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기에는 생과 사, 아름다움과 추함, 쾌락과 고통 같은 역설적 감정이 교차한다. 먹히기 위하여 자연적 형태가 재구성된 식재료 위에 양념처럼 첨가된 화려한 문양은 역설적 경계 위에서 충격과 의미를 낳는 그로테스크의 미학과 관련된다. 낯설음과 익숙함 사이에 설정된 미묘한 경계 위에 인간의 몸이 끼어든다. 제작 방식은 투명한 판에 데칼코마니를 만들어서 사진을 찍고 그것을 배열된 식재료 위에 프로젝터로 투사하여 다시 사진을 찍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데칼코마니는 여러 연상 작용을 낳는 얼룩들이지만, 삶과 죽음이 짝패처럼 얽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식적 장치가 된다. 작가는 요리를 하면서 식재료에 양념을 바르다가 그 과정이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는 작업 과정과 유사함을 생각했다. 뱅어포에 고추장을 바르고 배추절임에 고추 양념을 하는 느낌으로 식재료에 문양을 넣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초반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였다. 예원, 예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지만 미대가 아닌 생물학과에 진학하고, 국내외의 대학원에서 다시 사진을 전공한 이력에 요리를 담당했던 주부로서의 역할까지 가세하면서 특이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산물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윤진영의 작품에는 과학적 분석과 심미적 상상력, 그리고 실생활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발상들이 종합되어 있다. 작품들은 재료 선택 과정부터 특이해서, 따로 조작을 하지 않은 거의 스트레이트로 찍은 것도 매우 낯설게 다가온다. 개체가 떼로 뭉쳐진 채 납작하게 압착되어있는 뱅어포나 쥐포 같은 것은 단지 사진으로 확대하여 주목의 대상으로 만든 상태만으로도 특이하다. 우주에 흩어져 있는 별이나 미지의 혹성처럼 보이는 그것들에는 선택된 재료들 자체가 주는 압도적 느낌 또한 보존되어 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갖가지 엽기 사진들이 디지털 차원의 조작을 거친 것이 많다면, 윤진영의 작품에서 조작은 아날로그 차원에서 거의 이루어진다. 이미 생명을 잃고 자체의 힘으로 형태를 유지하기 힘든 물컹거리는 식재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형태와 질감, 색깔을 최대한 살려 배치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물질 자체에서 발생하는 느낌은 코드의 합성만을 통해 이미지를 산출하는 것과 비교될 수 없는 생생함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전의 작업에서, 생선 내장을 꺼내 배치하는 것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즉물성과 우연성을 살린다. 생선이나 김치를 재료로 한 작품에서는 컴퓨터상에서 대칭의 조작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조작은 재료의 물성에 내포되어 있는 본래의 색채와 형태에서 야기되는 기괴함을 부연하는 차원이다. 김치는 예외적으로 식물적 재료이지만, 젓갈에 의해 숙성된 재료이며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감, 그리고 생선 눈과의 결합을 통해 또 다른 생명체(또는 사체)로 변신한다. 한국인의 대표적인 양념색인 붉은 색조는 생명의 재료들에 담긴 죽음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식재료는 그자체가 일종의 시체이며, 소화되고 배설되며, 방치되면 쉽게 상한다. 시각에 의존하는 사진에는 냄새라는 차원이 생략되어 있지만, 작품을 위해 생선 쓰레기통을 뒤지고, 특히 신선도를 유지하는 시간이 짧은 한여름에 죽음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재료들과 씨름하는 과정은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각종 젖갈, 마른 멸치와 새우, 뱅어포 같이 자잘한 재료들은 인간에게 쉽게 섭취되기 위해 많이 가공을 거친 것이며, 그 위에 새겨진 데칼코마니 무늬는 관객의 심리상태에 따라 다양한 연상을 낳는다. 꽃잎처럼 보이기도 하는 돼지 껍데기, 얼굴 또는 변기 모양으로 배열된 문어들 위에 새겨진 무늬와 색감은 원재료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통닭이나 돼지 다리 같이 대략 형태를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재료에 투사된 무늬는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여, 가면이나 사람의 얼굴, 인형 같은 모습이 떠오른다. 윤진영의 작품에서 공통적인 식재료 위에 투사된 물감자국은 또 다른 생명을 위한 죽음이라는 역설과. 명확한 경계를 와해시키는 체액의 비유를 통해 동시대에 첨예하게 제기되고 있는 몸의 담론과 만난다. 이번 전시의 작품은 생선 적출물들이 난무하던 이전 작품보다는 ‘얌전한’ 편이지만 이전부터 유지해온 주제의식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의학 사진이나,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19세기의 사후 사진 등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러한 관심은 명확히 구별되어야 할 삶과 죽음의 범주를 혼란시키는 그녀의 작업과 이어진다. 인간에게 보는 즐거움은 생의 아름다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근대 이전의 공개처형장이나 근대의 시체 공시소 등에 몰려든 구경꾼들을 특징 지웠던 것은 나의 살아있음을 확인시키는 타자의 죽음, 나의 정상을 확인시키는 타자의 비정상이었다.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쾌와 불쾌를 나누는 경계선은 확실하지 않다.
경계를 흐리는 윤진영의 작품 속 이행적 대상(transitional object)은 오염된 음식물이나 배설물을 떠오르게 한다. 문명과 주체를 세우는 규칙에 의해 배제되는 비천하고도 공포스러운 대상들이 작품의 전면에 배치된다. 공포와 비천함(abjection)이라는 주제를 연결시킨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힘]에 의하면, 앱젝트란 ‘정체성, 체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 경계, 위치, 규칙을 무시하는 것’이다. 오물, 쓰레기, 고름, 체액, 시신 등은 모두 앱젝트이다. 앱젝트는 인간 생활과 문화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배제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압젝션을 초래하는 것은 청결이나 건강의 결핍이 아니라, 정체성, 조직, 질서를 방해하는 일이다’ 앱젝션은 내부에 있는 것인지 외부에 있는 것이지 모호하기에 위협적이며, 위협적이면서도 매혹적이다. 주체와 문명을 위해 배제해야 하지만 뗄 수 없는 이면을 이루는 것이다. 윤진영의 작품에서 음식의 본질을 벗어나는 어중간하고 미결정적인 존재는 경계와의 불안한 관계를 드러낸다. 비천한 것은 문화의 상징적 질서와 초자아에 의해서 밀려난 것이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사회와 주체의 동일성이나 정체성을 끊임없이 위협한다. 비천함은 삶의 종말인 죽음이나 죽음을 앞당기는 병의 이미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출생으로부터 시작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원형적 비천의 체험은 모체로부터의 난폭한 축출이라고 할 수 있는 출생자체의 체험이다.
전문 요리사가 아니라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는 적출물들이 등장하는 윤진영의 이전 작품들에서 비천과 출산의 이미지는 보다 직접적이다. 문어 몸에서 꺼낸 내장들이 죽 배열된 2004년의 한 작품은 살아있거나 이미 죽은 태아 같은 느낌을 준다. 어떤 경계와 한계를 터뜨리고 분출되듯이 태어나는 생명의 이미지는 죽음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인간의 상상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여성에게 비천함(그리고 매혹)의 이미지는 멀리 떨어져 있던 적이 없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방식 자체 때문에 순순히 승화될 수 없는 타자화 된 여성이 사회의 지배적 상징체계에 의해 배정받은 자리이다. 식재료 위에 투사된 데칼코마니는 시뮬레이트된 체액을 연상시키며, 몸의 안과 밖을 뒤집는 배설적 체험을 야기한다. 그것은 역겨우면서도 카타르시스를 야기한다. 비천함에 대한 크리스테바의 논지는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의 오염의 상징체계에서 끌어온 것이다. 상징으로 이루어진 문화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순수와 오염을 나누는 경계선인데, 그것은 위반되기 마련이다. 윤진영의 작품에서 식재료로 환원된 것들은 종이 모호하며, 여기에 덧입혀진 또 다른 피부(데칼코마니 무늬)는 고유의 육체에 대한 경계를 와해시킨다.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개체의 경계가 오염됨으로서 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상징체계가 위협받는다.
메리 더글라스는 오염의 중심에 신체를 놓으며, 모든 오염의 상징체계의 초점이 육체인 것처럼, 오염의 관념이 도달하는 궁극적 문제는 육체의 붕괴라고 말한다. 육체의 경계를 확정짓는 것은 건강이나 정체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종교나 정치 등 사회질서의 근간이 된다. 가령 종교적 신성함은 천지창조를 할 때 범주를 명확하게 구별할 것을 의미한다. 성서는 가축의 종을 섞지 말 것은 물론, 무늬를 넣는 것도 금지한다. 메리 더글라스에 의하면 성스러움은 분리해야 할 것을 분리하는 문제에 속한다. 각기 다른 범주의 사물이 뒤섞이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성스러움은 개인과 종의 통일이며 완전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어진 체계나 계열에 일치하지 않는 요소들이 늘 있기 마련이다. 경계선이 불확실한 곳에서는 언제든지 오염의 관념이 출현하지만, 경계선 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위험과 접촉하는 것이고 능력의 근원에 존재하는 것이다. 종교와 예술이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성스러움/ 불경, 순수/오염, 유혹/역겨움의 범주 구분이 모호한 영역들이다. 종교에서 부정한 것, 즉 오물과 피는 정화작용으로서의 희생제의와 늘 연결되어 있었다. 모호함에서 시작되어 모호함으로 흘러가곤 하는 예술에서 추함은 아름다움과 분리될 수 없이 얽혀 있다. 종교나 예술의 체험에 의해 범주들 자체가 상대적이며, 반대되어 보이는 것들은 한 실체의 이면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윤진영의 기괴한 작품은 경계지울 수 없는 것을 경계지움으로서 확립된 미의 자율성의 이전과 이후, 즉 전(前)현대적이고 탈(脫)현대적인 감수성에 속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