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처음으로 생겨나던 날


빛이 있으라. 창세기는 책 제목처럼 신이 오로지 말씀만으로 세상을 만들던 당시의 극적인 순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되며, 이때 신이 처음으로 만든 것이 빛이다. 이 대목은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암시해준다. 즉 신이 처음으로 만든 것인 만큼 빛은 만유의 근본이며, 모든 생명 있는 것의 근원이다. 그리고 비록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기는 했지만(정충일은 그림을 덧그리기 전에 겔 상태의 스톤파우더로 화면에 비정형의 마티에르를 조성하는데 주로 사람 형상이다. 그 형상이 아마도 이처럼 신이 흙으로 빚어 만든 사람에 대한 유비적 표현일 것이다), 정작 사람이 살아갈 터전인 세상을 오로지 말씀만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 곧 이성을 뜻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좁은 의미로서의 이성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 실체는 단순한 이성으로서보다는 오히려 아니마 곧 호흡, 숨결, 생기에 가깝다(신은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그로 하여금 비로소 생령 곧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되게 했다. 여기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해본 사람에 대한 정의가 유래한다. 사람은 말하자면 살아있는 영적 존재며, 육체를 덧입은 신령스런 존재다. 예수가 몸을 교회에다 비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즉 몸을 영이 거하는 집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빛이 말씀으로부터 비롯됐고, 그런 만큼 빛보다 말씀이 선행한다는 사실이다. 말씀은 비록 로고스, 이성, 아니마, 호흡, 숨결, 생기 등등으로 그 실체를 추상해볼 수는 있으나, 엄밀하게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대상이며, 심지어는 인간의 논리로 이해할 수는 없는 불지론(不知論)의 대상인 것(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을 비롯한 신적 존재에 대해 엄밀한 학적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철학에서 제외시키기도 했다). 그 실체는 말하자면 선험적인 곧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인식할 수는 없는 순수관념 자체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 그 의미가 플라톤의 이데아와 플로티누스의 일자에 부합한다. 즉 신이 말씀으로 만유를 만든 것처럼(말씀창세), 만유는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이데아모방론), 그리고 일자로부터 유래한 것이다(일자유출설). 말씀은 말하자면 만유가 유래한 일종의 핵과도 같은 것으로서, 신화로는 옴파로스(세계의 배꼽)와, 그리고 과학적 가설로는 화이트홀(물질을 삼키는 블랙홀과는 반대로 물질을 내뱉는 또 다른 핵)과도 통한다.



정충일은, 그 실체를 무엇으로 부르든, 그 핵으로부터 세계가 비롯된 극적인 순간의 장면을 그림으로 옮겨놓고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 이상에서 살핀 세계의 근원에 대한, 그리고 궁극적으론 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물음, 일종의 자기반성적인 물음이 그림을 견인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고 있다. 공공연하게는 중심을 상실하고(한스 제들마이어) 신을 상실한(니체) 시대에, 본질, 원형, 궁극이 의심받고 폐기된 시대에, 그리고 그렇게 폐기된 빈자리를 감각적 표면이 대신 메우고 있는 시대에, 그렇게 상실되고 폐기된 중심을, 신적 존재를, 근원을 다시 묻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재차 거대담론을 호출하고 복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거대담론은 진정 더 이상의 의미를 상실하고 폐기됐는가. 여기에 대해 새삼 답을 하자면, 거대담론은 의미를 상실할 수도 폐기될 수도 없다. 관념적 동물이기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인간은 결코 거대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인간이 어떻게 다만 한 순간이라도 자기를 잊고(혹은 잃고), 자기반성적 행위를 멈출 수가 있겠는가. 인간의 피부는 또한 얼마나 연약하고 민감한가. 자기라는 지극한 족쇄. 아무리 멀리까지 갔다가도 반드시 자기에게로 되돌려지고(되돌아오고) 마는 지극한 강박. 거대담론은 끊임없이 자기의 주변을 맴도는, 어쩌면 끝내 붙잡을 수가 없는, 자기를 향한 그리움(나르시시즘? 진아 眞我?)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빛으로 돌아가 보자. 미술사(엄밀하게는 서양미술사)에는 빛과 관련한 의미심장한 세 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 첫 번째가 중세 이콘화에 등장하는 영적인 빛이다. 주로 성자의 머리 뒷부분에 원반처럼 둘러쳐진 빛으로서, 그가 성스러운 존재임을 표상하는 빛이다. 원반을 기본형으로 하여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는 후광 곧 님부스(nimbus)는 빛을 추상화한 것으로서, 일종의 빛의 상징, 빛의 기호, 빛의 도상이라 할 만 하다. 그런 만큼 상징적 의미와 함께 도상성이 강하다(작가의 빛 그림이 특히 이 영적인 빛, 상징성과 도상성이 강한 빛의 에피소드에 힘입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 에피소드가 일군의 바로크 화가들, 특히 램브란트를 사로잡았던 심리적이고 존재론적인 빛이다. 마치 얼굴 안쪽에서 배어나온 듯 얼굴을 투명하고 부드럽게 감싸는 그 빛은 흡사 비가시적인 심리적 정황을 얼굴의 표층 위로 가시화한 것 같은, 내면적인 인상을 준다. 그리고 세 번째 에피소드가 인상파 화가들의 광학적인 빛이다. 멀리서 보면 형태가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면 다만 무분별한 빛(터치)의 편린들이 보일 뿐인, 사물을 구축하고 해체하는 빛이다(인상파는 다르게는 외광파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정충일의 그림에는 이와는 또 다른, 빛과 관련한 세 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 중 전형적인 경우가 화면의 중심에서 사방의 가장자리를 향해 방사되는 빛이다. 중심성이 강한 구도나, 대개는 좌우대칭이 엄격한 편인 화면이 감각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이다. 중세 이콘화들이 대개 후광은 물론이거니와 그림 자체가 이미 이런 전형적인 구도를 취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목(신의 말씀)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그 효과는 작가의 그림에서 상대적으로 더 추상적이고 암시적인 형태로 극대화된다. 그림에서 빛이 뿜어지는 자리 곧 중심은 만유가 기원한 존재의 핵이며, 신의 말씀이며, 세계의 배꼽에 해당한다. 그곳으로부터 무분별한 듯 생명의 씨알들이 뿜어져 나오고, 그 씨알들이 어우러져 사람이 되고 존재가 되고 만유가 된다. 때로 씨알들은 우주적 자궁(매트릭스) 속을 맹렬하게 헤엄쳐가는 정충 같고, 생명의 환희를 축제처럼 맞아들이는, 온갖 현란한 색깔을 덧입은, 흩날리는 꽃잎(꽃비?) 같다. 그리고 이 경우의 빛은 사방으로 방사되는 원형으로 인해 다른 경우의 빛에 비해 우주의 도상(마찬가지로 원형인)을 더 직접적으로 암시하며, 보기에 따라선 눈(신의 눈?) 같기도 하다.

그리고 두 번째 에피소드가 기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빛이다. 여기서 빛은 정해진 방향을 따라 흐른다기보다는 다소간 무분별한 자율성을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마치 가지런한 실타래 뭉치들을 연상시키는 이 빛의 다발은 일종의 음기와 양기로 분화되고, 분화된 두 기가 서로 어우러지고, 스미고, 충돌하고, 폭발한다. 일정한 방향성을 지향하는 빛의 경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유기적이고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강한 느낌이다. 그리고 세 번째 경우의 빛이 화면을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지르는 촘촘한, 그리고 가지런한 선들을 그려낸다. 이 경우의 빛은 다른 경우의 빛들과는 사뭇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주는데, 이를테면 발이나 블라인드 같은 차양을 통해서 본 빛의 질감을 상기시킨다. 시각적으로(그리고 심리적으로) 외계와 직접 맞닥트리게 하기보다는 한차례 걸러서 만나지게 한다. 이로부터 은근하고 부드러운 빛의 질감이 감촉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차양은 일종의 가림막이며, 가림막이 세계에 대해 갖는 관계는 이중적이다. 즉 세계로부터 나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격리시킨다. 다른 경우의 빛들이 우주적 도상성과 상징성, 그리고 관념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라면, 이 경우의 빛은 심리적이고 내면적이고 감각적이다.

이로써 정충일은 우주가 처음 생성되던 극적인 순간을 특히 빛을 매개로 해서 박진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다소간 추상적인 그림이 빛의 성질을(혹은 질료를) 오히려 더 설득력 있게 와 닿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빛이 아우르고 있는 상징적 좌표들, 이를테면 만유의 근원, 핵심, 본질, 원형, 궁극, 씨알, 모나드, 단자, 원소의 실체에 대한 사유에로 이끈다는 점에서 관념적이고 명상적이다. 그리고 작가가 근작에 부친 <태초에>란 주제나, <태초에-빛> 혹은 <태초에-물과 물>이란 제목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특히 <태초에-물과 물>이란 제목에는 두 개의 물이 나오는데, 이는 신이 본래의 궁창을 하늘의 물(하늘)과 땅의 물(바다)로 나눈 창세신화에 착안한 것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에서 물은 물 자체로서보다는 하늘이 빛과 함께 동시에 물(하늘 물?)도 상징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그리고 청색조의 화면으로 상징되기도 하는). 자연과학으로 치자면 물이 뭍에서 하늘로, 재차 하늘에서 뭍으로 순환하는 반복운동을 표상하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더불어 중요한 사실은 물이 빛과 함께 생명의 전형적인 메타포라는 것. 이로써 정충일은 생명의 두 상징 축인 빛과 물을 매개로 하여 생명의 근원에로, 최초의 생명이 막 잉태되던 극적인 순간에로, 바로 그 미지의 현장에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