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풀려진 몸은 남성보다 근육 량이 적고 지방질이 많은 여성 체질의 특이성을 표현함과 동시에, 식욕으로 압축되는 여성의 욕망을 가시화한다. 물론 식욕이 여성만의 욕망은 아니다. 그러나 식욕과 여성의 관계는 좀 더 특수하다. 남성적 욕망이 투사된 날씬한 여성이라는 표준은 배고픈 여성에 대한 표현을 금기 사항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박관념이 강하게 나타났던 때는 문화적으로 가장 위선적인 시대로 알려진 빅토리아 시대이다. 헬레나 미키는 [여성의 비유와 여성의 신체]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서, 그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관통되는 코드로, 여성들의 굶주림과 노동의 묘사를 제한하는 일련의 재현적 금기를 든다. 굶주림과 노동은 모두 신체, 그리고 성욕과 연결된다. 저자에 의하면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소설, 그것도 가장 비참한 주제를 리얼리스틱하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소설조차도 무엇을 먹거나 배를 주리는 여주인공은 거의 묘사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점점 더 말라가고 창백해질 뿐이다. 빈약한 식욕은 여성성(더 나아가 처녀성)과 연결되며, 허약함과 창백함은 지나치게 세련된 것 속에서 아름다움의 기호가 되었다. 결핍의 미학은 윤리적 요구가 되었다. 이 재현적 관습이 빅토리아 시대에만 해당될까? 이러한 미학적, 윤리적 요구에 견준다면, 변현수의 작품에 등장하는 혈색 좋고 살집 있는 여자는 살아있는 여성을 틀 지우는 규범에 대한 반항처럼 보인다. 그것은 헬레나 미키의 결론처럼, 여성의 신체를 가두었던 코드들과 금기들을 파괴하면서 여성의 신체를 보다 완전하게 재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변현수의 작품은 여성의 배고픔을 인정하고 표현 할 수 있는 능력, 여성의 욕망을 창조하고 생성시키며 생장시키는 여성의 힘에 주목한다. 그것은 모든 여성에게 소녀 같은 날씬함을 요구하는 재현의 불공평성을 폭로하고, 본래 모습에 대한 존중감을 표현한다. 물론 작가로서의 변현수의 욕망은 억압받는 여성의 원초적인 욕망일 뿐 아니라, 그것을 잘 표현하고 싶은 예술적 욕망과도 관련된다. 인체를 중심에 놓고 작업하는 조각의 특성상, 몸의 형태로 이 표현욕구가 드러나 있을 뿐이다. 2003년 한서 갤러리에 열린 첫 개인전 [complex room]에서는 붉은 색 실루엣의 날씬한 여자들이 섹시한 포즈의 그림자로 만들어져 벽에 가득 붙어있고, 사이사이에 뚱뚱한 여자들이 배치된다. 벽에 가득한 붉은색 그림자들은 뚱뚱한 여자들이 바라는 이상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날씬한 여자들 못지않게 육감적으로 표현된 이 여자들이 품고 있는 욕망은 표준적인 미인들과 다를 바 없으며, 좀 더 현실감이 있기조차 하다. 2007년 관훈 갤러리에서 열린 [마음의 옷장] 전에서 뚱뚱한 여자는 보다 적극적으로 등장한다. 옷장에 걸어놓은 8개의 라텍스 몸뚱이는 옷을 갈아입듯 선택하는 가변적인 정체성을 보여준다. 원더우먼, 스파이더맨, 아톰 등의 신발이 신겨진 그녀들은 만화 속 캐릭터들처럼 유쾌하고 전능하다. 같은 전시의 작품인, 공기로 충전된 라텍스 동물 주머니는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들에게 필수적인 물과 이상을 상징한다. 장기를 담고 있는 주머니인 피부처럼, 무한대로 확장되는 재료는 가변적인 몸을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2008년의 3회 개인전에서, 사람 몇은 들어갈 법 한 사이즈의 옷에 새겨진 ‘지독한 욕심쟁이’라는 단어는, 넘치는 여성의 욕망을 넉넉히 품어주고, 동시에 보이는/보이지 않는 철창에서 빠져 나오려는 욕망의 크기를 표현한다. 현재 몰두하고 있는 작품은 토르소 형태의 몸이다. 그것은 숙녀복을 재단할 때 사용하는 몸통인데, 재단용의 이상적 모델이 44, 55 사이즈라면, 이것은 88, 99 사이즈로 두 배 가까이 된다. 그것은 남성의 보호를 받기 위해 축소될 대로 축소된 몸과 거리가 있다. 이 토르소들은 아름다운 가상으로 통합시키는 거울을 비롯한 여러 틀들이 규정하는 여성의 몸과 매우 다르다. 틀 짓기와 보이지 않는 감금 아래 놓인 여성의 욕망들이 분출되는 또 하나의 장소는 예술작품이다. 변현수의 작품에서 잔뜩 부풀려진 몸뚱이는 전복적 상상력과 의미의 팽창을 말한다. 여성 이미지의 역사는 여성이 가부장적 질서에 복속되기 시작하면서 빈약하고 왜곡된 모습으로 변모됨을 알려준다.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며 보살피고, 지상의 구체적인 삶을 챙기는 여성의 삶은 언제나 남성적 ‘문화’의 이면인 낙후된 ‘자연’으로 머물러 있었다. 여성이 남성보다 자연에 더 가까운 존재로 평가된 것은 대체로 여성의 억압으로 귀결되었으나, 페미니즘의 일파는 이러한 차이에서 대안성을 찾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지배질서에 남성과 함께 투쟁하면서도, 차이가 야기하는 풍부함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뤼스 이리가라이는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서, 여성의 착취는 성차별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그 해결책은 성차별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남성화나 양성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남녀의 평등은 사회적 권리와 의무 안에서 다른 존재로서 각각의 성에 따른 권리와 의무를 다시 쓰지 않고서는 얻어질 수 없다. 사회 정의, 특히 성과 관련된 정의는 언어의 법칙과 사회질서를 구성하는 가치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특수성으로 간주된 것 중의 하나는, 여성이 자연이고 육체이며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예술가적 정체성과 가깝다. 엘렌 식수는 [메두사의 웃음]에서 자신을 글로 쓰면서(예술작품으로 표현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육체로 귀향할 것이라고 말한다. 엘렌 식수에 의하면 예술적 표현을 통해 여성은 자기 고유의 힘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늘 똑같은 자리만 마련되어 있는 초자아화 된 구조에서 여성을 끄집어 내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성의 자연스러운 육체에 대한 긍정은 남성적 투사에 의한 그림자 같은 존재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변현수의 작품에 내재된 여성성은 단지 여성의 편협한 자기 이익이나 배타적 욕망을 주장하는 넘어서, 차이가 필요한 예술 언어에 풍부함을 추가한다. 이러한 차이의 언어는 가부장적인 언어 질서로 가득한 상징적 질서에 비한다면 일관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변현수의 작품 속 여성상은 일관성 대신에 풍부함을 선택한다. 그녀들은 한정된 경계를 넘어 모든 방향으로 부풀어 오르는 삶의 욕망을 긍정한다. 그것은 정신적인 승화를 위해 육체를 억압하지 않으며, 창백한 추상화가 아닌 지상의 삶을 중시한다.
출전; 2010 안성 창작 스튜디오 공동 워크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