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고리를 담은 그릇


박성민의 그림은 다양한 형태와 문양이 새겨진 백자 안에 담겨진 얼음 덩어리와 그 안에 얼려 있는 식물들을 보여준다. 얼음 바깥으로 삐죽삐죽 튀어 나온 식물들은 언뜻 보면 시원한 야채샐러드 같은 이미지로, 실제보다도 더 실감이 난다. 얼음 속 식물들은 딸기, 블루베리, 청미래 넝쿨 등인데, 그 탐스러우면서도 신선한 상태가 시간을 정지시키는 회화의 힘에 의해 영원성을 부여받는다. 이번에 노화랑에서 전시되는 십 수점의 그림들은 비슷한 형식 속에서도 최대한의 다양성을 뽑아내려는 듯이 배치와 밝기와 배경에 변화를 주었다. 채취된 자연물은 상하지 않게 ‘아이스캡슐’(작품제목)에 담겨져 고풍스럽고 세련된 백자에 놓이고, 그것은 세밀한 묘사력을 통해 한 점 한 점의 그림으로 완성된다. 그림의 영원한 소재인 자연은 몇 겹의 포장을 거쳐 관객 앞에 놓인다. 이 그림들은 누군가 손수 힘겹게 그렸을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불편함 없이 수용되며 그것이 시각적인 포만감을 준다. 좋은 것들만 두루 모아놓은 듯한 그의 그림은 세밀한 묘사력에 힘입어 밝고 명료하며 부정적인 기색이 없다. 그것이 박성민의 그림의 대중적 인기를 보증해 준다. 그의 작품은 2000년대 중반 미술시장의 붐과 더불어 인기가 치솟은 극사실주의 계열의 그림의 특징을 공유한다. 그 또한 이 대열 속에서 ‘인기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박성민이 이러한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훨씬 이전의 일이었고, 무엇보다 그의 그림은 실물이나 사진을 그대로 보고 그리는 리얼리즘이나 하이퍼리얼리즘과는 차이가 있다. 박성민의 경우 관심이 가는 사실이나 이미지의 파편들을 머릿속에 입력하고, 그림은 상상과 훈련된 손으로 출력한다. 자연스러운 정물처럼 보이는 그의 그림은 그 내부로 접힌 여러 겹의 상징이 존재한다. 그것은 수천도의 열을 거쳐서 완성되었을 도자기와 차가운 얼음, 또는 광물질과 유기질의 극적인 만남을 보여주며,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생명의 양 극단을 교차시킨다.

얼음에 갇힌 유기물은 죽어있는지 살아있는지 알 수 없으며, 그것은 일정한 틀 속에 갇혀 한시적인 영원성을 부여받는 현대적 삶에 대한 은유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작가는 유화의 생동감을 보존하기 위해 화면에 바니쉬를 바른다. 젖은 상태로 그려지는 유화는 바니쉬를 통해 탁해지는 것이 방지되고 그릴 당시의 색감을 살려진다. 작품의 배경은 어둡거나 밝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래에 그릇의 그림자만 떨궈지는 텅 빈 상태라는 것은 그의 그림이 현실의 자연스러운 연장이 아님을 알려준다. 촬영을 위한 중성적인 배경처럼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은 밤과 낮의 상징처럼 어둡거나 밝다. 어떤 작품은 위에서부터 어둠이 깔리듯이 명도의 점진적 이행이 있다. 2007년에 다른 색을 배경으로 그린 적도 있었으나, 너무 구체적이어서 한번 시도하고 말았다고 한다. 박성민의 그림과 극사실주의의 차이는, 이렇듯 대상이 놓이는 맥락의 구체성을 삭제하는 선택에서도 두드러진다. 밝은 바탕에 그려진 그림들은 아이스캡슐이 놓이는 백자의 은은한 색조와 어우러지며, 어두운 바탕에 그려진 것들은 바닥에 그릇의 밝은 그림자를 반영하고, 위로는 상온으로 끌어내어진 얼음이 녹아 생기는 하얀 기운이 서린다. 그것은 막 퍼놓은 밥사발 위에서 올라오는 김처럼, 이미 죽어버린 자연물에서 스며 나오는 생명의 기운이다. 옛 여인들이 정한 수를 떠 놓고 기도하듯, 무언가 담긴 한 사발에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는 기계 복제시대에 이미 사라진 그림의 제의적 가치를 일깨운다. 이전 전시에 붙은 ‘Ice Capsule-Somthing Great’라는 부제는 자연과 사물과 그림 사이 어디엔가 걸쳐 있을 위대한 존재의 포착에 대한 작가의 관심사에 닿아있다.




그는 ‘Ice Capsule’이 타임캡슐에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타임캡슐이 역사에 대한 공시적인 단면이듯이, 아이스캡슐은 시간의 흐름을 타는 생명을 절정의 순간에서 멈추게 하고 그 순간을 연장하려 한다. 얼음은 생명 연장을 위한 조치이지만, 얼음 또한 일시적인 것이며, 이러한 인위적 조작이 유기적 조직을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훼손하는 것도 사실이다. 날로 발달하는 과학기술은 이 영원의 순간을 더 연장 시킬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를 통한 보존이라는 역설적 방식이다. 그림이나 사진은 지금은 죽어있을지 모르는 한 때 살아있었던 것의 기록이자 증거로 간주된다. 덩굴진 잎이나 열매들은 여러 성장의 단계를 한 화면에 모두 집어넣는 방식을 통해, 정지된 시간 속에서도 잠재적인 시간성을 보여준다. 크고 넓은 잎을 가지는 청다래 넝쿨이나, 서로 다른 상태의 식물을 한 접시 위에 나란히 올려놓은 작품들에는 대상에 대한 치밀한 분석적 시점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부분적으로는 사실에 충실했을지도 모르지만, 전체는 상상의 산물이다. 정밀한 사실의 묘사처럼 보이는 그의 그림은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은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냉장고에서 막 꺼내 담은 듯한 아이스캡슐은 실제의 모습과 다르다. 실제로 얼리면 아래는 완전히 얼음에 잠기고 식물 조직은 위로만 올라온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식물은 얼음에 잠기지 않은 부분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뻗혀 있다. 얼음 역시 실물이나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다. 막상 얼음을 실제로 찍은 사진에는 얼음의 질감이 재현되기 힘들다. 또한 사진에서는 얼음과 유리, 플라스틱의 느낌을 구별하기 힘들다. 얼음답게 보이기 위해서는 과학적 재현과는 다른 조치들이 취해져야 하는데, 박성민의 경우 그것은 마음 속 상상에 있다. 그림의 대상은 식물의 부분을 상상으로 얼음에 넣은 것이다. 다양한 형태와 무늬를 가지는 백자 역시 자료들을 부분적으로 차용할 뿐이다.

원본이 없는 그것은 실제와의 유사성이 아니라, 작가가 애초에 목표로 했던 어떤 느낌을 끌어내는데 주안점이 놓여진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사진 같지도 그림 같지도 않은, 그 경계선 상에 놓인 어떤 것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어디선가 취해 온 것들이지만, 그 총합은 상상의 구축물인 박성민의 그림은 본질적인 실재라는 동일자의 모델, 즉 이미지의 역사에서 리얼리즘으로 파악된 그 모델에서 약간 씩 비껴나 있다. 식물이나 도자기 등, 그의 작품 소재 중 부분적으로 참조하는 것 역시 실재가 아니라 사진의 부분이다. 그것들은 정확한 형상이 아니고, 형상을 모방하는 형상과 비슷한 무엇이다. 그것은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말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 즉 복사물의 복사물이다. 복사물은 원본과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복사물이지만, 시뮬라크르는 그렇지 못한 그림자로 정의된다. 시뮬라크르는 원본과 관련되는 동일성의 모델이 아닌, 타자의 모델이다. 박성민의 그림은 관찰자의 관점을 포함하는 구성물이라는 점에서 시뮬라크르이다. 거기에는 관찰자가 존재함으로서 생겨나는 환상과 상상, 실재와의 간격과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있는 실재를 그대로 복사한 표상들의 세계와 달리 환각(phantasme)으로 제시한다. 특히 어둠속에 잠긴 아이스캡슐의 표면에서 흘러나오는 미묘한 기운들은 시뮬라크르가 가지는 상상과 환각의 유동성을 보여준다. 얼음에 내재된 복잡한 응결 물은 다양한 표면들을 생성하며, 단단함 속에 은폐되었던 에너지는 어둡거나 밝은 면을 배경으로 올라온다. 표면으로의 상승과 표면들의 생성은 일자(一者), 또는 전체로의 동일시를 거부하고 가변성과 일시성을 강조한다. 실재가 결여되어 있으며, 원형이 없는 이미지인 시뮬라크르는 재현에 대한 자명한 개념을 혼란에 빠트린다.




들뢰즈에 의하면 ‘시뮬라크룸은 퇴락한 복제가 아니다.’ 그것은 ‘원본과 복제, 원형과 재생산을 부정하는 긍정적인 힘을 품고’ 있으며, ‘원본으로 지정될 수 있는 것도 복제로 지정될 수 있는 것도 없고’, ‘가능한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유는 오랫동안 재현의 논리를 제공해 왔던 플라톤의 이데아적 체계를 전복하는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현대의 사상과 예술은 원본이나 모방에 근거한 재현적 사고가 와해되는 과정 그 자체이다. 박성민의 그림이 언뜻 실재 같은 외관을 취하는 것은, 실재를 무화시키려는 역설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그의 그림은 전형적인 정물화라기보다는 그럴듯하게 모사된 광고의 가상적 이미지와 더 닮아 있다. 광고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최첨단 과학 기술의 장은 시뮬라크르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시뮬라크르의 의미를 논한 보드리야르는 ‘만약 모든 것이 너무도 명백해서 오히려 사실 같지가 않다면 환상을 위한 가능성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광고 같은 세계, 요컨대 우리를 둘러 싼 것들에서 핵심이 쑥 빠져나간 상태에서 예술 역시 텅 비워진다. 박성민의 그림에서 곧 녹아 없어질 얼음, 일시적인 고체 지지대가 사라지자마자 뭉개져 버릴 식물을 담은 빈 그릇(백자)은 그림이 가지는 위상을 그림 내부에서 반복하는 듯하다. 그림 속 도자기 표면에 그려져 있는 다양한 식물 문양은 실제의 도자기에 있는 것을 그대로 베꼈다기 보다는 그림에 대한 그림이라는 사고의 유희에 가깝다. 여러 차원에서 인위성이 발견되는 박성민의 그림은 세계를 단순히 정신의 투사로 간주하는 표상적 사고와 거리를 둔다. 그의 기법은 전통적인 듯이 보이지만, 표상적 사고로부터의 거리는 그의 그림이 가지는 현대적인 측면이다.

정물화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는 박성민의 작품에 대해, 그 장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를 물었더니,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한다. 그의 그림은 정물적 형식을 가지고는 있지만 정물화보다는 연출한 사진 이미지에 가깝고, 동시에 사진으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회화적 효과들이 내재해 있다. 그러나 박성민의 그림이 정물화에 내재된 물신적이고 상품적인 요소, 무엇보다도 죽음과 관련된 정물화의 주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미술의 역사에서 정물화의 출현은 현세적 삶을 강조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상승과 밀접하다. 근대를 열어 제친 그 시기에 소유할 수 있는 사물들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세계는 전통적인 상징주의를 밀어낸다. 그 때 세계는 인간을 비추어주는 크고 작은 거울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거울들은 이후에 전개된 그것처럼 완전히 중성적인 것은 아니었고, 인생에 대한 교훈과 풍자가 내재해 있었다. 깊은 침묵 속에서 정교하게 재현된 대상만 있고, 그것의 소유자가 부재한 정물화에는 메멘토 모리와 바니타스라는 알레고리가 새겨져 있는데, 박성민의 그림에는 비록 싱싱해 보이지만 토양으로부터 분리된 식물이나 곧 녹아버릴 얼음이 그러한 인생무상이라는 메시지와 관련된다. 그의 작품 속 자연은 고전적인 정물화, 즉 ‘natura morta(죽은 자연)’에서 재현되곤 하는 대상, 가령 해골이나 촛불 같은 도상들 보다 더 짧은 지속시간을 가질 것이다. 더 빠른 생활주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처럼 말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능란한 솜씨가 산출한 시각적인 향연 속에서, 가장 생생한 순간에 틀 지워진 상태로 응결되고, 이내 사라져야 줘야 하는 현대인의 삶의 패턴을 읽을 수 있다. 한편 내용물이 스러져도 굳건히 시간의 흐름을 견뎌낼 법한 단단한 용기(容器)들은 무상함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낼 예술의 위상을 예시하는 듯하다.


출전 | 월간미술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