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의 전시에서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는 붉은 색 실로 가시화된 기억의 끈을 매개로하여 잃어버린 시간으로의 여행을 청한다. 실은 캔버스에 붙어있거나 둥글게 말려있으며 도저히 풀어볼 도리가 없이 엉켜있고, 때로는 긴 머리카락 뭉치로 전치된다. 영상작품에서 가늘게 흘러나오는 이국적인 피리소리는 이리저리 꼬인 흐름의 청각적 등가물이다. 이선영의 많은 작품에 내포된 선적 흐름은 망각의 강을 건너 저 앞에 놓인 미지의 장소로 닿게 해주는 줄이 되어준다.
여성을 상징하는 색이자, 핏줄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이 붉은 실은 서른 몇 해를 삶을 살아온 작가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 주는 실마리가 된다. 그것은 ‘아드리아드네가 건네준 생명의 실을 따라 크노소스의 미궁에 들어간 테세우스처럼’(작가) 또 다른 시공간 속으로 진입하게 한다. 이러한 여행은 한가로운 몽상이기 보다는 ‘깊은 절망으로 굳게 잠겨 있던 현실의 벽, 그 장벽의 문을 여는 열쇠를 발견하기 위한 것’(작가) 이다. 몸통에 얹혀 들려진 거대한 붉은 실 뭉치는 이러한 여행을 통해 되찾아진 질서처럼 보인다. 그것은 엉키고 단절되며 고착된 상태를 벗어나 술술 풀리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갖추고 있는 듯하지만, 언제 어디로 튕겨져 나와 다시 엉켜 버릴지 기약이 없다.

붉은 실 덩어리는 몸을 강하게 연상시키지만, 몸과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구 같은 기하학적 형태로, 일시적으로만 몸과 접합된 채 또 다른 접합 지점을 향한 잠재 에너지와 운동감을 가진다. 먹으로 그린 화면 위에 핏물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붉은 실은 어떤 장면을 말소 하에 두지만, 몸의 이동 방향에 따라 가변적인 풍경이 연출된다. 지워진 혹은 흐릿해진 풍경 앞에 창살처럼 드리워진 붉은 실 줄기는 그것을 헤치고 저 곳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기억의 저편으로 진입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된다. 동시에 그것은 장벽이 되기도 한다.
접착제에 의해 고착되어 검붉게 변한--이선영이 작품에 사용하는 붉은 색 실은 산소를 가득 머금은 헤모글로빈 같은 선홍색을 띄고 있다--선들은 유기적 총체성의 붕괴를 예시하는 듯하다. 온통 붉은 실로 감긴 작은 의자들은 부재하는 몸에 대한 은유이다. 작은 의자는 작은 몸, 즉 지나가버린 어떤 시점의 몸을 암시한다. 공간적인 차이를 통해 시간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벽으로부터 바닥으로 드리워진 크고 작은 실 뭉치들에서도 확인된다. 말하자면 시간의 공간화이다. 그리고 이선영의 작품에서 이 공간은 미로 같은 양상을 띤다.
벽에 걸린 평면 작품에서, 여성 인체를 연상시키는 단촐한 선 몇 개가 만나는 지점에 풀숲처럼 서식하는 머리 타래는 몸과 관련된 깊숙한 체험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깊은 몸속에 자리한 작가의 머리털 뭉치는 생의 정점으로서의 죽음, 그리고 그것을 추동하는 욕망의 기호이다. 이선영에게 기억은 과거의 경험과 관계되지만 단지 과거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는 예지의 번득임’(작가)이다. 예술을 통해 되찾아진 기억은 자신이 지나온 자서전적 족적을 일일이 재현하려는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이 나타내는 시간 이미지는 개인의 연대기가 아닌, 모종의 사건을 향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기억은 의지의 활동이라기보다는 무(無)의지적이고 불현듯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을 찾아 헤쳐 나가는 행위 역시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이 가지는 지형 또는 위상학(topology)은 미로 그자체이다. 엉켜 있는 실타래는 결코 직선으로 난 대로 일 수 없는 통로(passage)의 특성을 알려준다. 그것은 시간 속에 있는 기억과 공간 속에 있는 미로의 만남이다. 영화학자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우리는 사물들이 존재하는 곳, 즉 공간에서 사물들을 지각하듯이 사물들이 지나가는 곳, 즉 시간에서 기억 한다’고 한 들뢰즈를 인용하면서, 기억은 시간 내에서 변위(dislocation)로서의 간격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이 변위들은 현재와 과거 간의 비(非)선형적이고 비(非)연대기적 관계를 포함한다. 그에 의하면 기억은 지각과 대조적으로, 시간 내에서 한층 복잡하고 무수한 지점들을 여러 이미지와 연계하는 과정이며, 의식은 기억과 더불어 기억의 지속을 점유하는 과정과 관련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풀렸다가 엉켰다가 흐르다가 멈추었다가 하는 실타래의 이미지는 공존하는 시간의 이미지이며, 동시에 기억의 이미지이다. ‘시간의 순수 형식인 생성의 운동’(들뢰즈)은 예측불가능하며, 새로운 것을 도래하게 한다. 작가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으려 하는 것은 과거로의 복귀나 현재에 대한 인과론적 설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다. 기억을 통해 공간과 사물들이 새로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로 속 여행처럼 알 수 없는 곳으로 돌고 도는 반복적 행위와 연관되지만, 그곳에서 길을 잃는 것은 동시에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다. 작가는 엉킨 실타래를 푸는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고 말한다. 결코 끝나지 않는 이 난관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지 꿈에서 깨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을 통해 그 순간들을 회상하며, 이를 현재의 순간으로 연장시킨다. 예술은 마치 놀이와 같이 꿈과 현실이 연장된 시공간이다. 서로 다른 차원을 이어주는 붉은 실마리는 현실이랄 수도 상상이랄 수도 없는 이야기를 지속시킨다. 이선영의 작품에서 이야기는 기억과 연관된다. 그러나 그것은 몇 년 몇 월 며칠을 지정할 수 있는 정확한 경험의 재생이 아니라, 어떻게 기억을 직조하는 가가 문제시 된다. 이 직조에서 망각은 기억 못지않은 역할을 한다.
유년의 도시를 기억하고자 했던 발터 벤야민은, 회상을 ‘기억이 씨줄이 되고 망각이 날줄이 되는 작업’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마치 ‘페넬로페의 베짜기처럼 밤이 짜놓은 것을 낮이 풀기 때문’(벤야민)이다. 기억의 이면은 망각이고 그 역도 성립되며, 그녀에게 실은 양면을 가진 동체로 짜야할 텍스트인 것이다. 실의 다양한 상태로 가시화된 텍스트는 단지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읽혀질 것을 요구한다. 실타래는 지각 가능한 세계의 문자를 이루며, 세계를 펼쳐진 책으로 만든다. 다만 이 책은 페이지 순서대로 읽혀지지 않는다. 이 문자는 지시대상을 괄호에 넣고 그것을 기호로 전치한다. 그것은 대상을 지우는 동시에 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선영의 작품에 나타나는 기호적 속성은, 그 기호가 지시할 대상의 독립성을 상정하지 않는다. 작가는 대상이 명확하게 나타나려 하는 순간조차도 흐릿하게 만든다. 먹으로 그려진 풍경은 붉은 실 줄기로 가려져 있으며, 인체의 선은 양쪽으로 번져 있다. 평면 작품에서 형태를 그리는 검은 선은 단지 블랙으로 코드화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색을 내포하고 있는 먹이다. 먹은 이질적인 캔버스와 만나서 미끌어지고 펼쳐져 계열화 된다. 명료한 선은 원소로 흩어지고 몸으로부터 탈각된 잔여물은 아련한 시각적 환영이 아니라, 거친 물질성과 촉각으로 다가온다.
기억은 가장 자연스러운 유기체, 특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법한 몸조차도 이물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선영의 작품에서 기억은 일관된 이야기로 총체화 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며, 이질적인 바깥과 접촉한다. 상징의 세계, 즉 인간의 말 자체가 결여와 상실의 흔적이다. 기억은 되돌아가고픈 원초적 합일에의 욕망이지만, 사회적 주체가 되기 위해 모체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에게, 이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채워지지 않기에 인간은 반복한다. 이러한 반복에는 멜랑콜리가 내재해 있다. 욕망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는 불가능한 사랑과의 결합’을 꿈꾸며, 멜랑콜리는 ‘열렬한 사랑의 어두운 이면’(크리스테바)이다. 이선영의 작품에서 기억은 의미의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로서의 대상을 되찾으려는 불가능한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정된 정체성과 사유의 주체에 도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