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하면서 생성하기


박은하 전 | 3.11--8.27, 세오 갤러리
이승현 전 | 7.22--8.29, 갤러리 잔다리


갤러리로 연결된 지하통로 벽면에 그려진 박은하의 벽화와 미술사의 명화들을 변조하여 이색 미술관을 연출한 이승현의 작품들은 구불거리는 불확정적인 선의 흐름을 통해 확실한 형태와 형식을 와해시키려는 충동이 지배적이다. 그들의 작품에서 일상과 역사 속에서 확실한 자리와 위치를 배정받은 형태와 형식들은 모종의 힘에 의해 내부로부터 해체되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각자 출발한 점은 명료하지만 종착점은 모호하다. 그러나 이들이 확실성을 불확실성으로 변모시키는 이유가 탈주를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 고정된 시공간으로부터 미지의 대지를 향하는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 그 여정의 일차적인 단계는 변형이며, 작품은 변형이 일어나고 전개되는 장이다. 일상으로부터 출발하는 박은하의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을 찍어낸 특수 사진처럼 인간과 사물에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와 물신적 기운이 얽히고설켜 있다. 이승현은 미학과 미술사의 규범이나 교양에 의해 짜여진 명화라는 대상의 날실과 씨실을 모두 풀어헤쳐 기이한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기존의 형태와 형식으로부터 풀려나온 선들은 분열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방향과 속도로 흘러간다. 정처 없는 여행이나 유목과 비교될 수 있는 이들의 작품은 닫힘에서 열림으로 향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그들에게서 고정된 점이나 직선적 요소는 발견되지 않으며, 예측 불가능한 변이가 일어나는 도약지점들이 다수 포진해 있을 뿐이다.

현대적 일상이 사각 캔버스 같은 격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면, 사각 캔버스라는 경계를 범람하려는 선들로 가득한 박은하의 그림들은 환경으로 확장되려는 잠재력이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지하로 연결된 좁은 통로를 검게 칠하고 그 위에 푸른색과 보라색을 주조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두 남자를 그렸다. 위, 아니면 아래라는 하나의 방향만을 선택하게 되어 있는 막장 같은 상황에서, 자연광과 인공조명을 통해 드러나는 형태와 선의 흐름은 정장차림의 배불뚝이 남자와 초라한 행색의 마른 남자를 한 쌍의 상징으로 부각시킨다. 작가는 장소의 특수성을 살려서, 건축적 구조를 상징적 차원으로 전이시키며 서로 멀어지는 두 부류의 인간을 전형적 상황으로 배치한다. 밝은 위쪽을 향하는 남자와 어두운 아래쪽을 향하는 남자, 더구나 갤러리의 이전 때문에 굳게 닫혀 있는 아래층을 향하는 남자는 출구 없는 어두운 터널로 추락하는 다수의 삶을 반영하는 것 같아 더욱 우울하다. 각각의 인간에게서 흘러나오는 선들의 얽힘은 양 계급이 분리되는 속도와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 자본과 노동이 교환되는 시장이 유일한 보편성으로 군림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 연결망들을 통해 권력이 작동된다. 이 연결망의 말단은 천국과 지옥처럼 그 명암이 분명하지만, 연결망 자체는 명확하게 구조화되어 있지는 않다. 이 불확정적인 그물망은 자본주의에 나름의 역동성을 부여한다.




두 도상을 연결시키는 복잡한 선의 흐름은 계급적 차이를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는 신축성을 가진다. 존재의 가장자리로부터 풀려나온 선들은 꼬이고 꼬인 권력의 그물망을 연상시키면서도 명확한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힘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이 폐쇄적 상황의 유일한 희망은 공간을 타고 흐르는 선이다. 그것은 단지 카오스에서 시작되어 카오스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상황을 무한의 가능성으로 도약시키기 때문이다. 직립 보행을 통해 이미 대지로부터 탈영토화 된 인간의 손은 떠도는 선의 한 가닥을 부여잡고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이 벽화에서 선들의 맡은 역할은 변모이다. 선의 흐름에 내포된 변모의 가능성은 양극화로 치닫는 계급적 질서를 혼란시킨다. 혼란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일 수 있다. 선의 소용돌이 속에 내포된 또 다른 소용돌이, 주름 속에 내포된 또 다른 주름은 유동성을 극대화하며 경직된 구조를 위협하는 생성의 힘이다. 고정된 구조로부터 탈주하고 새로운 대지를 생성하려는 예술의 경향은 자본의 힘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사회적 움직임과 만날 수 있다. 해방은 한 방향으로의 집중이 아니라 집중의 와해이며, 정해진 목표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표류와 탈주는 구별되지 않는다. 선의 흐름은 욕망의 흐름이기도 하다. 박은하의 캔버스 작품에서 욕망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기계, 기계와 기계 사이를 흘러 다녔다면, 이번 벽화는 총체적인 환경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이승현 역시 복잡한 선의 흐름을 탈주와 탈영토화의 매개로 삼는다. 이탈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고전 및 현대 미술의 전범들로 평가되는 명작들이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한 그들의 유산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지만, 새로운 창조를 위해 전범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현대미술가의 자의식과도 관련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여러 전시를 통해서 기계적 환경과 결합하는 장소 특정적 작업을 선보여 왔던 그는 이번 ‘crypto-museum’ 전에서 미술관을 특정한 장소의 하나로 변모시킨다. 그것은 단지 미술 작품을 미술관에 거는 것이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 베르미어, 마네, 피카소, 반 고흐 등 역사적 평가를 통해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걸려 진 명작을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일련번호가 매겨진 ‘Masterpiece virus’ 시리즈는 전유나 패로디 같은 형식으로 가시화되곤 하는 메타적인 차원의 작업과 다르다. 그의 작품에 투여되는 노동 강도는 원작들과 비견될만하다. 그것은 개념미술이라는 미명아래 여러 매체로 여기저기 가볍게 넘나드는 자료편집이 아니라, 명작의 구성요소, 그리고 요소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내재적 에너지를 그리기라는 똑같은 과정으로 재해석한다. 재해석은 원래의 작품을 망각하게 할 정도로 너무 멀리 나아가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므로, 관객은 극적인 변모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이탈은 이전의 경계 위에서 새로운 선들이 그어지는 순간에 일어난다.




유수의 명작들을 명작으로 완성시킨 구도와 선과 색채는 그것들로 확정되기 이전에 망설였을 대가들의 붓의 궤적을 다시 밟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단지 역사적 결과물의 참조가 아니라, 역사가 되기 위해 전제되었던 수많은 가능성들을 다시 살아보는 과정이다. 역사는 역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 아래에는 그것을 가능케 한 수많은 잠재적 가능성이 있다. 관념에 이끌리는 역사화 작업은 작품을 진공상태로 포장하려 하는데 비해, 역사가 되기 이전의 상태를 되살아보는 과정은 이 진공을 충만으로 채운다. 이승현의 작품에서 진공을 대신하는 충만은 순수화와 승화가 아니라, 바이러스의 침투를 통한 이질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질화는 창조의 과정에 내포된 저항이나 배반을 예시한다. 명작이라는 순수의 결정체들은 경계 지워진 모든 금기사항이 위반되는 카니발의 장이자 사건 현장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사건을 고찰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인용한다. 하나는 사건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고 조건 지어지고 쇠락하는 과정을 그러모으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 생성 그 자체에 자리를 잡고서 사건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들이나 기이성들을 겪어보는 방식이다. 후자는 역사를 사건의 현장으로 변모시키며, 이 사건 속에서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여기에서 역사는 실험을 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이승현의 작품이 가지는 특이성은 하나의 형태나 형식이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불연속의 점들에 있다. 여기에서 구조의 붕괴와 생성은 동시에 일어난다. 구조적 안정성을 뒤흔드는 작은 지점들은 가속화된 힘을 받아 이질적 형태들을 발생하고 증식시킨다. 이러한 질적 변환이 가능한 바탕은 그리기의 양적 축적이다. 그의 작품은 정해진 궤도를 따라 주어진 화면을 채워가는 극사실주의 계열의 화풍에 전제된 기계적 노동과도 다른, 양들의 쇄도가 있다. 이 양들이 임계점을 넘었을 때 끓어 넘칠듯한 질적 전환이 야기된다. 그의 작품이 갑작스러운 비약의 계기들로 이루어진 유체역학이나 생물학적 진화라는 비유로 가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연속성이 강조된 이러한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바로 현재이다. 그러나 이승현의 작품에서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 짓는 단순한 매개 고리에 불과하지 않다. 그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푸코를 따라 ‘현행적(actual)’이라 명명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들이 말하는 ‘현행적’이란 현재의 우리들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 되어가는 그 무엇, 생성으로서의 우리이다. 이승현이 자신의 작품에 역사를 끌어들이는 것은 반성도 회고도 전망도 아니며, 흘러가는 각각의 현재 속에서 생성들을 진단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가로지르는 생성의 힘을 내재적으로 파악하면서 정해진 역사의 여로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가시화한다.


출전 | 아트 인 컬처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