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이래로 도시는 예술가들에게 크고 작은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특히 어떤 감각보다도 시각성에 호소하는 도시의 면모는 사진이나 영화, 건축과 미술 같은 시각예술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곤 한다. 그것은 근대성과 대중, 대중문화를 낳았고, 전문적인 장르로서의 미술이나 미학 또한 도시의 산물이다. 도시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자유의 공기가 흐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시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연과 전통으로부터의 속박을 벗어나게 하였고, 그 정체성을 급격하게 재맥락화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노동과 역할에서 탈피하여, 한가로이 도시를 거니는 것은 변화무쌍한 체험을 안겨주고 기분전환을 야기한다. 시시각각 다르게 펼쳐지는 화려한 경관들, 그리고 개성껏 차려입고 스쳐가는 익명적인 사람들은 동시대의 풍경과 인간들의 삶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곤 한다. 구체적인 삶에 연루되는 일 없이, 구경꾼의 입장에서 지나칠 수 있는 거리감은 매순간 다르게 펼쳐지는 도시의 경관들을 그 자체로 미학적인 대상으로 만든다. 도심의 배회자가 음악을 들으며 걷고 있다면, 이곳저곳 눈이 닿는 대로 편집되는 공간들은 한편의 뮤직 비디오처럼 펼쳐질 수 있을 것이고, 거리의 젊은이들은 멋진 세트 속의 연극배우나 영화의 장면들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너무 북적이지 않고 피곤하지만 않다면, 거리를 걷는 체험은 주체로 하여금 유쾌한 도보 여행자 같은 태도를 가질 수 있게 한다.
그래서 할 일이 없는 사람이나 바쁜 사람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 스스로가 거리에서 펼쳐지는 파노라마 및 스펙터클의 일부가 되려 한다. 도시의 거리가 주는 자유로움과 기분전환은 그 곳이 무엇보다도 대중의 욕망에 부응하는 소비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생산과 노동, 삶의 현장에는 결코 이러한 가벼움이 있을 수 없다. 노동과 소비 사이에 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는 간극은 소비의 장소인 도시를 더욱 자극적인 장소로 만들어 나간다. 도시가 노동의 대가를 먹고 자라는 소비의 장소인 한, 그곳은 동시에 소외의 장소이다. 도시문화가 거저 안겨 주는 듯한 쾌락의 배후에 놓인 도시의 정치경제학은 그곳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게 한다. 유흥과 여가, 소비의 장소인 도시의 공기를 채우는 자유는 분리와 무관심, 고립과 수동성, 배제와 박탈감의 이면이기도 한 것이다. 도시적 풍요 및 자유로움에 대한 찬가, 그리고 소외에 대한 저주와 비판은 한 몸의 두 얼굴이며, 근대와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이러한 양면성을 읽을 수 있다. 자본주의로 인해 본격적으로 열린 도시 문화에 대한 가장 유명한 선행 연구 중의 하나는, 19세기 세계의 수도 파리를 연구했던 발터 벤야민의 미완성 텍스트이다. 여기에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는 입장이 근대 도시에 대한 이중성이다. 벤야민에게 근대도시는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그는 도시에 매혹되었으나 동시에 그 이면의 가혹한 진실을 파헤치고자 했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 폴리스]에서, 벤야민에게 대도시는 유쾌함과 희망의 출처이자 혐오감과 절망의 원천이었다고 지적한다.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자들처럼 도시를 흥분과 열광, 기분전환의 공간으로 간주했지만, 역사유물론자로서 그는 도시를 ‘생존투쟁과 계급투쟁의 경기장’으로 보았으며, 부르주아의 지배를 거부했다. 상점들이 죽 늘어서있고, 상점과 상점 사이를 잇는 유리 천정 아래로 길게 나 있는 도보인 파사주(아케이드)를 걸으면서 그가 분석한 것은 근대 도시의 축소판이자 결정판이다. 벤야민에게 그곳은 새로움과 혁신으로 가득한 현대성의 장소인 동시에,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라는 요술환등으로 불 밝혀진 미혹의 장소였다. 그는 파리라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도시에서 계몽의 절정을 본 것이 아니라 신화를 읽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역사주의나 진보주의와는 다른 맥락에 있으면서, 현대에도 새롭게 읽혀지는 철학자로 평가 된다. 특히 살아있는 인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시를 텍스트로 보고, 그것의 의미 해독과 읽기를 시도한 것은 현대 문화 비평의 선구자적인 모습이다. 그는 생산보다는 소비의 양식에 보다 중점을 두면서 거시적 관점보다는 일상을 지배하는 미시적 세계를 분석함으로서, 문화라는 패러다임으로 전면적으로 재편되어 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분석에 또 다른 차원을 열었다. 고대의 신전처럼 죽 늘어선 소비의 신전에서 새로움 속에 내재된 낡음, 혁신 속에 내재된 반복, 진보 속에 내재된 반동, 충격 속에 내재된 망각, 매혹 속에 내재된 억압을 찾아내는 고고학적 시각은 동시대에도 받아들일 만한 선구적 관점이다.
현대성과 지본주의의 축소판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도시의 산책자에게 새로운 시각적 패러다임을 안겨준 것은 사진과 영화였다. 사진과 영화는 그림이나 조각같이 공간에 얼어붙은 정적인 매체와 달리, 시간의 추이에 따른 역동적 방식을 제시했다. 이 새로운 시각적 관습의 기원에는 근대문화를 지배했던 거리의 구경거리가 있다. 이 구경거리는 대중과 대중문화를 낳았다. 19세기 파리의 시각문화에 대한 또 다른 연구자 바네사 슈와르츠는 [구경꾼의 탄생]에서 19세기 말엽 이 도시를 지배했던 쾌락으로 구경거리를 든다. 그에 의하면 당시의 거리 문화는 일상을 구경거리로 재현하고 구경거리로 짜 맞추었다. 포스터 같은 선정적 대중 출판물, 대중을 위한 무료 극장으로서 일상과 진부함이 충격적인 서사로 구체화되는 시체 공시소와 밀랍 박물관은 영화의 기원을 보다 넓은 시각문화의 일부로 고찰하며, 세기말에 일어났던 파노라마와 디오라마 열풍도 덧붙인다. 대중들이 모이는 근대도시는 전통사회를 지배했던 서사와 대화, 접촉 대신에 무언의 시선이 지배한 것이다. 현실은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대상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되었으며, 동시에 볼만한 것은 현대적 삶과 닮게 되었다. 슈와르츠는 시선을 감시와 소외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보이는 것을 즐기는 군중의 속성을 강조한다. 모든 사람들이 관찰의 대상이 된다는 푸코의 판옵티콘 모델--근대성 내부의 권력 기제를 상징하는--과는 달리, 도시의 스펙터클은 구경하라고 재촉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기 드보르)인 스펙터클에서 분리와 소외만을 보는 관점을 수정한다.
암묵적인 시선으로 이루어진 원형감옥의 모델이 근대의 감시권력을 넘어 현대 정보사회에 짙게 드리운 어둠을 예견하는 면도 있지만, 보다 유동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지는 의문에 붙여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의 유동성을 고찰한 [액체 근대]에서 시선의 교차를 통해 이루어지는 공간적 구속은, 그 장소에 일상화를 강제하는 자들 역시 묶이게 되는 비효율을 낳기 때문에 지양된다고 말한다. 요컨대 원형감옥은 돈이 많이 드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공간을 정복하고 이를 유지하는 한편, 감시받는 장소에 죄수들을 묶어두는 일은 방대한 규모의 값비싸고 부담스러운 행정업무들을 낳게 된다. 바우만은 감독관과 감독받는 자들 간, 자본과 노동 간, 지도자들과 추종자들 간 결속의 사라짐을 통해 원형감옥은 종말을 맞았다고 주장한다. 유체를 한 형태로 유지하는 것은 많은 주의와 끊임없는 감시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제 으뜸가는 힘의 기술은 도망가기, 미끄러지기, 생략하고 피하기의 기술, 또한 지리적으로 갇혀 있게 됨으로서 떠안게 되는 부담스러운 질서 유지의 책임을 효과적으로 거부하는 기술이다. 고체가 아닌 액체나 기체의 유동성과 이동성에서 공간보다는 시간의 흐름을 중요시한다. 근대의 고체적(공간적) 측면이 아니라 액체적(시간적) 측면은 보다 적합한 은유가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 오늘날 이윤을 창출하는 것은 생산품의 지속성과 오래 유지되는 신뢰가 아니라, 생산품의 순환과 재활용, 노화와 폐기와 대체 과정에서의 속도라고 말한다. 힘은 전자화된 신호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즉시성은 공간의 저항을 무화하면서 대상의 물질성을 용해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유동성은 마샬 버만이 [현대성의 경험]에서, 현대화된다는 것은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마르크스)고 인용한 바 있는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모더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러한 소용돌이를 자신의 리듬으로 만드는 것이다. 모더니스트는 이러한 ‘순간성과 우연성을 표현할 수 있는 자’(보들레르)이다. 모더니즘은 이러한 역동적인, 혹은 위기감에 가득한 시공간의 경험에서 파생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이 압축되고 가속화되는 과정’(데이비드 하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탄생했다. 모든 것을 코드화 시켜 흐르게 하는 도시라는 스크린은 세계화라는 공동의 무대를 전제로 한다. 경계를 넘는 기술과 자본을 매개로 하여, 점차 하나가 되고 있는 이 거대한 무대의 주인공은 사회적 권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면서 보편 역사를 전개해나간 자본주의이며, 이 무대는 항시적인 전쟁이자 축제로 채워진다. 도시는 이렇게 형성된 현대성의 전형적인 장소가 되었다. 예술가에게 도시는 벤야민에게 그러했듯이 사회적 총체성이 축소된 결정체로 간주된다.
물론 여기에서 총체성은 단선적인 발전과정이나 이 과정을 주도하는 유일한 집단을 전제하는 비전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도시를 이루는 핵심적 단편들의 집적이고, 도시 자체가 야기하는 매혹과 충격을 드러내는 있는 효과적인 병치에 더욱 가깝다. 그것은 관념화된 총체성도, 또 다른 현실이 되어버린 기표의 흐름에 매몰되는 해체적 시각도 거부한다. 도시를 성찰하는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편에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단자(monad)적 시점이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이 도시를 단자로 간주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도시에서 재발견된 각각의 요소들은 내부에 총체성을 포함하고 있는 모나드적 성격을 지니며, 몽타주의 소재가 된다. 현대적 삶의 충격은 이질적 단편들의 몽타주로 표현된다. 그에 의하면, 도시적 경험을 특징짓는 충격에 기반을 둔 몽타주의 원칙은 숨겨지고 잊혀 진 것들을 드러나게 하고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만들며, 꿈꾸는 집합체의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깨우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전망을 통해 주변적이고 사소한 것의 계기를 분석하면서 전체 사건의 결정체를 발견하는 통찰력은, 새로움의 외양 속에 반복적인 동일성의 생산을 낳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방식, 곧 상품물신주의의 비밀을 벗겨낼 것이다. 그것은 상품물신주의에 동승하면서 또 다른 소외를 낳는 현대예술의 오류 또한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계몽의 정점이자 또 다른 신화(강제, 반복, 물신성)를 지속시키는 도시를 겹눈의 시선으로 본 벤야민은 꿈꾸기와 꿈에서 깨어나기라는 두 가지 핵심적 범주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오늘날의 예술가에게도 필요한 관점이다. ‘꿈을 꾸는 것은 행동을 하기 위한 전주곡’(벤야민)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출전; 공간 6월호
이선영
#4803
도시의 산책자, 또는 고고학자
이선영
2010. 06. 30.
이선영
서울 출생
인명사전 바로가기 : www.daljin.com/author/3059
미술평론가 이선영(b.1965)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하였으며, 웹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1996-2006)과 [미술평단] 편집장(2003-2005)을 역임했다.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상(이론부문)(2009),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2014)를 수상 하였다.
미술평론가 이선영(b.1965)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하였으며, 웹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1996-2006)과 [미술평단] 편집장(2003-2005)을 역임했다.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상(이론부문)(2009),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2014)를 수상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