가시화된다. 그녀는 아케이드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축소모델에서 근대성의 액체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림 속에 존재하는 멈출 수 없는 흐름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 근대]에서 말한 것처럼, 근대적이라는 것은 멈출 수 없다는 것, 가만히 서 있기는 더욱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만족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현대의 소비자의 욕망은 뚜렷한 탈출구 없이 허공에서 부유한다. 그것은 고정된 존재나 공간성을 거부하고 모든 경계를 부수면서 생성하고 소멸한다. 바우만은 오늘날의 가벼운 근대성과 과거의 무거운 근대성을 대조한다. 무겁고 고체 같고 농축되고 체계적인 근대성은 오늘날 우연성, 다양성, 불명확성, 변덕스러움, 특이성 따위에 자리를 양보한다. 오늘날 많은 이익을 낳는 것은 비용과 관리가 요구되는 거대한 생산체제보다는 재빠른 소비의 주기이다. 명확한 자리와 위치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유동적 흐름은 오늘의 시대를 표상하는 문화적 징표들인 것이다.

유동성(fluidity)은 액체와 기체의 특징이다. 고체와 달리 액체는 그 형태를 쉽게 유지할 수 없다. 액체는 자신이 어쩌다 차지하게 된 공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 액체는 공간을 차지하긴 하되, 오직 한순간 채운 것일 뿐이다. 바우만에 의하면 근대 역사에서 여러모로 새로운 단계인 현 자본주의의 속성을 파악하고자 할 때 유동성이나 액체성이 적합한 은유이다. 근대는 그 시작부터 어떤 액화의 과정이다. 견고한 모든 것들을 녹여버리는 것은 줄곧 근대의 으뜸가는 성취였다는 것이다. 액화하는 힘은 사회적 공간의 거시적 차원을 미시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이제 액화할 차례가 된 것은 제반 의존과 상호작용의 유형들이다. 마샬 버만이 [현대성의 경험]에서 말하듯이, 현대적으로 된다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생활을 소용돌이로서 경험하는 것이고, 영원한 해체와 재생, 고난과 고통, 애매성과 모순 대립 속에서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며,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버리는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인간과 사물 모두를 유동적으로 만드는 이 거대한 소용돌이는 카오스적인 대류처럼 국지적인 흐름들을 포함한다. 바우만이 이론화한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가는 길에 여전한 지배적 가치는 자본이다. 자본은 잠깐 동안의 수지맞는 모험들을 좇아 여행을 다닌다. 그 자본의 운동성은 다른 모든 것들의 입장에서는 영구적 불확실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혜자의 작품에 나타나는 시공간적 경계의 소멸과 뒤섞임은 모든 것은 압축하고 내파하여 흐르게 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표현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빠르게 나타나고 빠르게 사라진다. 이러한 속도전에서 회화적 방식은 매우 느린 듯하다. 혜자의 작품은 회화적이지만, 사진이나 영상같은 매체의 경험이 녹아있다. 그것은 고정된 화면 속에서도 마치 스크린처럼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순환하고 명멸하는 착시현상을 만든다. 작품의 출발이 된 도시 자체가 거대한 스크린과 다를 바 없다. 거기에는 스크린화된 세계, 그리고 그 세계라는 모델의 압축적인 파편인 서울 근교의 변두리가 환상적인 색채와 형태라는 몸을 입고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