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기억들, 하이퍼링크되는 의식의 지점들



전시의 개념
미래의 기억들. 이번 전시의 제목이 유래한, 건물 외벽에 영문자를 네온으로 설치한 로랑 그라소의 작품이기도 한 이 말은 선형적 시간 개념으로는 말이 되지가 않는다. 하지만 의식적인 차원에서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진즉에 프루스트가 의식의 흐름에 대해 예시한 바도 있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자유롭게 하이퍼 링크시키는 것이 의식의 속성이다. 이번 전시는 이런 의식의 속성에 착안한 것이며, 더불어 현대미술 나아가 앞으로 도래할 미술의 향방을 가늠해본다는 취지도 덧붙일 수 있겠다.

그리고 부제로서 몇 가지 개념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 개념들은 그대로 현대미술의 달라진 환경과 생리를 대변해주는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이를테면 <유동적인 진실>은 진실의 상대성을 말해준다. 절대적인 진실은 없다. 다만 상대적인 진실이 있을 뿐이다. 예컨대 김홍석의 <개 같은 형태>는 관점에 따라서 개처럼 보일 수도 있고, 한갓 쓰레기 봉지처럼 보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기울고 과장된 구성에 대한 연구>는 현대미술에 대한 인용 내지는 논평으로 볼 수도 있고, 그저 종이상자를 되는대로 쌓아놓은 무더기로 볼 수도 있다. 진실을 진실로 만들어주는 것은 관점이며, 그 관점이 유동적이므로 진실 역시 유동적이다.

그리고 <영원에서 순간으로>에서는 예술은 과연 영원불멸한 것인가를 묻는 한편, 일시적이고 사라지는 탈물질화 경향으로 나타난 현대미술의 한 속성을 다룬다. 이를테면 전시 참여 작가 사사는 작품으로서 전시 개막식을 위해 특별히 케이크를 주문했는데, 개막식이 진행되면서 그 케이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신미경은 비누로 만든 비너스 상을 화장실에다 비치해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 비누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이 닳아 없어지게 했다. 이처럼 현대미술은 일시적이다. 그렇게 없어진 작품은 달콤한 맛에 대한 기억과 손에 감촉돼오는 비누거품의 촉감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도 잠시 동안만 그럴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념비를 기념함>에서는 현대미술의 한 경향으로서의 인용과 차용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는 제프 쿤스를 차용한 김홍석의 <개 같은 형태>와 <토끼 같은 형태>에서 보듯, 원본을(그리고 그 의미를) 재배치하고 재배열하는 것에서 원본의 아우라가 상실된 시대에 예술의 존재의미를 찾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요 경향들
전시에 참여한 주요 작가들을 보면, 우선 권오상은 사진과 조각을 결합한 독특한 방식을 예시해준다. 잘게 나눠진 사진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등신대 크기의 인체나 사물을 재현한 그의 작업은 사진 한 장 한 장의 리얼리티가 모여 전체를 이루는 일종의 데오도란트 타입의 사진을 실현한 것이다. 이러한 프로세스 상의 특징으로 인해 그의 작업은 흔히 조각적 사진 또는 사진적 조각이란 말로서 형용되며, 이는 곧 조각과 사진의 범주와 방법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마치 환조에서처럼 3차원적인 입체감과 질량을 가진 덩어리로써 일정한 공간을 점유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진의 표면적인 세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로써 조각과 사진의 경계를 허무는 한편, 실제를 재현하면서도 그 조작적인 과정을 공공연하게 노출시킴으로써 오히려 특유의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이로써 실재와 재현, 실재와 이미지, 실재와 허구로 나타난 존재의 양면을 동시에 열어 놓는다. 부분 이미지의 편린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조합한 결과, 실제가 일정하게 왜곡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그대로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선입견과 신뢰감을 심각하게 재고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신미경은 비누를 재료로 하여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석상이나 각종 전통적인 도자기 그대로를 모각하고 재현한다. 이로써 외관상 각각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의 전통적인 아이덴티티를, 전형적인 아이콘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일련의 작업들을 트랜스레이션이라고 명명한다. 번역이라는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번역은 원본과 사본과의 관계를 함축한다. 이때 원본과 사본 간에는 일정한 차이가 발생하며, 나아가 사본은 원본을 자기화하기조차 한다. 번역 행위는 말하자면 생리적으로 상호작용성과 상호영향사를 수반한다는 말이다. 외관상 고대 석상이 서양문명에 그리고 도자기가 동양문명에 속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자체 결정적인 사실로서보다는 상호작용성과 상호영향사의 소산으로 봐야한다는 말이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서양은 동양에 대해, 그리고 동양은 서양에 대해 서로 열려져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럼으로써 자기 속에서 타자를, 타자에게서 자기를 찾아보도록 유도한다.

또한 잭슨 홍은 신체장기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 장기를 디자인한다? 무슨 생체공학을 연상시키는 이 개념으로 작가는 현대미술의 또 다른 한 장을 예시해준다. 이를테면 휴대용 위와 같은 인공장기, 기계장기 등 유기체적 기계장치의 개념은 어쩌면 앞으로 도래할 미래형 미술을 예감할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에서의 <땀샘>은 살색으로 도색한 패널을 설치한 후, 역시 일일이 살색으로 채색한, 누르면 액체를 분비하는 손세정기들을 그 표면에 배열한 작업이다. 여기서 패널은 피부로, 그리고 그 표면에 장착된 낱낱의 손세정기는 비누 대신 땀을 분비하는 땀샘으로 그 의미기능이 변용된다. 이로써 마치 땀을 분비하는 거대한 기계피부를, 기계땀샘을 대면하는 것 같은 생경한 느낌을 준다. 인공 기물이나 인공 환경을 매개로 생체피부조직을 흉내 낸 것 같은, 일종의 유비적 표현이, 알레고리가 읽힌다.

그런가하면 김홍석은 속을 채워 넣어 묶은 크고 작은 검은 비닐봉지를 조합해 만든 <개 같은 형태>와, 종이상자를 얼기설기 쌓아놓은 <기울고 과장된 구성에 대한 연구>를 제안한다. 각각 레진 캐스팅으로 작품으로서의 최소한의 보존성을 기하긴 했지만, 외관상 그것들은 영락없는 비닐봉지며 종이상자로 보이고, 그런 만큼 (상식적인) 작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비닐봉지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레진 캐스팅으로 드러나고, 개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비닐봉지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비닐봉지와 레진 캐스팅의 사이, 개와 비닐봉지의 사이, 보이는 것과 읽히는 것 사이, 실제와 언어 혹은 개념의 사이 어디쯤엔가 작가가 생각하는 현대미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건물 외벽에 영문자 를 네온으로 설치한 로랑 그라소의 작품은 개념미술 이후 예술과 언어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최근 현대미술의 한 경향을 엿보게 한다. 그 경향은 소피 칼의 작업 <남편_만남; 불모; 언쟁; 건망증; 라이벌; 거짓 결혼식; 결별; 이혼; 타인>과도 일정부분 통하는데, 사진과 텍스트를 아카이브 형태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내용적으로 몸과 관계 그리고 아이덴티티를 테마로 한 성정체성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외관상 진실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은 이면에서 사실은 진실과 허구를 긴밀하게 직조해 자신만의 진실된 허구(허구적 진실?)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실제서사와 허구적 서사의 경계를 허물어 소위 순수한 정체성에의 신념이 사실은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주지시킨다. 그런가하면 사진과 영상 아카이브로 구성된 디르크 플라이쉬만의 작품 <나의 열대우림농장>은 국제적으로 공기가 거래되고 있는, 비교적 최근의 지구생태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외에도 작가들은 공간과 내외 벽면에 가변적인 설치작업의 형태로 개입한다(곽선경, 마이클 린, 창 킨-와).

삼성미술관 리움이 잠정적으로 공백기를 가진 이후에 재개관하면서 그 첫 전시로 연 이번 전시에서 현대미술의 스펙트럼은 대략 탈물질화 경향과 일시적인 미술, 그리고 소통문제와 개념미술 이후를 예비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현대미술은 이제 그 자체 완결된 체계로서의 조형물로서보다는 한시적인 경험을 매개시켜주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고, 언어와 기호를 매개로 타자와의 소통의 계기를 트는 과정에 참여하는 행위가 되었다. 개념에 더 가까워진 것도 같고, 오히려 전에 없던 감각을 열어놓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