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은 상품의 옷이다. 자본주의 풍경을 보려면 재래시장보다는 마켓에 가야한다. 마켓에 진열된 상품들은 어김없이 포장돼 있다. 여기서 포장은 상품을 보호하고,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포장의 기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유혹하는 기술을 수행한다. 어쩌면 이 유혹하는 기술이야말로 정작 상품을 보호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보다 더 우위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기술이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될 경우에 포장은 상품의 내용물과는 상관없는 그 자체의 자족적인 존재성을 획득하기조차 한다.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가치는 점점 사물(상품)로부터 멀어지고 추상화된다.



특히 가전제품이나 공산품들은 겹겹이 포장돼 있다. 그 중엔 제품의 체형에 맞춘 포장도 있다. 꽤나 정교하게 제작된 그것은 마치 제품의 껍질 같다. 대개는 투명한 그 껍질을 보고 있으면 사물의 분신 같고, 사물의 혼 같고, 그 자체 자족적인 오브제 같고, 물신 같다. 사물과 똑같이 생겼지만 정작 사물(실물)을 결여하고 있는 그것은 마치 변태동물이나 곤충이 벗어놓은 허물 같고, 살아있는 유기체 같다. 신정훈의 작업은 바로 이런 사실의 인식에서 시작된다. 사물과 똑같이 생겼지만 사물과는 다른, 사물과 똑같이 생겼지만 사물을 결여하고 있는, 사물이 벗어놓은 허물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아우라가 작가의 감각 레이더를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이 인식은 유년시절의 기억과 오버랩 된다. 작가의 부친은 인쇄업을 했고, 작가는 인쇄공장을 놀이터 삼아 유년시절을 보냈다. 똑같은 활자들, 똑같은 이미지들이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찍혀져 나오는 것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레 복사와 복제의 문제의식으로 연결된다.
부친의 인쇄공장은 평면 이미지를 찍어냈다. 그렇다면 입체를 똑같이 찍어낼 수는 없을까. 물론 대량생산 체제 하에서 나와진 사실상의 거의 모든 공산품들이 판박이처럼 똑같은 점을 생각하면 이는 이미 실현된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사물 자체가 아닌 사물의 껍질을 겨냥한다. 사물과 똑같이 생긴 사물의 껍질, 사물의 허물, 사물의 흔적, 사물의 아우라, 사물의 부재를 찍어내는 것이다. 이 부재하는 것을 찍어내기 위해선 평면 이미지와 마찬가지의, 그러면서도 그 원리가 입체에 맞춰진 프레스가 필요하다. 그런데 찾는 프레스가 없다. 주지하다시피 공장에도 프레스는 있지만, 이는 다만 규격화된 상품을 위한 것이다. 해서, 작가는 지난한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 직접 프레스를 만든다.



그 작동원리는 대략 이렇다. 프레스 위에 입체의 사물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대개는 투명한(더러 반투명하거나 불투명한 경우도 있지만) 폴리 계열의 패널을 그 위에 대고 압축시키는데, 이때 열을 가해 허물 허물해진 패널을 순간적으로 압축시켜야 변형이 일어나지 않고 원하는 형태(복제 이미지)를 얻을 수가 있다. 이때 어떤 종류의 패널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질감의 형태를 얻을 수가 있다. 그 함유하고 있는 성분이 다르다거나, 열을 받거나 압축될 때 그 조직이 변형되는 정도나 양상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를 위해선 고열과 고압을 견뎌낼 수 있는 소지가 필요하다. 냉장고나 테이블 같은 공산품은 그대로 소지로 써도 무방하겠지만(이 경우, 부분 형태들을 떠낸 후 재차 조립하는 형식을 취한다), 얼굴이나 가슴 그리고 팔과 같은 신체 부위를 떠내기 위해선 따로 주형(라이프캐스팅)을 제작해야 한다. 이렇게 투명한 비닐(?)로 된 냉장고와 테이블과 의자 같은 공산품을, 나뭇가지나 콩의 배아 같은 자연물을, 아기와 모자상, 얼굴과 가슴과 팔 등의 신체를 떠낸다.
이렇게 떠낸 형태는 실물을 닮았지만 정작 실물 고유의 양감과 물성을 결여하고 있는 기묘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양감과 물성이야말로 전통적인 조각의 핵심이며 본질이란 점에서 이를 결여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입체를 실현하고 있는 작가의 조각은 조각의 경계를 넘어 소위 탈조각의 가능성마저 엿보게 한다. 그리고 투명한 형태 탓에 빛이 사물을 통과하는 일종의 투과성이 생겨나고, 이로 인해 벽면이나 공간에 실루엣이 형성된다. 그 그림자가 무슨 평면상의 그림인 양 어필되고,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고, 조각과 회화의 범주를 뒤섞는다. 특히 그림자는 그 음영이 균일하지가 않은데, 이를테면 무슨 수면에 일렁이는 자잘한 파문 같은 미세 얼룩들이 이런 회화적 효과를 강화시켜준다. 그런가하면 오브제 자체는 투명한 소재 탓에 자칫 그 실물감이 희박한데 반해, 정작 그 오브제로부터 유래한 그림자는 오히려 더 뚜렷한 현실감을 갖는, 소위 실제와 허상과의 관계가 전복되는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투명한 소재가 빛을 투과시키고, 그 빛이 그림자를 만드는, 그리고 재차 오브제와 그림자가 실물감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감각적으로 흥미로운 어떤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면, 거대한 크기로 증폭된 배아는 생명의 근원을, 존재의 씨알을, 우주의 원형을 상징하며, 그 의미가 아기와도 통한다. 말하자면 낱낱의 존재를 (대)우주가 분유된 소우주로 보는 관념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유기적이면서도 추상적인 형태가 두드러져 보이는데, 이렇듯 양식화된 형태는 아르프의 추상조각을 연상시키는 작품 나 <모자상>에서도 확인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선 특히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를 무슨 프레임처럼 사용해 서로 이질적인 재질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또 다른 형식의 한 지점을 엿보게 한다.

그런가하면 두 개의 팔을 서로 엇갈리게 포치한 작품 <마주잡기>는 사실은 제목과는 다르게 서로 맞잡을 수 없는 불통의 인간관계를 반어법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이런 소원해진 관계는 무슨 투명인간을 위해 마련된 것 같은 작품 <테이블>에서 더 암시적이면서도 강력하게 환기된다. 대화를 침묵으로, 그리고 독백으로 삼키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배우들)이 연기하는 무언극이나 상황극을 보는 것 같다. 그 자체가 현대인의 정체성 상실이나 정체성 위기의식을 엿보게 한다. 어쩌면 속이 빈,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아예 보여줄 속조차 없는 작가의 작업은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자체가 이미 정체성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이런 정체성과 관련한 자의식은 주변사람들의 얼굴을 떠낸 마스크 수십 개를 한자리에 모아 병렬시킨 작품 <각양각색>에서 또 다른 형식을 얻는다. 페르소나, 바로 가면이다. 익명성의 가면 뒤에 숨는 현대인의 자기소외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울과 똑같은 반영효과를 내는 폴리 계열의 특수소재를 이용해 마스크를 떠낸 작품 <거울을 보라>에서 반영은 자기반성적인 성질이라는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상황논리로 나타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단순히 신체의 부분이나 사물을 떠내는 식의 작업에서 나아가 상대적으로 더 진척된 일면을 엿보게 하는데, 말하자면 관계에의 인식이나 상황논리(어떤 서사적 상황?)를 끌어들여 작업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Press, press, press. 찍기와 반복. 반복적으로 찍어내기. 신정훈이 자신의 작업에 부친 이 주제는 자본주의의 생산 시스템을, 대량생산과 자동화 시스템을 상기시키고, 이에 따른 각종 공산품이 제작되고 생산되는 과정을 떠올려준다. 똑같은 플라스틱 용기들과 똑같은 생활용품들이 출현해 불과 한 세기전만 해도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삶의 평등화를 실현해놓고 있다(?). 앤디 워홀은 팝아트의 미덕을 이야기하면서,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코카콜라를 마신다고 했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에 이미지는 더 이상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 아닌, 누구나 즐기고 향유하고 소유할 수 있는, 이미지의 민주화를 실현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자본주의의 자동화 시스템은 과연 삶의 평등을 실현했고, 이미지의 민주화를 실현한 것일까.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계급론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문화에도 취향이 있고, 계급이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된 사물계급론이 있다.

사물(어쩌면 사람)의 허물과 껍질로 나타난 작가의 작업이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자의식을 떠올리게 하고, 복사와 복제에 그 젖줄을 대고 있는 작가의 작업이 수제와 짝퉁, 수제와 골동, 그리고 일체의 미적 취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동 생산된 물건들로 나타난(혹은 연이어지는) 사물계급론을 상기시킨다. 나아가 이 주제는 인간복제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작가는 사람 그대로를 떠낸다. 이렇게 떠내어진 사람의 껍질을 인간복제에 대한 유비로 읽는다면, 이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종래에 작가는 가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 이를테면 바람과 같은,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이나 느낌과 같은 것도 찍어내고 싶다고 한다. 그 비가시적인 것들의 항목에 시간과 흔적, 부재, 그리고 공, 허, 무, 여백처럼 비어있으면서 차있는 공간의 개념을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비가시적이면서 정작 가시적인 것보다 더 뚜렷한 실체감으로 와 닿는 것들은 많다. 이것들을 실제로 찍어낼 수 있을 때 작가는 지금과는 또 다른 장(차원)에 들어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