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혁 전 (4.22-5.23, 조현 갤러리)
김을 전 (4.9-6.5, 스페이스 공명)


무려 450개가 넘는 오브제들이 등장하는 김을의 작품, 그리고 힘찬 필획과 다양한 패턴들이 불연속적으로 얽혀 있는 임자혁의 그림은 잡다(雜多)함이 모인 집합적 풍경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한 번에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개별적인 부스러기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응집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응집력은 다양한 것을 일괄하는 총체성이나 일관성, 어떤 형식적 원칙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을 이루는 수많은 구성요소들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기원을 두며, 마찬가지로 관객의 무의식에 호소한다. 이 무의식은 심층으로부터 유출된 것이기 보다는 표층들의 연결망을 통해 작동하며, 단절을 통한 연결이라는 기계적 방식이 특징적이다. 그것들은 이성적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두드러진다. 자연스러움은 하나의 법칙으로 규정된 결정론적인 세계나 우연 그자체가 아니라, 질서와 무질서가 상호침투 되어 있는 카오스모제(Chaosmose)의 세계이다. 혼돈과 질서라는 상반되는 의미가 결합된 모순적 어법만이 그 세계를 포괄할 수 있다. 질서의 이면에 혼돈이 있고, 혼돈의 이면에 질서가 있다고 생각하면 ‘카오스모제’는 자기당착적인 표현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이 다소간 선문답 같은 논리를 피해가는 지점은, 그것이 조정된 카오스라는 점에 있다. 이들의 카오스에는 단순한 뒤죽박죽이 아니라, 차이와 분절적 계기들이 존재한다.




임자혁은 물기를 담뿍 머금은 힘찬 필획들이 산수의 골격을 이루고, 사이사이에 다양한 색과 형태의 패턴들이 배치된 풍경들에 ‘산들바람’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는 ‘물감이 휩쓸고 간 자리에 땅의 표면과 강의 가장자리를 닮은 모양이 생겨난다’고 하면서, ‘자연스러운 붓질’과 ‘자연을 닮은 모양’의 동형성에 신기해한다. 이러한 구조 역학적 비슷함은 그의 작품이 자연의 외관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자연을 형성하는 원초적 힘의 모방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완전한 추상화로 귀결되지 않는다. 산수로 가정된 색채-형태의 덩어리 한켠에 펼쳐진 공간(또는 여백)에 그려 넣은 작은 동물들은 풍경을 기념비적 스케일로 고양시키며, 서사의 매개 고리가 되어준다. 가령 녹아내리는 빙하 위의 북극곰이나 진달래 빛이 흐드러지는 산야 위로 튀어 오르는 토끼 한 쌍은 모호한 풍경을 읽을 관객에게 의미의 방향타를 제시한다. 화면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굵은 필획은 산수라는 기본 틀을 제시하지만, 추상적 패턴이 전면화 된 것도 있다. 연속적인 힘의 흐름 사이사이에 배치된 불연속적인 패턴은 실체가 불분명한 무늬 뿐 아니라, 구체적인 지형지물의 파편들이 끼워있어 이물감과 생동감을 동시에 부여한다.




불확정적인 색 점과 얼룩들이 에너지의 흐름 그 자체에 맡겨진 이질적 풍경은 유토피아와 헤테로피아를 교차시킨다. 임자혁의 작품에서 산천초목이나 바람 같은 자연적 원소는 다양한 분기점을 가지는 선과 패턴의 흐름으로 가시화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풍경이자 풍경 내부로의 침투, 또는 미지의 대륙에 대한 지도그리기처럼 보인다. 선과 색의 배치를 통해 구별될 수 있는 체계는 서로 얽혀 있으며, 요동치는 힘이 풍경의 다양한 실루엣을 만든다. 이 복잡한 체계는 고정된 풍경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세계로, 그것들이 위치해 있을 시공간에 열려 있을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 그 자체를 새로이 조직한다.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 열려진 개방성은 자유와 유희를 가능케 한다. 노르베르트 볼츠는 [컨트롤된 카오스]에서, 자유는 분기작용과 피드백으로 점유된 유희공간이라고 정의한다. 왜냐하면 자유는 항상 다른 길, 즉 막다른 골목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진화의 분기점들은 체계들이 자신의 실존을 위협하는 장소들에서 종종 극단적인 탈출을 통해서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임자혁의 작품에서 끝없는 힘의 전환과 혼합으로 요동치는 풍경들은 파국들을 통한 자기보존이라는 자연의 양상을 표현한다. 그러한 파국적 전환은 새로운 생명 형식에 이르는 작용들을 야기한다.

복잡하게 얽힌 체계로서의 산수와 떨어진 장소 혹은 여백위에 던져진 듯 배치된 동물들은 목전에 전개된 사태에 대해 작가나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만한 존재이다. 그것들은 산수에 비해 구상적 형태를 유지한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것들 중 유일하게 인간이 등장하는 작품조차도 고전적인 산수풍경에 나올법한 캐릭터이다. 현대적 풍경 속에 배치된 개체들은 주체의 자리를 점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주체성에 대한 보편주의적 표상이 부재하다. 그것들은 풍경들만큼이나 이질적인 주체, 곧 ‘타자의 복합체로서의 개인’(펠릭스 가타리)이다. 그것은 새로운 배치와 흐름을 통해 이질적인 것들을 발생시키고 있는 풍경을 창안한 작가의 주체성과 관련된다. 이 주체성은 ‘단일한 인과율에 따라서 다른 모든 층위들을 인도하는 지배적이고 결정적 층위’(가타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임자혁의 작품에서 무엇이라 확정지을 수 없는 다양한 패턴의 배치는 하나의 코드로 총괄될 수 있는 재현적 통일성을 거부하고, 욕망으로 충전된 분자적 흐름으로 변환시킨다. 필획과 패턴은 이접의 방식으로 연결되면서, 구조와 생성을 공존하게 한다.

그동안 틈틈이 모아왔던 오브제들이 모두 쏟아져 나왔을지 싶은 김을의 전시장은 난쟁이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인형들은 각자, 또는 군집을 이루고, 다른 사물과 어우러진다. 거기에는 그 모든 것들의 배후에서 이들을 총괄하는 주체의 독단적이고 음울한 독백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 각자 제목소리를 내는 다성성이 울려 퍼진다. 전시장 불이 다 꺼지고 관객들과 전시장 지킴이마저 집으로 돌아가면, 자기들끼리 시끌벅적한 축제라도 한판 벌일 것 같은 태세이다. 그렇게 많은 오브제들이 그렇듯 잘 어우러질 수 있을까. 이러한 조화는 미스테리에 가깝다. 그의 작품 속 사물들은 테이블 옆에 놓여진 쓰레기 봉지 속 폐기물처럼 임의적이며 쓸모없으면서도 어떤 흔적을 담고 있다. 특별한 설치적 장치가 동원된 것도 아니다. 대여섯 단으로 된 크고 작은 깡통, 책장, 조각난 나무 판대기로 이어 붙여진 테이블, 크고 작은 틀이나 상자 등에 배열되어 있는 사물들은 결코 반복되지 않는 특이성(singularity)을 가진다. 기발하게 가공된 형태들은 평범했을지도 모를 것들을 충격적이거나 서정적인 사물로 변모시킨다. 각자 다르다는 점만이 유일한 일관성을 이루는 사물들은 그 표면이나 부분에 남아 있는 작가의 흔적으로 인해 사물로 씌여진 글같이 보인다.

그것은 발견된 오브제를 빌어서 한 개인이 써내려 간 이야기들이지만, 저자의 존재가 분명히 드러나는 통일된 작품보다는 이질적인 것들이 상호 교차된 텍스트에 가깝다. 언젠가 한번 잠깐 만나보았던 작가의 외모와 닮은 인형들이 종종 등장하긴 한다. 스킨헤드에 보조개 같은 입주름을 가진 이 소년 인형은 거대한 붓을 둘러매고 여러 곳에 배치되어 있다. 특히 잊어버릴만 하면 나타나는 물방울은 화판, 거울, 창문 등에 새겨져 있고, 때로는 자신을 암시하는 캐릭터가 직접 들고 있기도 하다. 땀과 눈물을 연상시키는 물방울에는 환희와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는 작업하는 삶이 반영되어 있다. 작가의 감성과 사고, 상황과 사건들이 압축되어 있는 이 수많은 존재들은 전시를 앞두고 어느 날 갑자기 급조된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맥락에서 취한 사물들에는 서로 다른 시공간의 간격과 감정들이 흔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브제들 사이에 놓인 간격들은 틀이나 박스같이 격리된 작은 방 같은 불연속적인 장치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물론 각각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횡단적인 선의 흐름이 내재한다. 이 이질적 단편들은 전체를 담는 파편같이 작동하면서, 뿌리줄기 같은 연결망을 이룬다.

수 백점의 오브제들과 달리, 벽에 걸린 7점의 회화는 극도의 썰렁함이 특징적이다. 그의 회화에서 썰렁함은 단지 피폐한 썰렁함이 아니라, 나름의 급과 격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사물의 반대편에 놓이곤 하는 ‘예술’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그림을 ‘소, 닭, 개’와 같은 반열에 놓으며, ‘그림이 필요 없는 즐거운 세상은 없을까’를 희망한다. 힘없이 그어진 수평선 위에 얹힌 먼 산 3개, 기름이 새는 듯 비틀거리며 나는 비행기, 핸드폰의 자판 부호처럼 보이기도 하는 여러 대가 뒤엉킨 비행기, 탁자 위에서 스멀거리는 푸른 문어 그림들은 심오한 내용이 담긴 그럴듯한 장면, 요컨대 힘이 들어간 회화가 아니라, 일상에서 재발견된 사소한 사물이 던져주는 크고 작은 각성이 내재해 있다. 낡고 사소해 보이는 그의 작품 속 사물들은 대부분 버려진 것들을 수집한 것이다. 김을의 작품에서 강하게 풍기는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는, 아마도 최초에는 번쩍거리는 상품으로 소비자의 물신적 욕망에 호소하다가 그 역할을 다하여 폐기되고 망각된 것들이 다시금 작가의 욕망에 부응하는 또 다른 사물로 발견되었다는데 있다. 오랜 기간을 두고 수집된 사물들은 변형과 병치를 거쳐, 본래의 상품 또는 대상에 내재되어 있었을 꿈과 무의식을 변주하여 풀어 놓는다.

출전; 아트 인 컬처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