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구 전 (5.6 - 6.17, 두산갤러리)

이형구는 이 전시에서 다양한 동물에 대한 안구 추적(eye trace) 장치를 선보인다. 그러나 전시장에 뜨문뜨문 놓여 있는 것은 인간도, 동물도 연상시키지 않는 괴상한 기계장치들처럼 보인다. 현대의 인간은 자신의 동일성을 벗어나, 타자가 되어보기 위해 더 이상 원시적 토테미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멋진 뿔이 달린 작품 [orange deer]가 토템적인 영험한 기운을 뿜고 있다할지라도, 안면에 드리워진 오렌지색의 광물질적 표면은 자신을 투명하게 은폐한 채 번쩍거리는 기계적 반사면을 내보이고 있을 뿐이다. 선사시대의 인간들은 동물로 변장함으로서, 자신의 동물성을 벗고 신적인 무아경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인간은 기계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동물성을 벗고 비슷한 지경에 도달하려 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과 동물을 매개시키는 것은 기계이다. 이러한 매개는 인간이 어느 정도는 기계이고, 동물 또한 그렇다는 고전주의 시대의 가정 속에서도 확인된다. 인간보다는 동물이 더 기계적이다.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과 달리, 동물은 오랜 보호기간과 교육이라는 중간단계 없이, 자연이 부여한 완전한 본능에 의거해 입력된 기계처럼 정확히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미니크 르스텔은 [동물성]에서 동물의 완전함과 인간의 불완전함을 비교한다. 동물의 완전함은 인간의 완전화 가능성과 대립된다. 인간의 다양한 행동은 그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대신에 인간은 언어 능력과 도구를 제작하는 능력을 통해 이러한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동물과 기계는 모두 인간에 대해 타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동물은 고통을 느끼는 기계이며, 종종 낯선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형구의 다양한 안구추적 장치들은 타자를 포획하여, 휴머니즘에 근거한 기존의 낡은 주체성을 갱신하고 새로운 주체성을 발명하고자 한다. 그것들은 구별되는 요소들이 접속하여 작용한다는 점에서 인간이나 동물이기 보다는 기계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기계성은 펠릭스 가타리의 구분처럼, 외부의 흐름과 단절되어 코드화된 관계만을 지니는 폐쇄적 기제(mecanisme)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출현시키는 기계(machinisme)에 가깝다.

메카니즘과 기계의 구별은, 곧 죽음의 반복과 과정적 열림이라는 관념 사이의 구별이다. 그것이 단순한 메카니즘이 아니라 기계인 이유는, 불확실한 존재인 인간과 접합됨으로서 비로소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계적 과정에 내포된 새로운 배치는 타자되기라는 실험을 행한다. 그것은 유기체와 기계의 잡종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사이보그인데, 이 사이보그에서 인간과 동물 안구 사이에는 의사소통적 그물망이 짜여 진다. 인간을 사이보그로 재규정하는 다나 해러웨이는 새로운 개인들은 더 이상 주인 주체가 아니며, 소외된 주체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다만 복수적으로 이질적이며 비동질적이고 서로 연결된 인간행위자로, 괴물처럼 또 다른 의미작용 질서를 증명한다. 이형구는 다양한 기관 중에서 눈에 주목한다. 먹이나 짝짓기 대상에 초점이 겨누어지곤 하는 눈은 언제나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안구추적 장치는 ‘욕망하는 기계’이기도 하다. 이 용어가 탄생한 책인 [앙티 외디푸스]에 의하면 예술가는 오브제(대상)들을 통솔하는 주인으로, 예술작품은 곧장 욕망하는 기계가 된다. 안구추적장치는 작가의 몸의 부분들과 연결된 욕망하는 기계들인 것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욕망하는 기계들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모든 방향과 방면에서 그것들이 무한한 것과 연결되는 능력이다. 연결과 더불어 결정적인 것은 방향의 급변이다. 가령 작품 [fish eye gear]나 [mirror canopy]는 인간과 연결되자마자 대지에 우뚝 선 존재로서의 인간을 사정없이 비틀거리게 하고 분열시킨다. 작품 [creeper]에서는 아예 인간을 바닥에 붙여버린다. 여기에서 인간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일방적 척도가 아니라, 타자--여기에서는 동물과 기계--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의해 규정된다. 이제 예술은 해독된 유전정보를 매개로 종을 재창조하고 있는 과학과 더불어 너무나도 협소해진 인간중심주의적인 가치를 벗어나고 있다. 기존의 가치를 중심에 둘 때 이러한 변화는 혼돈으로 다가오지만, 이러한 혼돈은 협소한 틀을 깨고 생성되는 자유의 이면이다. 이형구의 작품에서 인간은 동물이나 기계와 결합하기 위해 스스로를 네트워크 속 회로의 하나로 변형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성의 축소가 아니라, 또 다른 확장을 위한 변형이다. 사실 인간의 역사 자체가 중심이 끊임없이 변환되는 과정이었다.

출전; 공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