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에 있어서의 공동체

시각적 양식인 미술은 관람객이라는 존재를 가정한다. 개인의 작업실에서 작가 개인의 구상과 손길을 거쳐 완성된 산물인 예술작품은 대개 미술계 일원들이라는 소수에게 국한되어 소통 또는 유통된다. 물론 소수는 언제나 다수가 될 수 있으며, 미술계 내부로부터의 공적인 인정에 바탕 하여 좀 더 보편적인 맥락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분업화된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방식일 수 있다. 공공적인 소통을 중시한다고 하여 작가 개인의 세계나 솜씨가 무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술이라는 전문적인 제도 내에서 그러한 공적 인정의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는지, 거창하게 공공미술까지 안가더라도 미술작품이 생산되고 소통되는 제도들이 얼마나 공적인 방식으로 작동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미술관보다는 좀 더 불확정적인 공간인 공공영역에서 행해지는 미술은 통상적인 의미의 관람객과는 다른 집단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고 이 집단이 불특정 다수인 대중은 아니다. 기존의 공공미술은 정치,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다분히 소비자로서 규정되고 있는 대중을 겨냥했다.

공공영역을 광장이나 거리, 빌딩 앞 등 물리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일 때, 환경의 모양새를 전체적으로 틀 지우고 꾸미는 디자인이나 장식물 사업의 범주를 넘기 힘들다. 바야흐로 ‘선진국’ 같은 명품도시를 지향하는 마당에 훌륭한 장식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장식은 장식일 뿐이다. 장식이 부적절하고 과다하면 시각공해가 된다. 어떤 기념비적인 조형물이 자신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 소통의 지속성, 즉 공공적 상징성을 겸비하면 좋겠지만, 공공의 상징성이라는 것이 위에서 아래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수렴하고 공공의 요구에 대답하려는 이들에겐 기존의 기념비적 미술이나 장식물 사업과는 다른 소통 방식이 필요하다. 여기에 공공미술가들의 실험이 존재한다. 근자에 대안의 모델로 시도되는 프로젝트 형 공공미술은, 적지 않은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기적 전통사회를 벗어난 현대사회에서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공동체를 가시화하고 활성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코드와 코드 사이만을 움직이는 소통이 아니라, 몸과 몸이 만나는 쌍방향적인 소통을 지향한다. 권력과 자본이 아닌, 사회가 요구하는 소통 말이다.

쌍방향적인 소통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 워크샵이 수행되곤 한다. 이를 통해 작가가 대면하는 이들은 미적이나 정치적인 계몽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예술가 주체와 대별되는 집단적 대상이라는 근대적 사고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들은 작가와 마찬가지로 자율과 자치, 자유를 지향하는 개인들이며, 이러한 가치의 억압에 대해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통해 커뮤니티를 이루는 그들은, 근대적 과거와 같이 집단성을 중시하는 민중이나 대중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복수적 존재들인 다중(multitude)이다. 공공미술에 있어서 커뮤니티의 위상을 개진하기 위한 선결과제는 공공미술의 주체와 대상을 누구로 놓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공공영역이 담론화된 근대 이래로, 민족, 민중, 대중, 시민 등 많은 집단들이 거론되어 왔지만, 생산과 지배의 조건이 전면적으로 바뀌고 있는 현시대에 기존의 집단적 이미지는 실효성을 잃고 있다.

필자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의 개념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공공미술에 있어서 전제되어야 할 공동체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국민이나 민족 등으로 나뉘어 진 경계가 세계화된 자본으로 와해되어 가는 탈 근대적 체제, 즉 권력의 중심이 산재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새로운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다중은 네그리와 그의 공저자인 마이클 하트, 펠릭스 가타리 등에 의해 부각된 바 있다. 다중은 자율적 개체들이 민주적으로 연대하며, 인간과 인간 사이를 넘어서 인간과 기계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자체의 역량을 확장해 나간다. 다중은 대안의 공공미술이 강조하는 공동체와 참여라는 가치의 주체로 설정될 수 있다. 이들은 공동의 조직화를 통해서 자신들의 자치와 자율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제국의 지배에 저항한다. 이 지배는 위와 아래,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도처에서 인간의 산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변화시킴으로서 착취와 소외를 새로운 단계로 지속시킨다.

네그리는 진공 속에서 행해지는 죽은 노동과 충만 속에서 행해지는 산 노동을 대조한다.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 예술 활동에 기대되는 바, 소외로부터 해방이라는 지고한 이상과 달리, 예술 역시 죽은 노동으로 강등시키려는 끊임없는 압박이 있으므로, 예술가 역시 다중과 공동의 운명에 처해있다. 커뮤니티로 가시화되는 이러한 공동의 운명체에서 다중의 결속은 내재적이다. 그는 [혁명의 시간]에서 다중이 존재의 가장자리에서 특이성, 생성, 변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그 가장자리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특히 자본의 힘이 전체 사회의 힘을 포괄하게 되는 삶정치의(biopolitical) 장에서 예술가는 정당이나 전문정치가를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제도적 정당은 항상 삶정치적 결정을 배제하는 권력의 공간 내에 국한된다. 반면에 새로운 주체는 삶정치적인 것의 산물인 동시에 삶정치적인 것 속에서 특이성을 생성한다. 탈근대의 다중은 특이성들의 집합이다.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이 복수적이라면, 특이성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협동적이다.

탈근대의 다중은 죽은 노동을 지배하는 하나의 척도로서의 시간성에 대해, 시간의 측정 불가능성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며 그 속에서 스스로를 구축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정치와 노동과 예술 사이에 그어진 고전적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 이전처럼 전위와 대중이 아니라, 집단적 주체 앞에 놓여진 공통적 과제가 있다. 하나의 중심은 다중심주의로, 전유는 차이들의 협동을 통한 새로운 힘의 창조로 변모된다. 그것은 세계화된 하나의 코드를 욕망하게 하며 공통의 척도로의 환원을 요구하는 구조적 권력에 대항하여 함께 결정하는 사건이다. 참여와 공동체를 중시하는 대안의 공공미술은 권력의 타자가 된다. 그것은 다수를 하나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생성, 중심이 아닌 지역성, 척도가 아닌 측정불가능성, 법이 아닌 실재성, 대리만족이 아닌 직접적이고 활동적인 경험을 중시한다. 그것은 이질성과 고유성이 보존되는 특이성(singularity)으로서의 개인을 전제한다. 특이성은 삶을 고정된 틀에 맞추려는 시도에 대한 다중의 저항으로, 대안의 공공미술은 이 특이성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가령 이주노동자 등과 연합하는 공공미술에서 나타나듯이, 가장 특이한 몸은 가장 공통적이다. 네그리에 의하면 특이성은 항상 공통적인 것을 지향하며, 공통적인 것은 특이성의 산물이다. 그리고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의 번성으로부터 생겨난다. 저항이 바로 이 과정에 놓여있다. 저항은 특이한 동시에 공통적인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그 위에 혹은 그 너머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구축된다. 다수의 특이성들이 행하는 산 노동은 서로서로 항상 변화하는 관계를 맺게 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역할은 초월적 창조자가 아니라, 다양한 기원을 가지는 것들을 연결하는 매개자가 된다. 매개자는 수신자를 향하여 일방적인 정보를 발신하는 꽉 차있는 존재가 아니다. 매개자로서의 작가는 작품의 다양한 기원을 자신뿐이 아니라, 다중에게 수렴시킨다. 여기에서는 최종적 산물보다는 다중을 이끄는 생산 작업이 중요하다. 그것은 작품의 수동적인 소비가 아니라, 생산에 같이 참여하는 능동적인 실천을 요구하며, 이로서 공동체는 스스로를 생산 속에 위치시킨다.

출전; 금천예술공장 커뮤니티 아트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