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를테면 모델에게 일정한 시간을 알려주고, 그 시간동안 카메라 앞에 앉아 포즈를 취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간 내내 카메라의 조리개를 열어두는, 소위 장노출 사진을 찍는다. 노출사진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들의 흔적을 낱낱이 기록한다. 그렇게 기록된 흔적이 포개지는 탓에 피사체는 마치 초점이 나간 사진처럼 흐릿해 보인다(노출시간이 턱없이 길어지면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아예 그 흔적마저도 사라지고 만다). 말하자면 작가의 사진에 찍힌 것은 일정시간동안 모델이 움직인 흔적을 기록한 것이며, 그 경과된 시간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이다. 이렇게 흐릿해진, 흔적 위에 흔적이 포개지고 시간 위에 시간이 중첩된 사진 속 초상은 묘하게도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고,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 미미한 흔적의 층이 미소한 볼륨감을 만들어내는 탓일까. 이렇게 흐릿한 사진을 보다가 정작 정직하게(?) 찍은 사진을 보면 마치 피사체가 사진 속에 고정된 것처럼 보이고, 박제된 것처럼 보인다(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직한 사진은 고정된 순간을 포착한 것이며, 그 순간은 현실의 부분을 잘라낸 것이다). 생생함과 현실감에 있어서 일종의 역전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더욱이 그 흐릿한 사진은 비가시적인 심리를 가시화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자기 내면과 대면하는 계기를 준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여왕 되기 프로젝트>로 명명된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옮긴다. 보통 왕족이나 귀족이 골동품이나 기념품 같은 역사적 유물 속에 잠자고 있는 것에 반해, 덴마크에서는 살아있는 여왕의 공적이고 사적인 생활이 시시콜콜 언론에 노출되고, 보통사람들의 생활 속에 친숙한 존재로 스며들어있는 현실을 보고 작가는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작가는 <여왕 되기 프로젝트>를 광고하고, 그 광고를 보고 찾아온, 자신이 여왕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델로 하여 사진을 찍는다. 이때 사람들이 자신이 여왕과 닮았다고 주장하는 내용들을 보면 대개는 주관적이고 사사로운 것들이다. 주관적이고 사사로운 것들? 여왕과, 여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인? 바로 이러한 사실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여왕을 매개로 모델 자신의 초상을 찍는 것이며, 여왕 흉내 내기를 통해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 것이다.
모델들은 여왕을 상징하는 청색 드레스와 휘장, 그리고 왕관으로 분장하고 사진을 찍는데, 저마다의 나이를 분으로 적용한(예컨대 40살이면 40분) 시간만큼 조리개가 열린 카메라 앞에 앉아 포즈를 취한다. 그리고 말을 하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카메라를 의식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자신이 여왕과 닮은 점을 찾다가, 이 프로젝트에 자신이 참여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생각해보다가, 종래에는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진다. 여왕과 모델과 작가와의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현실적이고 관념적인 역학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며, 이로 인한 합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모델들 저마다의 자기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는 것. 어떤 강제도 없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저절로 자기생각 속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 얼핏, 코스튬플레이나 캐릭터 흉내 내기, 그리고 역할극처럼 보이는 작가의 프로젝트는 사실은 그 이면에서 저마다의 진정한 자기와 만나게 하고, 무엇보다도 무상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풍화돼가는 존재를 발견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