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시티서울 2010, 지금 다시 신뢰를 묻다


너는 나를 신뢰 하는가
트러스트(Trust). 2000년 창설된 이후 올해로 10주년이자 6회 째를 맞는 미디어시티 서울 2010이 주제로 내건 이 말은 신뢰를 의미한다. 그리고 신뢰는 관계로부터 온다. 나와 너와의 관계,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 개별주체와 제도와의 관계, 국가 간의 관계, 민족 간의 관계, 가치관과 가치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와의 관계를 비롯한 일체의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관계의 층위들을 아우르는 것. 특히 세계화와 전지구화가 사실상의 자본주의화를 의미하게 된 지금 그 모토로부터 허다한 관계들이 파생된다. 관계가 신뢰를 위한 인식론적 지도인 셈인데, 문제는 그 지도로부터 신뢰로 표기된 지형학적 장소를 찾아볼 수가 있는지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주제는 신뢰를 저버린 시대, 신뢰하는 척하는 시대, 나아가 아예 신뢰를 판단할 수가 없는 시대에 대한 반어법적 표현처럼 들린다. 우리 모두는 타국에 대한 원조가 알고 보면 자국이 필요로 하는 자연재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는 기획과 맞물려 있는, 테러리즘이 자국 이기주의와 중첩돼 있는, 세계보건기구가 다국적 제약회사의 이해관계와 포개져 있는 세계에 살고 있고, 표면과 이면이 다른, 나아가 어디서 어디까지가 표면이고 이면인지 분간되지가 않는 세상에 살고 있고, 휴머니즘이 오용되고 남용된 나머지 마침내 아무런 생산적인 의미도 의미할 수가 없게 된, 소위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신뢰의 짝패는 불신이다. 신뢰의 이면에는 불신이라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결국 신뢰라는 주제는 불신이라는 주제로 바꿔 읽을 수 있겠고, 불신을 부각하기 위한 구실로 읽을 수 있겠다.

문제는 미디어가 더 이상 창작주체의 전유물일 수가 없게 되었으며, 사실상 생활사 내지는 일상사로 자리한 미디어 환경이 창작주체와 향수주체, 실천논리와 실천논리에 반하는 논리의 경계를 재빠르게 허물면서 신뢰든 불신이든, 표면이든 이면이든 싸잡아서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현상은 있는데 정작 그 현상에 대한 판단은 없는(혹은 아예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이 기형의 시대를 말하자면 스펙터클 소사이어티 곧 구경거리의 사회(기 드보르)로 부를 수 있을 것. 이번 전시는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고 있는 것 같다. 지구 풍경의 스펙터클을, 신뢰의 얼굴을 한 불신(최소한 의구심)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치적 미디어와 이미지의 정치학
흔히 일반적인 용법으로 미디어아트는 각종 첨단의 신종 미디어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신문, 잡지, TV, 인터넷과 같은 각종 대중매체(매스미디어)를 아우르며, 이때 그 논의는 대개 이미지를 생산하고, 분배하고, 소비하는 유형무형의 메커니즘과 관련한 소위 이미지의 정치학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말하자면 익명의 얼굴을 한 이미지의 출처를 묻는 것이며(누가 이미지를 생산하고 분배하는가), 사실과 실제의 얼굴을 한 이미지의 실체를 묻는 것이다(누가 이미지를 조작하는가).

이를테면 작가 김범은 TV에서 방영된 뉴스 영상물들을 재편집한 비디오 작업을 보여준다(무제). 영상물을 임의적으로 잘라 붙인 것인데, 단편적인 분절음들만 알아들을 수 있을 뿐 전체적인 의미와 맥락은 도무지 감 잡을 수가 없다. 뉴스가 생산되는 과정을 통해서 실제가 잘려나가고 다른 실제가 덧붙여지는, 그래서 종래에는 실제 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대로를 흉내 내고 극대화한다. 이로써 매체를 통해서 유포되는 뉴스가 실제 그대로를 전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은밀하게나 공공연하게 편집된 것임을 주지시킨다. 조작된 리얼리티, 만들어진 리얼리티, 연출된 리얼리티와 직면케 함으로써 리얼리티에 대한 신화를 재고하게 한 것이다.

이처럼 미디어는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실제를 가장한 허구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일종의 이미지 극장에 비유할 수 있다. 마치 연극무대 혹은 극장처럼 재구성된 법정을 소재로 한 주디 라둘의 작업이 이 문제를 건드린다(법정극장). 작가는 실제의 법정장면이 마치 인기 있는 TV 드라마나 단막극만큼이나 극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리고 그 장면 그대로 연출하고 재연한다. 발언하는 사람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보여주고, 이따금씩 상대방의 반응하는 얼굴을 내보낸다. 모든 과정이 극적 긴장감을 유도하기 위해, 그리고 종래에는 대단원을 향하도록 연출된다. 분명한 것은 연출에도 불구하고 이 일련의 장면들은 실제를 전용(해석)한 것이 아니라 실제 그대로라는 점이다. 실제 자체가 이미 충분히 극적이고 감동적이고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다. 스펙터클 소사이어티. 구경거리의 사회. 어쩌면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제목의 드라마 내지는 영화가 방영되고 있는 거대한 미디어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점의 문제. 누가 시점을 선점하는가, 하는 문제. 시점은 곧 권력이다. 예컨대 노순택은 평택 대추리를 배경으로, 레이돔이라는 이름의 미군기지가 운영하는 공 모양의 고성능 레이더를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해 보여준다(얄읏한 공). 한국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정보를 채집하는 미국의 감시망을 역추적해 보여주는, 역전된 시점을 통해서 권력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미키 크라츠만은 이스라엘이 테러리즘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현실 그대로를 흉내 내고 재연한다(표적살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접경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인이 겨눈 총구의 가늠자에 클로즈업된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무방비로 노출된 일상이 극적 긴장감과 함께 시점이 곧 권력임을 재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정치적 미디어와 이미지의 정치학.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은 초현실적 분위기의 영상을 통해서 타이의 정치적 현실을 코멘트하고, 빌럼 데 로이는 네덜란드 국가의 공식 색상인 오렌지색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면서 네덜란드의 국가주의적 상황을 함축한다. 이미지를 일종의 국가적 정체성의 상징으로서 해석한 것. 이처럼 이미지는 사람들을 움직이고, 그의 의식을 파고들고, 그로 하여금 행동하게 한다. 예컨대 나스린 타바타바이 & 바박 아프라시아비는 미국 내 이란 망명자들의 방송으로 시작된, 로스앤젤레스에 소재한 이란 위성 TV방송국을 배경으로 한 작업에서 자국의 정세에, 그리고 자국과 미국과의 관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방송국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그리고 앨런 세큘라는 미국 시카고에 살고 있는 백만 명 정도의 폴란드 이주민들로 구성된, 바르샤바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의 폴란드 커뮤니티인 폴로니아를 통해서 사실상 제2의 미국으로 예속된 폴란드의 정치적 현실을 증언한다.

이외에도 칼 맑스의 동상을 보고 연신 나는 당신을 증오한다고 외치는 여인에게서, 백인 여자가 내뱉는 중국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공산주의 중국과 자본주의 패권을 장악한 중국이 부닥치는). 그리고 가미가제 출정식을 앞둔 청년, 혹은 할복자살을 감행하는 군인의 꽤나 심각한 의식을 성적 오르가즘에 결합시킨 급진적인 유머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은 표면을 비틀어 그 이면에 은폐된 이미지의 실체를 드러내고, 이미지에 대한 환상을 교정하고, 이미지에 대한 선입견을 재고하게 한다. 현실을 담는 미디어
마침내 미디어시티가 현실을 담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디어시티가 테크놀로지의 감각적 표면을 더듬어온 것에 비해보면 현저한 변화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굳이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마샬 맥루한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미디어만큼 현실을 담아내기에 적절한 용기도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미디어가 곧 현실임을 생각하면 때 늦은 감이 없지만은 않다. 달라진 것은 이처럼 현실을 담는 것에 치중하다보니 하이 테크놀로지보다는 올드 미디어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는 것. 여기에 도쿠멘타와 아카이브, 정치적 비디오와 이미지의 정치학, 그리고 스펙터클 소사이어티와 같은 비교적 고전적인 담론들, 나아가 재현과 서사와 소통과 같은 전형적인 문제의식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그런 만큼 새로울 건 없지만, 의미 있는 변화임에는 틀임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