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을 하는 젊은 작가들에게는 동시에 몸 담그고 있는 두 개의 범주, 즉 문화와 예술이 있다. 어떤 작가는 광범위한 문화 쪽에 관심을 두며, 어떤 작가는 예술의 내적 언어에 보다 집중한다. 전자의 경우, 작가를 둘러싼 문화의 영향은 보다 직접적이고, 작품 속에서 쉽게 관련 도상을 찾아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최초의 영감은 여러 겹의 변형을 거친다. 그러나 어느 쪽에 집중을 하든, 미술작품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문화는 예술화되고, 예술 또한 문화의 매개를 거쳐 확산된다. 각 범주가 개인에게 가지는 강도, 즉 현실성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문화와 예술의 뿌리인 삶이다. 직관적으로 자명하게 주어진 듯하지만, 삶은 매우 근본적이고 원초적이기 때문에, 중층적인 매개를 통해서야 가늠된다. 삶을 매개하는 가장 효과적인 범주가 바로 문화와 예술이다. 삶은 문화와 예술이라는 두 개의 항의 관계를 설정하는,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서의 위상을 가진다. 자연이나 삶 같은 원초적 요소는 상징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범주들을 통해서 다가갈 수 있는 미지의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 관념적 요소로 짜 맞춘 선험적 범주나, 보편성을 담보할 수 없는 잡다한 경험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설익은 관념 지상주의는 도덕적, 정치적 당위성에만 호소하는 경향이 있으며, 눈 먼 경험주의는 모든 것을 우연적인 것으로 흩어트린다.

이항대립의 양 극단에서 강요되는 필연성이나 우연성의 남발은, 미지의 현실성을 인간에게 다가오는 구체적인 현실로 전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문화예술’이라는 통용어가 있듯이 문화와 예술은 비슷한 계열로 간주되며, 때로 동어 반복 같은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술 속에 문화가, 문화 속에 예술이 있는 것이다. 양자의 관계에 대한 수많은 이론적, 실천적 정의가 있지만, 문화와 예술은 완전히 동일시될 수 없다. 오늘날 현대미술의 좁은 입지를 생각해 볼 때, 문화는 보다 광범위 한 것이고 예술은 그 안에 위치하는 또 다른 영역으로 다가온다. 양자의 차이는 강도와 밀도에 있다고 보여 진다. 같은 현상도 어떤 이들은 삶의 무게를 떨쳐낸 가벼운 기분전환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개인의 인식과 존재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강렬한 체험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전자가 소비에 방점을 찍는다면, 후자는 생산에 무게 중심이 놓여있다. 생산과 소비는 물고 물리는 관계이지만, 소비가 중시되는 삶은 그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현실원리와의 동일화가 전제되기 때문에, 소비할 수 있는 상황을 계속 유지하는 것 이상을 바라기 힘들다.

반면 생산이 중시되는 삶은 기존의 문화를 벗어나 새로운 것, 적어도 자신이 받은 문화적 충격에 버금갈만한 무엇을 창출해야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삶에 보다 능동적으로 임하게 된다. 어떤 이가 매일 예술 작품 속에 둘러싸여 산다고 해서 그 인생이 예술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 사소한 일상 문화 속에서 깨달음이나 심미적 체험이 가능할 수 있다. 특히 젊음은 평범한 문화조차도 강도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이 있는 세대이다. 그들에게는 오랜 연마과정을 통한 세련됨이 대신에, 모든 현상을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잠재력이 있다. 이후에 젊은 시절에나 가질 수 있는 축복받은 감성을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 그 때 겪었던 혼란과 무기력, 가난과 고독, 창작의 고통은 잊혀지고 젊음에 대한 추상적 기억만 남는다. 그래서 기성의 문화예술계는 유독 젊음이 칭송하곤 한다. 특히 근 몇 년 동안 이루어진 각 매체나 시장에서의 젊은 작가들에 대한 요구는 엄청났다. 그러나 이 경향이 지속적인 후원이나 창작환경의 근본적인 개선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양적 확산이 질적 심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문화와 예술을 성급히 동일시하지 않고, 둘의 차이가 인식될 때 둘을 잇는 성공적인 연결이 가능할 것이다. 가령 흔히 사용되는 ‘미술계’라는 표현은 미술 그 자체와 동일시 될 수 없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미술학원과 미술대학도 다니고, 각종 공모전이나 작가 지원제도를 성공적으로 거쳐 가는 것은 작품 창작을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각 단계에서의 필요조건은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도는 체계를 통해서 작동되는 것이고, 개인에게 사회화된다. 인위적인 그것은 인간이 본래부터 품었던 욕망인 양 자리 잡는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도화를 비롯한 모든 체계화는 상업화와 밀접하다. 공적인 교육부터 사사로운 취향에 이르기까지, 어떤 단계든지 필요한 것은 돈이며, 많이 투자할수록 목표에의 접근은 수월해진다. 우리 사회의 지표가 되는 각종 통계는 부와 교육 간의 밀접한 관계를 매번 확인 시켜준다. 교육은 지배적 계급에 이르기 위한 보이지 않는 계단 및 장벽으로서, 삶의 모든 심급에서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제 경쟁력 있는 미술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자격 요건은 엄청나게 늘어나서,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의 조건은 작업의 질만으로 가늠되지 않는다.

오히려 작업만 열심히 하는 작가는 아웃사이더가 되기에 충분하다. 아웃사이더들은 제도적 미술문화가 알리바이로 삼고 있는 ‘미술’이라는 개념과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작업과의 동일성을 발견하기 힘들다. 따라서 작가로서의 정체성도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다. 코드로 체계화 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작업과 달리, 문화산업에 의한 문화의 조직화는 보다 많은 이들이 게임에 참가하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양적인 현상이며, 규칙에 대한 구성원들의 강한 동화(同化)를 요구한다. 동화는 교육을 비롯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개인에게 관철되며, 사회가 규정하는 상징적 언어를 효과적으로 내면화하여 구사하기를 원한다. 반면 진정한 예술은 동화 이후의 이화(異化)를 필요로 한다. 동화 작용은 사회와의 연속성과 점진적인 개선, 또는 개혁을 낳는다. 그러나 이화 작용은 혁명적 단절을 요구하며, 통합보다는 전복을 추구한다. 예술은 달라야 하며, 다를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다름에 대해 근대에는 새로움과 진보라는 이름이, 탈근대에는 이질성과 타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현실원리라는 대세에 순종하는 같아지기보다 달라지기는 더욱 힘들다.

전자는 물적 투자 및 소비를 통해 획득 가능 하지만, 후자는 정신적 투자 및 생산을 통해 비로소 다가갈 수 있다. 문화의 소비, 또는 소비적 문화는 오락과 기분전환, 그리고 쾌락을 가져다주지만, 창조 또는 생산은 끝없는 몰입과 헌신을 요구하며 고통과 구별할 수 없는 열락이 있다. 물론 차이는 차별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문화도 양적으로 확대되면 질적 도약이 이루어지며, 이 경우 예술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또한 예술이 문화화 될 때, 내실 있는 유통시스템이 정착될 수 있다. 예술은 문화의 정수로 상찬되곤 하지만, 예술이 현실 문화와의 연계를 잃고 자신만의 어법에만 갇히게 되었을 때의 결과는 참담하다. 특히 미술인들이 대학처럼 미술이 몸담고 있는 제도에만 매몰되어 있을 때, 예술적 성취는 물론이거니와 어떠한 사회적 소통이나 문화적 공헌도 이룰 수 없다. 제도의 핵심부를 차지하는 지배적 예술은 기득권 수호를 위한 끊임없는 바리케이트를 친다. 반면 예술사를 보면 처음에는 결코 예술로 간주될 수 없었던, 이름도 깃발도 없는 바깥의 존재들이 주류로 부상한 경우가 종종 있다.

무엇보다도 문화나 예술이 개인에게 주는 영향력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서구에서는 1980년대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발흥하는 문화적 우세종이 정의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서도 1970-80년대의 근대화를 넘어서 대중문화와 하위문화가 압도하기 시작하는 1990년대에는 가히 ‘문화의 시대’라고 할 만한 바람이 불었다. 폭압적인 근대화와 그에 대한 대항 전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던 암울한 정치 경제의 시기가 지나고, 갑자기 ‘다원주의’라는 문화의 꽃이 핀 것이다. 그 때 ‘예술’이라는 말은 미학에서 심심치 않게 거론되던 ‘예술의 종말’이라는 담론과도 비슷하게, 지양해야 할 구시대적 유물처럼 간주되었다. 특히 학파를 비롯한, 거대 집단 이기주의의 장에 지나지 않았던 미술 판을 벗어나 생동하는 현실과 호흡하고 싶어 했던 계열의 문화 담론에 이러한 경향이 강했다. 이후 인터넷을 비롯한 전자매체로 현실이 함열 되는 경향이 이어졌다. 세계와의 시간차는 사라지게 되었다. 세계화의 명과 암이 무엇이든 간에, 문화 예술의 동시대성이 간취된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로 대변되는 복제문화는, 19세기에 이미 일어났던 복제기술인 사진을 통해 예술과 현실을 변화시킨 원리와 비슷하지만, 21세기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발터 벤야민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와 미학자들이 기계복제가 야기한 예술의 변화를 강조해 왔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지각 양식이 변화했다. 손바닥 안의 기기들로 부터 건물 내 외벽을 감싸는 거대한 인터페이스에 이르기 까지 대용 현실은 대용 예술이라 할 만한 문화를 낳았다. 더 많은 클릭은 더 많은 소통과 동시에 더 많은 소비를 요구한다. 기술문화는 공통의 코드를 가동시키기 때문에 동질화의 경향도 더욱 커졌다. 본래 동질화에 힘을 얻는 소비문화 또는 문화의 소비는 더욱 비대해졌다. 지금 뉴욕과 파리, 그리고 서울에는 역사상 존재했던 예술가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전체의 시각 이미지에서 그림이나 조각이 갖는 비중은 줄어들고 있다. 비록 우리를 감싸고 있는 모든 세련된 문화가 어떤 기원을 가지는 예술적 혁명의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간혹 대중매체를 통해 흘러나오는 천문학적 숫자의 작품가격 만이 기계 복제 시대에 사라진 예술의 아우라는 물신적으로 복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문화의 바람은 거대 조직화의 힘을 강조하는 경향도 낳았다. 현실 속에서 예술은 거대 기업, 정부의 지원 시스템 같은 관료제도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고, 작가들 역시 이러한 미술문화에 급속히 편입되어 갔다. 과거처럼 소박한 친교 집단을 넘어서, 거대해진 미술 단체들의 조직도는 좌우를 막론하고 관료제도와 비슷하며, 조직의 비대화를 통해 권력이나 돈이 따라오는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한다.

어떤 분야든지 권력을 차지하는 방식은 유사하다. 권력 쟁취를 위한 집단화와 쟁취된 권력을 나누기 위한 줄서기가 그것이다. 다른 분야와 달리 물질을 포함한 사회적 피드백이 적은 미술계는 기득권이든 아니든 피해의식이 크고, 그것이 자신의 본질과 상당히 어긋나 있는 문화단체의 집단화를 야기했으며, 시민이나 미술인의 보편적 이익과 꼭 부합할 수 없는 정치화를 방조했다. 집단주의는 대량생산과 소비를 통해 굴러가는 문화에는 적합한 정체성일지 모르지만, 예술에는 아니다. 예술의 소통방식은 양적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다. 민중이나 대중 같은 집단에게서 영감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 모든 원천을 모아서 작품화 하는 것은 철저히 작가 개인에게 달려있다. 물론 그것은 과학 기술적 발명에서도 흔히 일어나듯이, 한 개인의 천재적인 성취라기보다는 시대정신이 한 개인의 창작물 속에서 집약되어 표현된 산물이다. 그것은 문화든 예술이든 사회적 패러다임 속에서 움직이는 것만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양적인 문화와 질적인 문화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은 현실이다. 현실과 인간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문화이다. 그리고 문화의 정수가 바로 예술이다. 문화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현대에는 인간과 기계를 이어주는, 전반적인 삶의 양식이다. 그러나 허위의식과 이데올로기로 가득한 지배적 문화는 현실의 모순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된 현실 속에서 피어난 자생적인 문화는 제도화된 예술보다 더 강렬할 수 있다. 문화라고 예술보다 기술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기술에 의해 매개되는 문화가 대세가 된 현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비록 시대가 요구하는 필요조건이라 할지라도, 현대의 작가가 많은 자본과 교육을 필요로 하는 기술 문화의 요구에 매번 부응하고 능숙해지기는 힘들다. 특히 교육제도는 사회의 지배적인 상징 언어가 내면화되는 가장 억압적인 통로중의 하나이다. 미술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작품 제작 외에 상징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또 다른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끝없는 설명의 압박이다. 개념의 혁명을 거친 현대미술에서 개념이라는 매개 또한 작품의 내적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상 그 자체보다는 그 맥락을, 실체보다는 관계성을 강조함으로서 작가의 세계에 대한 태도를 중시한다. 현대미술은 작업과 작품, 감성의 논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인쇄된 지식이나 들은 풍월과 관계있을 수 있지만, 정확히 겹치지는 않는다. 예술가들이 갖추어야 할 논리는 작품 제작의 과정에서 나오는 독특한 논리이다. 작가의 육화된 발언은 종종 새로운 담론을 출발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인간 안팎의 모든 것들이 코드화를 통해 층층이 매개되는 시대에, 매개, 특히 매개를 위한 매개는 질곡이 될 수 있다. 매개가 중시되면서 기능주의 사회에서 부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조작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그것은 만물을 객관화시키던 주체의 시대가 본질주의 혹은 실체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장황함을 걷어내고, 삶 또는 현실의 핵심에 최단거리의 채널을 구축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다.

출전; 월간 퍼블릭아트 선정작가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