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과 편집에 기반 하는 장석준의 작품은 무한대의 용량으로 찍고 보관하고 버릴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녀가 도시를 이루는 다양한 풍경의 유형들을 찾아서 스펙터클하게 구성하기 시작한 때가 2004년이며, 요즘은 유형을 공시적으로 배열하는 것을 넘어서 서사, 즉 통시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최근 작품 [거리의 명암화](2010)는 커튼이나 장막처럼 드리워진 주황색 포장마차의 표면에 어른거리는 기물과 사람들의 실루엣을 강조한 작품이다. 좌우로 길게 늘여진 장면 안에 배치된 포장마차 안의 사람들은 무대 막 뒤의 배우처럼 서사의 주인공들이 된다. 유형별로 분류된 파편들에는 이야기가 이미 내재되어 있는데, 요즘 작품은 그것을 전면한다.




표면을 뚫고 시간과 논리를 부각시키면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주목하는 요즘 작업들은 사진에서 영상으로 매체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시의 탐사를 통해 반복적 유형들이 찾아내는 과정 속에서, 그 곳에 살고 있는 인간의 삶들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작가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동네 곳곳을 탐사하며, 그렇게 수집한 자료들을 가지고 대상별로 폴더들을 하나씩 생성시킨다. 그것은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한 디지털 아카이브가 된다. 장석준이 주목하는 대상들은 그럴듯한 기념비나 랜드 마크가 아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벽, 계단, 난간, 돌담, 창문, 문 같은 서민적 주거지의 구조로부터 러브호텔의 주차장 가림 막이나 사창가의 가게 같이 소비사회의 유흥문화가 압축된 장소에 이르는 광범위한 폭을 가진다.





대부분 오래된 것, 시간의 시험을 거친 것, 그리고 시간에 의해 파괴되고 있으며 갱신되는 것들이다. 어떤 시기에 수행된 정책의 진열장이라 할 수 있는 도시 풍경들은 시간의 흐름이 가속화되는 현대성과 맞물리면서 공적/사적 영역을 넘나드는 삶의 복합적 흔적들로 남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문화 생태계에서 서민, 시민, 대중, 민중 등에 의해 선택되고 변형되는 유형들이 작품의 출발점이 된다. 장석준이 주목하는 것은 확고한 존재감이나 실체감이 아니라 삶의 경계들에 걸쳐있는 주변적인 것들이지만, 작품을 통해 주변적인 것들을 전면화한다. 이렇게 전면화 된 풍경 속에서 관객들은 문화 생태계의 무의식을 이루는 반복적 유형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삶을 이루는 영원불멸의 보편 법칙이나 질서를 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장석준의 작품에서 같은 유형들의 반복은 동일성의 재현이 아니라, 미세한 차이와 간격이 유지된다. 그것들은 사회의 지배적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위로부터 아래로 부과되곤 하는 동일한 재현의 질서를 파괴하는 시간의 흐름이 내포되어 있다. 가령 주택구조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작품들에서 급조된 서민정책의 산물인 판잣집들을 미화하기 위해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칠해진 벽들은, 자연적인 풍화작용과 인위적 덧칠 등을 통해 파생된 다양한 변형 물로 나타난다. 작품 [흰색](2007)에서 3미터 길이로 펼쳐진 다양한 계조의 흰색 벽들은 근현대의 건축사에서 등장했던 ‘원조주택’들에서 수집한 것으로, 지금은 재개발에 의해 사라져 가는 풍경들 중의 하나이다. 사라져가는 풍경 속에서 사진의 증거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사진도 그림 못지않은 가상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사진에 기대되는 바의 객관성은 그림의 그것과는 다르다. 사진 자료는 언젠가, 또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통해 설득력이 부여된다. 장석준의 작품 재료는 스스로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며 직접 수집되었다는데 의미가 있으며, 다른 것은 섞지 않고 최대한 찍었을 때의 상태를 유지한다. 파편들의 재편집은 원래의 스냅사진 상태가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조율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사진을 자료로 삼아 그림을 그리는 식의 작업에 비해 차이들이 보존된다. 하나하나의 구체성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유형들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조형성이 특징적이다.

사진은 그 탄생부터 근현대미술가들에게 스케치와 드로잉의 대용품으로 자리 잡았지만, 장석준의 작품에서는 사진적 특성이 감추어지지 않는다. 한번 나갔을 때 수백장씩 찍어오곤 하는 사진들에 담긴 대상들은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빈약한 상상력의 산물인 가상과 환상을 넘어서, 사실이 주는 압도성이 있다. 그러나 어떤 도식에 근거한 재현주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얇은 파편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작품들은 재현에 근거한 모상이라기보다는 시뮬라크르에 가깝다. 미묘한 차이의 계열로 끝없이 이어지는 것들은 닫혀진 재현의 총체성과 거리가 있다.

더 나아가 작가는 재현주의에 내재된 위계질서를 거부한다. 작품 [평평을 위한 돌](2009)은 언덕이 많은 성북동 지역에서 수집한 돌담들을 담은 작품인데, 큰집이나 작은 집이나 공용의 구조를 이루는 돌담에서 작가는 삶의 평등성을 간취하며, 바닥에 깔고 앉아 모여 담소할 수 있는 구조로 재생산한다. 계속해서 회귀하는 형태들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정의한, 차이의 고유한 역량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계속되는 불일치, 우연성, 다양성, 생성 등을 긍정한다. 장석준의 작품에 내재된 차이는 [차이와 반복]에 정의된 것처럼, 재현주의의 근거를 이루는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개념 없는 차이 즉 반복이다. 공간들의 변이로 가득한 작품들은 차이와 분화의 역량으로서의 반복이다. 그것은 개념 안의 동일성 형식에 의해서도 재현 안의 유사한 것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는다.

반복이 동일성을 통해 이해할 때, 반복은 재현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2미터 또는 3미터, 또는 그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그 내부를 메우는 반복은 차이로서의 운동이다. 그것은 반복이 자기 안에 차이들을 포괄하면서, 하나의 특이점에서 또 다른 특이점으로 직물처럼 짜여나가는 방식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이러한 반복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순수한 힘들이며, 공간 안에서 용솟음치는 어떤 역동적인 궤적들이다. 그것은 재현의 동일성과 일관성에 대립하여, 계속되는 불일치와 무질서의 유랑을 받아들인다. 장석준이 주목하는 대상들은 도심 재개발이나 재정비 사업으로 수집된 대상이 편집되고 작품으로 재생산되는 이 순간에도 계속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은 잃어버린 시공간을 찾는 반복적이고 끝없는 추구가 된다. 거기엔 자의반 타의반으로 파괴되고 있는 와중에 지속적으로 회귀하는 것들이 있다.

비록 처음에는 대규모 정비 사업이나 디자인 정책으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거주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선택된 것만이 흔적으로 남는다. 작가는 ‘서민들이 선택해서 발전하는 형태’에 관심을 가진다고 말한다. 오래된 동네 일수록 자생적으로 생성된 구조들이 많이 남아 있다. 너무 흔해빠진 것이 되어 아무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일상의 파편들은 현대적 삶의 표준화의 결과물이지만, 시간이라는 변수는 천편일률적 삶에 차이를 발생시킨다. 이 일상적 삶에서 끌어내어진 작은 차이들은 반복을 통해 유희한다. 이를 통해 ‘현대 문명의 실질적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가상과 신비화들을 미학적으로 재생산’(들뢰즈)한다.

청계천이나 왕십리 등에 있는 오래된 공구 상가에서 문을 열기 전 새벽에 가서 찍은 푸른 색 셔터 문들로 만들어진 [하늘](2006), 싸구려 여흥문화를 운동회나 소풍 전날의 설레이는 감정으로 고양시킨 [꽃마차](2007)와 [서커스](2009), 뉴질랜드의 공장지대의 알록달록한 이미지를 고딕 건물의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로 승화한 [토이 랜드](2009)등은 계속 이어지는 것에 불과한 일상과 그것 내재된 정적이고 평범한 반복을, 공존하는 반복 즉 동적이고 독특한 반복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부정 없는 차이의 개념, 차이가 부단한 탈 중심화와 발산의 운동에 놓여있는 장석준의 작품에서 반복은 ‘차이의 분화소’(들뢰즈)가 되는 것이다.

출전; 금천 예술공장 입주 작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