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장(1999-2003), 벽으로부터의 반추(2004-2005), 길을 묻는다(2006-2007), 매화는 추위에 향을 팔지 않는다(2008), 날아라 닭(2009). 성태훈의 그동안의 화력을 대략 주제별로, 시기별로 분류해본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시간의 메타포, 벽은 이념의 메타포, 길은 삶의 메타포로서 각각 나타난다. 이런 일련의 메타포는 작가의 그림이 지금 여기로 나타난 현실인식에, 그리고 인간 일반의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존재론적 조건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말해준다. 그의 그림에는 전통적인 먹그림의 순수하고 추상적인 관념과 이상을 위한 자리가 없다. 그 빈자리에 치열한 현실인식이 들어선다. 엄밀하게는 전통적인 먹그림의 유산인 관념과 이상을 현실인식과 결부시켜 지금의 관념으로, 여기의 이상으로 바꿔놓는다. 전통의 유산을 동시대적인 상황논리로 환골탈태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외관상 전통적인 먹그림의 형식논리가 여실하면서도, 정작 그 속에 담겨진 내용만큼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채워진 그림이 친근함과 동시에 극적 긴장감과 같은, 외관상 함께하기 어려운 이질적인(혹은 대극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시켜놓고 있는 것에서 작가의 남다른 감각이 읽혀진다.




역사현장 시리즈는 한국정치사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를 탐방하고 기록한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기록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장소특정성 개념과 함께 작가의 현실인식이 맞닿아 있는 근간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벽은 이념의 메타포라고 했다. 그것은 작가가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을 이념 혹은 가상적 이미지일 수도 있고, 하얗게 빈 화지 자체일 수도 있다. 여기서 벽은 모든 창작주체가 대면하기 마련인 빈 화면을 의미하며, 이로부터 개시되어질 잠재적인 어떤 세계를 의미한다(하이데거는 예술을 이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질 어떤 세계를 개시하는 행위에다 비유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적인 분단현실을 상징하며, 이로부터 파생된 사람과 사람간의 보이지 않는 이념의 벽(이를테면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 같은)을 상징하며, 나아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불통의 벽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실질적으로는 실제의 벽을 의미한다. 여기서 벽의 의미는 일상성을 획득한다.



흔히 상념의 벽이라고들 한다. 벽을 쳐다보고 있으면 온갖 상념이 다 떠오른다. 벽이 상념을 위한, 상념을 불러오는 캔버스인 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 빈 벽에서 자연적 풍경과 함께 홍수와 전쟁 같은 사건적 풍경을 본다고 했다. 그리고 시인 백석은 이국의 골방에서 망국과 망향의 그리움을 떠올린다(벽이었던가, 아니면 문풍지?). 그렇다면 성태훈은 그 빈 벽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 벽은 주로 타일이 시공된 욕실 같은 일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그 벽에서 작가는 불현듯 역사를 보고, 전쟁을 보고, 전쟁과 다를 바 없는 삶의 참상(이를테면 재개발현장이나 백화점 붕괴 장면을, 그리고 테러 현장과 같은 사건과 사고)을 보고, 그 모든 전쟁이 남긴 상흔을 본다. 상흔을 만든 것은 과거시제에 속하지만, 그것이 남긴 상흔 자체는 현재시제에 속한다. 이렇게 작가의 상념 속에서 과거는 현재로 호출되고 되살아난다. 현재는 언제나 현재 자체로서보다는 과거에 중첩돼 있고, 과거 위에 축조돼 있다. 해서, 현재로부터 과거를 떨쳐낼 수가 없다. 이 상흔을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어린 소녀가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이 상흔 그대로를 소녀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일이다. 해서, 작가는 수도꼭지를 열어 상흔을 씻어낸다.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고, 전쟁이 흘러가고, 전쟁과 다를 바 없는 삶이 흘러내린다. 그렇다고 쏟아져 내리는 물을 폭포 삼아 세수대야 속에서 유유자적 물놀이에 여념이 없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상념 속에서 그 상흔이 지워질 수가 있을까? 전쟁의 상흔과 소녀의 물놀이와의 대비. 여기서 작가는 반어법 혹은 아이러니 화법을 구사한다.
그리고 그 화법은 길을 묻는다는 주제 이후 본격적으로 심화되고 다변화된다. 길을 묻는다는 주제는 그 이면에 길을 잘 모르겠다거나 길을 잃어버렸다는 현실인식을, 일종의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현실에는 길이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을 숨겨 놓고 있다. 이 주제는 말하자면 정체성 상실과 관련이 깊고, 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를 되묻는 것이다. 이때부터 작가의 그림에는 헬리콥터와 아파치 헬기, 그리고 전투기가 등장한다. 멀쩡한 일상 위로, 이를테면 산행하는 사람들 위로, 화분에 심겨진 화초 위로, 흐드러진 매화나무 위로 중무장한 전투기가 날아다닌다. 사람들은 자기 머리 위로 전투기가 날아다닌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같고, 무관심한 것도 같다.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소외효과와 소격효과를 시도한다. 사람들은 일상이 멀쩡한 줄만 알고 있었지, 위험한 줄은 모른다. 바로 옆에서 테러가 자행되고, 폭력과 린치가 난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데도 그저 무심할 뿐이며, 남의 일이려니 한다. 여기서 작가는 멀쩡한 일상에 멀쩡하지 않은 일상을 들이댐으로써, 멀쩡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일상이 사실은 결코 멀쩡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처음에 작가는 이 전투기를 등에에게서, 그리고 모기에게서 착상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등에나 모기는 사람과 가축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곤충이다. 가축과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성가신 일이지만, 저 자신의 생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비유법이라면? 만약 등에나 모기처럼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나 철면피 같은 사람이 실제로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식민제국주의와 후기식민주의, 세계주의와 신자유주의, 지구공동체(그 이면에 전 지구의 시장화의 기획을 숨겨놓고 있는), 자본주의의 물신과 다국적 기업을 지지하고 있는 경제논리가 실제로 지구 전체를 숙주와 기생의 관계로 가름해놓고 있다. 작가는 이 엄연한 현실, 불합리한 현실을 상징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피를 빨리고 있었고, 혹 내가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화초 위로, 매화 위로, 일상 위로 무심하게 날아다니는 헬기는 이처럼 사실은 결코 무심한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매화는 추위에 향을 팔지 않는다. 매화는 추운 겨울 동안에도 결코 향을 팔지 않은 탓에 봄에 그토록 이나 진한 향기를 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매화는 난세에 섣불리 나서지 않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선비의 기개와 절개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상징 그대로 작가정신의 모델이 되고, 우리 모두의 귀감이기도 하다. 겨울이 아무리 혹독해도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말며, 난세가 아무리 험난해도 호시절은 반드시 온다. 혹, 그 시절이 안 올 수도 있고, 실제로 안와도 그만이다. 그 시설이 온다고 믿는 신념이야말로 진정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자질이지 않을까(실존주의는 인간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는 것, 만들어지는 것, 과정이라고 본다). 여하튼, 그렇게 봄이 오면 매화는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 매화가 일단 꽃을 피우고 나면, 벌도 아닌 것이, 모기도 아닌 것이 그 주변을 붕붕거리며 아무리 바람을 일으켜도 매화의 향기는 결코 잦아들지가 않는다. 오히려 바람은 매화의 향기를 더 멀리까지 퍼트려주기조차 한다.

매화는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고 했다. 그런 탓에 매화는 봄의 전령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작가의 근작에 등장하는 닭은 새벽을 알리는 전령이다. 그런 점에서 매화와 닭의 의미는 서로 통한다. 봄을 여는 전령과 새벽을 여는 전령. 겨울을 농축했던 매화처럼, 닭 역시 밤을 삼킨다. 겨울을 통과하지 않은 매화나, 밤을 지나쳐오지 않은 닭은 없다. 매화가 여는 봄은 겨울을 통과한 것이어서 더 따뜻하고, 닭이 알려주는 새벽은 어둠 속에서 더 빛난다. 이렇게 작가는 역사의 흔적 위에, 전쟁의 상흔 위에, 결코 전쟁에 덜하지 않는 삶의 피폐해진 폐허 위에 희망의 씨알을 뿌린다. 이렇게 작가는 이전 그림들에서 트라우마를 다루고, 근작에선 그 트라우마를 감싸 안는 방법을 다룬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일종의 초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황논리에 의해 증폭된다. 즉 초록색 꽃을 피우는 매화나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닭이 그렇다. 작가의 그림에선 심지어 병아리마저도 난다. 어디 병아리뿐이랴.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작가의 그림 속에서만큼은 노숙자도 날고, 거렁뱅이도 날고, 주정뱅이도 날고, 피폐해진 영혼을 위로 받고 싶은 사람들이 날고, 산 채로 생매장 당해 죽은 돼지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그 자체 유토피아의 표상이랄 수 있는, 이 있을 법하지 않은 사실은 희망을 더 희망답게, 꿈을 더 꿈답게 해준다. 꿈꾸기가 아니라면 이 전쟁과도 같은 삶의 현실을 어떻게 지나갈 수가 있을까. 니체는 미학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삶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고 했다. 꿈속으로 도피하기가 아닌, 꿈속으로 도약하기, 허구로써 실제를 메우고 수선하기, 그렇게 실제를 메워나가다가 종래에는 아예 허구로써 실제를 재편하고 재구성하기.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예술이기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