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시립미술관 Next Code 2010

1. 신성호 ; 생산양식과 정보양식 사이에서


신성호가 금속 용접으로 만든 동물과 식물 같은 자연물에는 엄청난 노동량이 집적되어 있다. 자연자체에 내재된 리얼리티가 노동을 통해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자연이 아니라, 인공물이다. 그가 조각의 재료로 사용하는 금속은 자연으로부터 추출되어 정련을 거치며 문명의 토대가 된다. 금속은 도구이자 무기로, 권력 투쟁으로 점철된 인간 사회와 역사의 명암을 형성해 왔다. 인간 사회와 역사의 무대에서 금속의 강함은 속도와 결합하여 경쟁을 확대 재생산한다. 그것은 또한 연금술사나 예술가의 재료가 된다. 신성호가 만든 금속의 자연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을 탄다. 가령 철사를 용접해서 만든 개는 퇴적층처럼 녹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화 된다. 예외적으로 FRP로 만든 코뿔소는 플라스틱 상품처럼 찍어내는 자연을 상징한다. 동판조각을 용접해서 만든 나무에 가지 끝에는 버려진 전자부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의인화된 개가 멜랑콜리를 자아내듯이, 부품들이 열리는 나무는 자연의 순수함이 침해된 모습으로 보인다. 그가 작업하는 환경은 다섯 가구 밖에 살지 않는 산 속인데도 엄청난 폐기물들이 나온다고 한다.

작품 소재인 폐 계기판 역시 거기에서 수집된 것이다. 침해된 자연은 그 재료가 자연 속에서 발견 되는 과정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생체공장처럼 조작된 자연 같은 괴상한 모습이다. 한편 계기판에 빼곡히 새겨진 정밀한 회로들은 마치 도시나 기계의 설계도처럼 문명의 질서에 아로새겨진 아름다움 역시 보여준다. 신성호의 작업은 문명 비판적이면서도 그것에 매혹되는 지점, 또는 부정에서 긍정을 길어 올리는 양가감정이 내재해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연과 인공 간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이상적 지점을 지향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노동을 통해 자연적 대상을 변화시키는 이성적 주체라는 근대적 모델(생산 양식)과, 난데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탈 인간화 된 허상적 사물(정보양식) 사이에 벌어진 간극이 화해되지 않은 채 병치되어 있다. 그것은 ‘자연적 기호를 재현하는 예술적 행위’와, ‘정보적 시뮬레이션으로 변화하고 있는 인류의 소통구조’(마크 포스터) 사이에 놓인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이 반영된 것이다. 간극과 지체는 관념이나 개념에 의해 애써 무마되지 않고, 현 단계 예술문화의 증후들로 나타난다.




2. 김훤환 ; 자기 지시성의 역설

보는 순간 웃음을 자아내는 김훤환의 그림 속에서 발생하는 것은 역설의 연속이다. 동물이 그려진 천이 천을 먹는 [나를 먹다] 시리즈와, 캔버스 안의 사람이 자신이 속한 공간 전체를 미는 [나를 밀다] 시리즈는 자기 지시적인 현상에 주목한다. 작품 [맛있는 식사]는 ‘먹다’와 ‘먹히다’가 동시에 발생한다. 천에 속한 그림이 천을 먹는 것은, 작가 말대로 ‘불가능한 상황이며 자살행위’이다. 그의 작품에서 계속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역설의 순환 고리가 자화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자기 지시성은 모더니즘 미학에서 미술작품의 자율성을 위해 지시대상과 형식을 분리시킨 결과이다. 그것은 주류 미술사에서 추상미술로 귀결된 바 있다. 이러한 흐름은 지시대상과 기호, 그리고 기표와 기의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미술작품을 개념적 유희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논리적 유희 한편에 감성이나 메시지라는 측면은 간과되기 마련이었다. 김훤환은 모더니즘에서 금기시된 지시대상을 불러들어 역설의 유희를 구체화하고 풍부하게 한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재미난 아이디어에 의존하는 그의 작품은 동어 반복적인 시리즈로 귀착된다.

지시대상이 완전히 사라지는 단계에서 벌어지는 대상과 기호 사이의 유희는 ‘표면의 밀고 당김’ 같은 식의, 모호함에서 시작되어 모호함으로 끝나는 수사학을 낳았을 뿐이다. 결국 엄밀한 논리적 규정으로부터 시작된 자기지시성은 모호한 주관성과 장식적인 표면으로 귀결되었다. 물론, 자기 지시적 성향을 가진 모더니즘은 신학, 역사, 문학 등과 잡탕이 되어 함께 흘러가던 미술을 정화시킨 공로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화의 과정에서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도 흘려버린 오류가 발견된다. 예리하게 시작된 미술의 논리적 흐름은 갱신하지 않으면 안 될 근대적 유물로 전락한 것이다. 자기지시성은 미학적인 현상에 한정되지 않고 전체 사회로 확산되며, 특히 매체를 매개로한 소통에서 여전한 힘을 발휘한다. 자기지시성의 문제는 미학이 아니라, 삶 속에서 비로소 거대 권력으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한다. 구조를 재생산하고 유지하는데 급급한 자기지시성은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에게는 질곡으로 다가온다. 화가인 김훤환은 자신의 삶의 조건으로부터 자기지시성의 문제를 풀려한다. 캔버스 안에서 그 경계선과 면을 밀려는 행위에는, 아무리해도 그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적 상황이 드러난다. 작가 주장대로 ‘역설은 인간 삶의 조건’이지만, 그 안에 안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밀기 시리즈에서 경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데, 경계의 확인은 그것을 넘기 위한 예비단계라는 의미가 있다.

3. 김미소 ; 폐허에서 일궈낸 예술가의 정원

김미소의 작품은 버려진 전구에서 발견한 생명력에서 비롯된다. 시골출신인 그녀는 버려진 물건이 많은 장소에서, 필라멘트가 끊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햇빛에 반응하여 빛을 반사하는 전구를 발견한다. 알전구는 에너지 활용이라는 면에서 비효율적이어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구식 물건이지만, 작가에 의해 수집되어 또 다른 생명의 주기를 시작한다. 알전구들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사물로, 그녀가 시도한 생명과의 유비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 작가는 전구를 강렬한 생명의 빛으로 재탄생시키려 한다. 스스로를 ‘버려진 생명을 책임지는 정원사’로 간주하면서, 작품 [안전한 곳]을 정원처럼 꾸민다. 빛에 반응하는 전구 유리는 마찬가지로 빛에 강하게 의존하는 식물로 변형된다. 일정한 형태를 가지는 알전구는 일종의 형태소가 되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합되어 한 장소를 온통 차지하는 에너지의 장, 즉 정원을 이룬다. 무리 지은 전구의 묶음인 [다발]이나 전구에 형광 안료를 칠해서 빛나게 한 작품 [꽃다발]은 버려진 전구에서 받은 최초의 영감이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하는지를 알려준다. 빛에너지로 구동되는 많은 작품은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지므로, 설치과정 중에서 깨지고 부서지는 것도 작품에 모두 포함된다.

영상까지 가세한 전시장은 정원이자 무대로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언뜻 화려한 조명기구 디자인처럼 보일법도 한 김미소의 작품은, 소재인 전구의 상징성으로 인해 초현실주의가 공존한다. 기나긴 인류 역사에서 전기가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발명품들은 매우 짧은 삶의 주기를 가지고 있어서, 금 새 골동품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언제나 변함없이 푸릇한 자연과 달리, 인공적 산물은 곧 낡아질 새로움을 태생적 운명처럼 가진다. 삶의 무대에서 사라지려는 사물들은 애초의 기능을 잃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한켠에서 새로운 사물이 생산되는 와중에 다른 한켠에서는 폐기되고 있다. 이러한 이중의 움직임 속에서 초현실주의의 오브제 미학이 탄생했다. 작가는 이 폐기의 현장, 곧 폐허에서 시적인 사물들을 건져낸다. 말하자면 김미소의 작품은 폐허에서 일군 정원이다. 새로움의 전통을 이루는 현대성은 그 한편에 지속적인 쇠퇴를 짝패로 가진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물은 원래 그것이 상품으로 탄생했던 순간을 소격시킨다.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묘사한 근대 도시 파리의 풍경처럼, 한 때의 유행은 기묘한 잡동사니가 된다. 문명의 잔여물 속에서 발견된 생명력은 단지 문명의 부분을 장식하는 것에 머무는 아니라, 문명의 실체에 대한 깨달음을 야기하는 알레고리를 각인한다.




4. 이원경 ; 강함과 약함의 변증법

이원경의 작품은 범주와 분류체계의 혼돈을 야기하는 기이한 생명들로 가득하다. 모호함은 작품의 질감에도 관철되는데, 종을 확정지을 수 없는 생물체들은 철사로 뜨개질 되어 있는 듯한 형상이 그렇다. 철사로 엮은 생물체들은 부드러움과 뻣뻣함을 교차시키며, 종간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접합시킨다. 생물과 사물의 조합, 가령 단단한 도구들에 동물의 털을 입힌 작품 [tool animal]은 작가가 대조시키고자 하는 주요한 범주를 알려준다. 그것은 강함과 약함이다. 작가는 인간관계나 사회현상을 지켜보면서, ‘강함과 약함의 정의가 언제나 그러한가?’에 대해 회의한다. 그녀에 의하면 강/약의 특성이 절대적이지 않다. 강/약에 대한 판단을 성급히 내리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 이미지의 상부는 못이고 그 아래는 뿌리처럼 보이는 한 작품은 아래가 흐물흐물하기 때문에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구의 도구이면서, 식물에다가 동물의 전형적인 특성인 털을 이식시킨다. 한 대상에 두 개의 이미지나 성격을 부여한 것이다. 혼돈을 야기하기 전의 범주는 비교적 정확해서, 경계가 위반됨으로서 드러나는 낯설음은 절대적이지 않고 내재적이다.

위반을 통해 복귀된 타자는 신과 같이 초월적인 타자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된 억압된 타자들로 나타난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정의하듯이, 친근한 것 속에서 드러나는 기괴한 것(the uncanny)이다. 이원경의 작품에서 강함/약함의 이항 대립적 대조군에 하위 범주로 따라오는 것으로 부드러움/단단함, 동물/식물, 동적/정적 등이 있다. 작가는 대조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지점까지 형태와 범주의 조합을 진행한다. 이원경의 작품에서 논리적 꼬리 물기는 출발과 다른 결과를 낳곤 한다. 커다랗게 설정된 이항대립은 하위 범주로 세분되면서 그 내부로부터 붕괴(내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차이가 뒤섞이는 장이라는 점에서 괴물이다. 경계와 범주가 위반되는 괴물은 성스러움과 비천함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것들은 초능력이면서도 무능력의 담지자인 것이다. 범주와 경계의 위반을 일삼는 불경한 예술은 늘 괴물과 친숙했으며, 혼돈이자 변신을 향하는 이 흐름은 유희와 도전을 동시에 수행한다. 특히 강함/ 약함이라는 대조 항은 지배적 권력과 그에 대한 저항과 밀접히 관계되기 때문에, 유희보다는 도전의 의미가 더욱 강하다.

5. 조경란 ; 권력의 표면에 대항하는 비중심적 체계

모든 것을 판매 가능한 품목으로 환원하여 시장에 유통시키려는 현대 사회에서 자본은 가장 큰 권력으로 부상한다. 조경란은 인간들이 그러한 자본이 만든 표면에 살고 있다고 본다. 육체와 무의식 등, 그렇게 될 수 없는 것들까지도 모두 등질화 된 표면에 배치시키는 이 거대한 권력의 망을 적나라하게 가시화하고, 이에 저항하는 또 다른 표면들을 생성시키는 것이 그녀의 작업이다. 가령 조경란은 널찍한 장소를 차치하는 관공서와 그 주변의 조경공간을 원근법적 조망으로 포착하고, 폐 우유 곽에 식물을 심어 잡초 광장을 만들어 이에 대조시킨다. 탁 트인 광장 한 가운데에 제국적 이미지로 솟아있는 건물은 감시하는 자들은 숨기고 감시당하는 자들만을 부각시키는 컨트롤 타워를 닮았다. 감시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관찰대상들은 해야 할 행동과 아닌 행동으로 나뉜 규범에 따르며 정해진 궤도를 통과할 뿐이다. 반면 올망졸망하게 연출된 인간적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대화와 생각에 잠긴다. 작가는 관공서 주변의 텅 빈 잔디밭이라는 매끄러운 표면을 갈아 업고 말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복합적 표면으로 만든다. 시민들로부터 나온 권력이 시민 위에 군림하는 관료적 체계는, 노동자로부터 나왔지만 노동의 흔적을 지우는 물신적 체계(상품)와 유사하다. 모든 것이 정해진 자리에 놓여 있어야 하고, 자연 조차도 단지 보여 지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공간은 지루하고도 억압적인 유토피아일 뿐이다.

이에 대항한 잡초의 정원은 들쭉날쭉하지만 자생력이 있으며, 특이성(singularity)을 보존한다. 그곳은 이질적인 공간, 즉 헤테로피아이다. 화해와 조화보다는 모순과 갈등이 두드러지는 조경란의 작품에는 억압하는 지배자와 억압당하는 피지배자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공간구조 자체에서 그러한 대조적 지점을 읽어낸다. 일상 공간을 특징지우는 탁 트인 공간, 맨질맨질한 표면, 조율된 색감은 여지없이 문제시 된다. 권력이 그것에 거슬리는 장애물 없이 쉽게 관통하기 위해 필요한 표면화는 코드화와 밀접하다. 동질화하려는 힘이 인간 삶의 안팎을 식민화한다. 이에 대응하는 작가의 방식은 촉각적이다. 말하자면 매끄러운 권력의 공간을 부식시키고 거기에 이물감을 부여한다. 부동산 광고 전단을 구겨서 촬영하고 인화한 작품 [땅 그림]은 유토피아 같은 매끄러운 표면에 균열을 내고 그 가상성을 깨려 한다. 전단지들이 끼워지는 신문은 작가가 설정한 임의적인 원칙으로 다시 배열된다. 자못 공정하고 객관적인 논조 뒤에 추악한 권력에의 의지를 감추는 신문에서 기사의 프레임을 분절구조화(articulation) 하고, 뿌리줄기처럼 연결시켜서 고착된 위계질서로부터 탈주가 일어나는 자유로운 표면으로 각색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지배적 서사에 대항하는 또 다른 서사들을 일궈낸다.

출전; 대전 시립미술관 신진 작가 워크숍 Next Code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