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초점이 풍경으로, 그리고 원경으로 옮아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옮김은 정작 그렇게 단언해도 좋을 만큼 본격적이고 전면적인 경우로 보이지는 않는다. 풍경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모티브(바위)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원경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사물(바위) 자체에서 감지되는 즉물성이 강하게 어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전작과 근작의 차이에서 감지되는 변화는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경우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전작에 비해 근작에서 풍경적 요소와 원경의 시점이 더 강조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풍경이나 원경, 둘 다 일종의 거리두기(단순히 물리적 거리를 의미하기보다는 심리적이고 심미적인 거리?)와 관련이 깊다. 사물과 사물로 대변되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이런 거리두기로 인해 좀 더 관조적으로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바위건 돌이건 이런 관조적인 태도와 무관하지가 않다. 때론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오랜 시간동안 온갖 풍화를 묵묵히 견뎌냈을 돌이나 바위 자체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예사로울 수가 없다. 삶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는 바로 이런 예사롭지 않은 존재가 발하는 거리두기와 시간이 공모해 만든 마술적 사건이다. 돌에게서 삶에 대한 관조를, 삶에 대한 유비를 발견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돌은 돌이면서 동시에 돌이 아니다.

작가는 돌을 그려놓고 <웃는 돌>, 또는 <부유하는 삶>이라고 명명한다. 적어도 논리적으로 볼 때, 둘 다 말이 되지가 않는다. 돌은 웃지 않을 뿐 아니라, 떠도는 삶보다는 붙박이의 삶을 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은 논리다.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도 말이 될 수가 있다는 논리(?)다. 바로 이 논리로부터의 일탈을 감행하게 해주고, 도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예술적 상상력이다(하이데거는 과학적 진리와는 비교되는 예술적 진리가 있다고 했다).
일단 논리를 제하고 생각해보자(다행스럽게도 논리는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방법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돌이 웃는지 웃지 않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나아가 돌이 웃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는가. 돌이 웃는 것은 사실은 돌이 웃는다고 느끼는 인간의 느낌이며 감정이다. 바로 돌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 공감을 끌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공감은 말할 것도 없이 돌에게서 나와의 유사성을 발견해내는 행위이며, 이로부터 유비 혹은 유비적 표현이 나온다. <웃는 돌>이 그렇고, <부유하는 삶> 역시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동안 자신에게 가해졌을 온갖 풍화를 견뎌낸 삶이 바로 붙박이처럼 보이는 돌을 부박한 삶이며, 떠도는 삶이며, 부유하는 삶과 동일시하게 만든다. 돌에게서 작가는 이런 상처(풍화)를 삭여낸 넉넉한 웃음을 발견하고, 특히 현자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현자만이 상처(부유하는 삶)로 인해 웃을 수가 있다.
이 모든 일들은 감정이입 때문에 가능해진다. 독일의 미학자 빌헬름 보링어는 저작 <추상과 감정이입>에서 특정의 양식과 환경적 조건을 결부시킨다. 즉 세계와 나와의 관계가 적대적일 때 나는 세계로부터 달아나 자신 속에 숨고, 이로부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그림이 나온다. 그리고 세계와 나와의 관계가 우호적일 때 나는 세계에 자신을 감정이입 시키고, 이로부터 자연주의 그림이 유래한다. 세계에 자신을 투사하고, 세계의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묘사하게 만든다. 공교롭게도 작가의 그림 역시 감각적이고, 재현적이고, 자연친화적이고, 자연주의적이다. <웃는 돌>은 바로 돌과 작가와의 관계를, 돌에 의해 대변되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말해준다. 세계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감정이입을 통해 상처마저도 보듬을 수 있게 된 것일까. 오랫동안 자연을 소재로 해오면서, 자연에 공감하면서, 자연에 위로받으면서 불현듯 다다른 경지로 봐도 될 것이다.
작가는 동판화로 그림을 그린다(찍는다). 주지하다시피 동판화는 판화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판종으로 알려져 왔다. 비교적 작은 크기의 화면 속에 섬세하고 감각적인 세부를 담아낸 이미지가 판화의 고유한 미감을 극대화한다고 본 것이다.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이런 연유로 동판화는 다른 판종에 비해 그 형식적 한계를 넘어서기가 쉽지가 않았다. 이런 한계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작가의 동판화는 여러 의미 있는 형식실험들을 보여주었고, 특히 부식동판화에 관한한 주목할 만한 변화의 상당부분이 작가에 의해 예시되어졌고 견인되어져 왔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를테면 때에 따라선 전지 넉 장을 조합해 한 장의 판화를 만들 만큼 사이즈의 한계를 넘어선 대형판화들이 적지 않다. 그것이 동판화이기 때문에 예사롭지가 않고, 더욱이 단순한 사이즈 이상의 스케일로 압도해 오는 것이어서 예사롭지가 않다. 이처럼 확장된 화면 속에 대담한 구성을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동판화 특유의 섬세한 세부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부연하면, 음영의 풍부한 스펙트럼을 배경으로 그 위에 명과 암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극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화면이 충만한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감각적인 세부를 잃지 않는데, 오랫동안 단일 판종과 판법에 천착해온 숙련된 감각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그 대략적인 과정을 보면 아퀴틴트 기법으로 풍부한 하프톤을 조성한 연후에, 본격적인 부식작업을 통해 명과 암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이처럼 그 변화가 미묘한 톤과 극명한 톤을 감각적으로 중첩시켜 강하면서도 섬세한 화면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버니셔로 화면을 다듬어 하이라이트를 그려 넣는 것으로 그림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조성된 섬세한 음영은 그대로 섬세한 질감으로 연이어진다. 그리고 그 질감은 특히 바위의 표면 질감에 맞아떨어진다. 알다시피 바위를 바위답게 해주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질감이다. 미세한 요철과 크고 작은 크랙들, 매스를 지지하고 있는 결들, 그리고 마른 이끼자국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섬세한 세부들이 하나같이 질감으로 현상하는 것들이며, 그 질감이 제대로 표현되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바위가 오랫동안 침묵으로 숙성시켰을 풍화도, 상처도, 시간도 표상할 수가 있고, 나아가 웃음과 같은 표정도, 부유하는 삶과 같은 유비적 표현도 암시될 수가 있는 것이다.
작가는 시종 자연을 소재로, 자연에 천착해왔다. 섬세한 세부로 인해 자연의 감각적 실체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전달해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금욕적이고 관조적인 인상을 준다. 이런 인상은 아마도 흑과 백이 대비되거나, 모노톤의 화면으로 가급적 색채 사용을 절제하는 것에 연유할 것이고, 그 자체 마치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모노톤이나 무채색의 화면이 사실적으로 드러난 감각적 자연 저편의 어떤 본질에 해당하는 무엇, 어떤 원형과 같은 무엇을 숨겨놓고 있다고나 할까. 이렇듯 작가는 감각적 실체(자연)를 통해 관념적 실체(자연의 원형)를 암시하고, 가시적인 층위(자연)를 건드리면서 비가시적인 층위(삶의 유비)를 파고든다. 그 과정에서 매개가 되어졌던 자연과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주와 객이 하나로 흐르면서 삼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