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licita’, 이탈리아어로 ‘더 할 나위 없는 행복’이란 전시부제로 열리는 황지현의 전시는 이제 막 30세가 되는 여성작가의 밝고 긍정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의 계보와 직접 연결된, 이전에 열린 개인전 제목들--‘사랑 찬양자’(2006년), ‘delight of universe’(2008년), ‘love paradise’(2008년)--만 살펴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황지현은 사회질서에 순응하라는 강압적 메시지 외에 특별한 기능이 없어 보이는 엄청난 ‘스펙’과 그것을 젊은이들에게 요구하는 한국 사회에서, 무한정 늘어난 교육기간과 늦어진 결혼 연령대로 인해 30세까지도 ‘성인’, 즉 아직 책임 있는 사회인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세대에 속한다. 아직도 무지개 너머에 뭔가가 있을 것 같은 꿈과 환상의 세계는 그들의 또 다른 현실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절망과 환멸이라는 씁쓸한 진실에 의해 지배될수록 이상향에 대한 갈구는 더욱 커진다. 이러한 꿈과 환상의 세계는 현실 도피의 이면이지만, 그러한 이면이 없다면 사소한 현실도 지탱될 수 없을 것이다. 엄혹한 현실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꿈과 환상은 개인을 지탱 시켜주는 에너지가 된다. 그것이 적절한 출구를 찾는다면 도피는 돌파로 변모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에너지의 총량을 늘려가는 것이며, 앞으로 까먹을 일이 더 많은 젊은 시절의 비축 에너지는 작업을 하며 살아갈 삶에 필수적이다.




황지현의 작품에서는 넘치는 에너지는 작품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지만, 명료한 이해보다는 감성적 전염을 요구하는 소통 방식을 추동하는 원천이 된다. 전시부제가 들어있는 작품 [felicita-if we are together]는 이 전시의 작품들을 이루는 특징을 압축한다. 한 화면에 시공간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여러 개의 화면을 병치시키고, 그 안에는 어떤 감정 상태와 자연이 결합한다. 그것은 우선 ‘예술은 감정의 상상적 표현’(콜링우드)이라는 미학의 기본적인 입장을 따른다. 또한 그녀의 작품은 ‘정신과 자연이라는 두 세계를 연결시키게 하는 힘은 상상력’(코울릿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상상력에 대한 이러한 고전적인 관점들에 덧붙여야 할 것은,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곳에 성의 차이가 있다’(뤼스 이리가라이)는 생각일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인간은 자세하고 구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상징적으로만 나타나지만, 자연은 미시적 차원까지 자세하게 재현된다. 눈 결정 입자가 보이는 겨울 등이 전개되는 화면들에 나타나는 계절의 변화를 연인 간의 느낌으로 전치시켰다. 황지현의 작품에서 자연은 형태이자 에너지이다. 작품 [unusual way]에서 자연은 생명력 가득한 초록 융단이 깔려 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도상에 치솟거나 흐르는 물줄기가 결합되어 있으며, 하늘 저편은 아지랑이 같은 패턴으로 채워진다.




작품 [what is love-women]은 태양과 과일 등, 자연적 소재가 타원형 패턴으로 채워진 바탕 위에 놓여진다. 여기에서 추상적 패턴은 구체적 형태로, 또는 그 반대로도 변환될 수 있다. 어떤 도상인지 잘 알아볼 수 없는 작품에도 환희와 축복의 감정이 가득하다. 작품 [the spring of delight]는 난데없이 화면 위에 걸쳐진 커튼 같은 형태가 구획된 경계들을 휘젓는다. 화면은 물줄기처럼 터지는 기쁨, 휘몰아치는 상태로 분주하다. 크리스마스 장식물을 닮은 작품 [blessing day]에도 나타나듯, 황지현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사랑은 종교적인 것이기도 해서, 고독이나 갈등을 야기하는 극단성 보다는 조율과 조화를 지향한다. 모든 것이 붕 떠 있는 작품 속 도상들은 정지와 휴식 대신에 운동과 활력에 방점을 찍는다. 작가는 ‘내가 위로받고 활력을 얻는 존재는 사람이 아닌 자연’이라고 말한다. ‘붓을 들면 습관적으로 그리게 되는’ 자연에는 어린 시절 여름방학 때마다 갔던 거제도에서의 추억이 깔려있다. 그래서인지, 물이나 계절의 변화가 야기하는 에너지의 흐름은 작품 곳곳에 배여 있다. 작품 [vivid spring]은 가로로 나뉜 화면 위에 펼쳐진 색과 형태, 에너지와 형상이 빼곡히 채워진다. 둥근 캔버스에 그려진 [the forest of magic]은 꽃의 중심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타원형 패턴 위에 불새들이 날고 있다. 정방형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 [nature-the absolute energy]는 불과 물 등, 자연을 이루는 여러 원소들이 중심에서 발원한 힘으로 나타난다. 황지현의 작품에서 자연은 보여진 풍경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원소로 환원되고 재조합된다.

보통 상징주의는 대립 쌍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녀의 작품 속 상징주의는 대립에 기초한 고정된 상징성이 아니라, 차이를 보유한 다양한 울림을 향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지름 30cm인 동그란 캔버스 작품 12점은 각각의 세계로서의 자족성을 가짐과 동시에, 여럿이 어우러지며 운동감을 보여준다. 황지현의 작품은 하나의 질서로 귀결될 종합과 화해를 향한 대립이 아니라, 간격과 차이를 보존한다. 두 개의 화면으로 나뉜 작품 [fire & water]는 힘이 있는 리듬을 가진 타오르는 불과 부드러운 생명력을 가진 물이 병치된다. 작품 [stairs boundary of heaven & earth]에서 지상과 천국은 미로처럼 놓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안과 바깥, 지상과 천국 등, 구별되는 차원들을 연결하는 계단은 작가로서 걸어야 할 길을 암시한다. 작가는 이에 대해, ‘지치고 힘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어둡고 어두운 계단을 기꺼이 견뎌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말한다. 이상향 보다는 당면한 현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요즘 작품에는, 집이나 계단 같은 인공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자연은 물론, 아지랑이나 세포 같은 유기적 형상과 대조되는 인공적 구조물은 아직 제자리를 잡고 있지 못하다. 그것들은 작품 속 인간들처럼 추상적이고 미미하며, 자연에서 발원한 힘들에 휘둘리곤 한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아크릴 파편들을 모아서 꼴라주 한 작품들은 부정에서 긍정을 길어내는 작가의 역량을 드러낸다. 작품 [dazzling wave]는 얼룩진 물감 덩어리를 화면 아래에 붙이고, 그 위로 거세게 분출하는 물줄기에 인간과 자연이 띄워놓는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색감과 병치에서 야기되는 괴상한 분위기, 시점과 각도의 변화를 다양하게 주는 구도 등, 작품에 두드러지는 초현실적 요소는 그림 외에 만화나 영화, 오페라,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즐기는 작가의 취향이 배어있다. 황지현의 작품은 거의 산만하게 보일정도로 차이들 간의 간격이 유지된다. 그녀의 작품에서 의미라는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 필요한 대립성은 차이들의 묶음으로 대치된다. 이항대립에 근거한 질서감각은 변증법에서 전형적이다. 엘렌 식수는 [메두사의 웃음]에서 화해와 종합을 전제하는 삼단 논법식의 체제를 비판한 바 있다.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논법의 전형이 헤겔의 변증법인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위한 주체의 타(他) 속으로의 외출이다. 이러한 일상적 사회생활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개인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국가로 세 단계를 거쳐 옮아가는 이러한 무대장치는 개인을 완벽하게 똑같은 형태로 만들어 놓는다. 그것은 타자로 향한 움직임을 억제하는 논리, 단하나의 정체성의 역사, 즉 남성중심주의의 역사에서 흔히 보여 진다.

투쟁과 갈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정은 많은 타자들을 희생시킨다. 역사 속에서 타자라고 부르는 것은 계급화 된 관계 속에서 다른 것으로서의 타자이다. 역사에서 타자는 오로지 다른 것으로서 다시 가로채어지고 취해지며 파괴되어지기 위해 거기 있을 뿐이다. 그것은 모든 대립성들을 생산해내는 기계들이 경제와 사고를 돌아가게 만든다. 반면, 종합보다는 차이의 위험을 무릅쓰는 황지현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타자와의 사랑은, 개인을 특정한 모델로 제조하는 사회적 기계로 환원하지 않는다. 구별되는 여러 범주들과 차원들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그 위로, 또는 그 사이사이로 가로지르는 힘들을 드러낸다. 동일자는 타자들에 의해 내맡겨지고, 그것은 내 안에서 타자가 통과함, 들어옴, 나감, 머묾이다. 이러한 우글거림은 불안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황지현은 이러한 침투성과 비(非)배제성을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양껏 허용한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경이로운 확장의 계기이지만, 이 같은 열림은 위험하기도 하다.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수천의 변화를 이루는 복수화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복수화의 도정에서, 화면에서 출몰하는 폭발적인 힘은 거대한 하나의 흐름에 합류됨 없이 각각의 자리에서 둘러쳐진 크고 작은 경계 들 위에서 활동한다. 그것은 흘러넘침과 갈 곳이 명확치 않은 방황에 가깝다.

엘렌 식수는 이러한 무한하고 유동적인 복합성에서 여성의 에로틱한 표현을 본다. 그것은 운명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떤 충동의 모험에 대해서 말한다. 이러한 유동성을 통해서만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여성 고유의 창조성은 역설적으로 아무런 계산 없이 자기를 익명화하고 탈 고유화 하는 능력이다. 일관성 있는 체계에 의해서 구조화되지 않은 장소들, 변화와 다수의 기적이 벌어지는 여러 공간들을 쉼 없이 돌아다니는 힘은 타자들의 현기증 나는 횡단이다. 황지현의 작품에는 다수로 존재하는 경이로움이 있다. 변화 중에 있는 자신은 모든 살아있는 것과 접목된다. 이러한 접목은 통합이 아니라 느슨한 확산이며, 하나의 선적 흐름을 벗어난다. 그것은 자기동일성에 집착하지 않는 분산의 힘이며, 욕망할만한 타자가 되는 능력이다. 이 힘은 조용히 기화되면서 빈 공간을 가득 채우거나 바람으로, 향기로, 목소리들로 변주되며, 어떤 시점에서 격류들로 폭발하곤 한다. 그것은 정지와 정체에 저항하는 욕망의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자연의 다산성과 상상력을 중첩시키는 작가의 선택은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희소성의 가치를 꾸며내어 끝없는 소유의 경쟁을 야기 시키는 절약의 경제에 반대된다. 풍부함과 다양성의 가치는 추가 항목들을 아낌없이 나열한다.

그것은 빈약한 현실원리를 대치하는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아니, 쾌락원리도 넘어서는 향락(jouissance)의 세계이다. 향락은 금지를 기반으로 하는 법과 규칙의 세계인 상징적 질서를 초월하는 실재의 세계에 속한다. 실재, 상상, 상징의 세계를 구별한 라깡의 이론(이하, 라깡에 대한 언급은 딜런 에반스의 [라깡 정신분석 사전] 참조)에 의하면, 향유는 ‘즐기다’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동사 ‘jouir’에서 나온 것으로, 불확정적이고 유동적이고 공백이 있는 것에 붙여진 이름이다. 향락의 폭발적인 힘은, 기원이 다양한 모순적인 것들이 한데 얽혀 그물망을 이루는 텍스트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황지현의 그림 곳곳에서 분출된다. 라깡에게 향락은 단독적인 남성 오르가슴에 대해, 다양하고 확산적인 여성 특유의 성적 쾌락과 상상계(imaginary)--아이가 어머니나 세계에서 아직 분리되지 않은 전(前)언어적인 상태--양쪽 모두를 가리킨다. 상상계는 여성의 성적 쾌락과 마찬가지로 개체적 정체성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다면적 정체성의 영역이며, 한계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초과의 영역이다. 황지현의 작품은 동질성을 초과하는 몫, 그 이질성들에 자기의 자리를 내준다. 향락은 고정된 가치에 기초한 소유관념을 초과한다. 무한한 자연과 상상력처럼 고갈을 모르는 근원들에 젖줄을 대는 그녀의 방식은 유동적이고 복합적이며,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