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more daughters & heroes. 더 이상 딸들은, 그리고 영웅들은 안 돼! 짐짓 결의에 찬 이 선언문 투의 주제는 딸이라는, 그리고 영웅이라는 언어용법에 스며들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혐의를 주지시킨다. 페미니즘과 영웅 이데올로기를 문제시한 것인데, 여기서 페미니즘은 여성주의를, 남성주의를, 타자론을, 그리고 몸담론을 아우른다. 그 자체로는 규정할 수 없는 개성(혹은 개별성)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여성주의는 남성주의와 통하고,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타자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타자론과 통하고, 정신의 관점에서 여성을 몸(자연)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몸담론과 통한다. 그리고 영웅을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읽으면,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는가, 라는 린다 노클린의 물음과 만나진다. 그 이유가 이데올로기의 결과이듯, 여성주의도 영웅도 하나같이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것.
2010 아람미술관 해외교류특별전 형식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은 젠더 개념을 매개로 성과 관련한 사회적 편견을 다룬다. 그리고 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주체문제, 정체성문제, 타자와의 관계문제, 개별주체와 제도와의 관계문제, 정상성과 비정상성 문제로 확대 재생산된다. 이 모든 문제의식의 지점들은 사실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전시에서 작가들은 사회적 편견으로 굳어진 전형성의 경우로 이 문제에 접근하기도 하고, 그 전형성을 해체하는 경우로 이 문제를 풀기도 한다.
전형성의 경우
유리 라이더만은 전시장에 설치된 간이 오두막에 거주한다. 그리고 매번 오두막 밖으로 걸어 나와 관객들에게 뭔가를 말하려하지만, 그럴 때마다 관객들이 자루로 그의 머리를 후려쳐 도로 오두막 안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서 관객은 익명의 얼굴을 한 제도와 권력을 암시하며, 작가의 메시지는 매번 그 권력에 의해 차단되고 봉쇄당한다. 제도가 개별주체에게 가해오는 보이지 않는 린치를, 그리고 주체와 타자와의 불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송호준의 조립된 남근은 우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인공위성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여기서 남근은 말할 것도 없이 팔루스를 상징하며, 권력을 상징하며, 개별주체를 억압하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제도를 상징한다.
이와 함께 하룬 파로키는 포르노그래피가 생산되는 스튜디오 현장을 보여준다. 스튜디오에서 모델은 스텝들의 세심한 연출에 예속되고 통제된다. 모델도 스텝도 하나같이 성실한 직업의식으로 임할 뿐, 그 어디에도 욕망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렇듯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욕망을 자극하는 이미지, 유혹하는 이미지가 생산된다. 그러나 그 뜨거운 이미지 속에 정작 그 계기를 제공했던 욕망은 없다. 욕망이 한갓 욕망의 기호로, 이미지로 전이되고 가공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김영섭은 사람들에게 남자의 조건과 여자의 조건에 대해 물었고, 그 인터뷰 과정에서 채록된 조건들을 각각 남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여자의 입장에서 서로 마주보며 말하게 했다. 그 말의 성분들은 서로 스미고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어긋나고 상대를 찌르기조차 한다. 여성에 대한, 그리고 남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클리세)을 반영하는, 마치 선전전처럼 연출된 이 전쟁에서 생리적인 나는 통념적인 나에게 가려 추방되고 만다.
전형성을 해체하는 경우
폴라 지버딩은 성전환자와 클럽문화, 나아가 죽음마저 아우르는 소위 비정상성과 하위문화를 소재로 그 자체의 존재성을 부각한다. 이로써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구분하고, 주류문화와 서브컬처를 나누는 관례가 필연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제도가 만든 이데올로기의 기획에 연유한 것임을 폭로한다. 그리고 캐나다 출신 가수인 피치스는 자궁처럼 생긴 간이 오두막 속에 열성적인 팬들로부터 받은 선물들, 팬티와 브래지어와 성기구 등 주로 성적 패티시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로 치장했다. 아늑하고 우호적이고 그로테스크하고 생경한 느낌. 작가의 퍼포먼스도 그렇지만, 성구분에 대한, 성결정론에 대한 의구심으로 다가온다. 성과 관련한 경계허물기의 최전선을 보는 것 같고, 경계를 허물기 위해 건강한 욕망이 부활되고 호출되는 것을 본다.
그런가하면 김성래가 만든 순백의 웨딩드레스에는 먹물이 스며든다. 순결을 상징하는 웨딩드레스가 먹물에 의해 점령되고 더럽혀진다. 욕망(순결하고 싶은 욕망)과 욕망(순결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이 부닥치는 것도 같고 화해하는 것도 같다. 이중적이다. 그리고 이 이중성은 그대로 보금자리와 예속으로 나타난 결혼 이데올로기의 이중성과도 통한다. 그리고 여자의 젖가슴을 나이 순서로 배열해놓은 <삼대>가 친근하면서도 낯 설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이물스런 느낌을 준다. 거세불안(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여성주의의 버전처럼 보인다.
이 이중성은 집을 소재로 한 김지혜의 작업에서도 나타난다. 즉 집 자체는 이중적이다. 집은 나에게 친숙하지만 동시에 너에게는 낯설다. 그리고 너는 너이면서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나의 또 다른 나. 물 밖의 나르시스와 물 안의 나르시스. 의식적인 나와 무의식적인 나. 이 이중적이고 분열적인 나를, 내가 존재하는 장소들을 집은 대리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집은 동시에 친숙하면서 낯설다. 캐니와 언캐니. 친숙함과 낯설음은 서로 한 몸이다. 친숙함은 낯설음을 예비하고, 낯설음은 친숙함 위로 솟아오른다. 프로이드는 친근한 것이 어느 날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 두려움이 생겨난다고 했다. 집은 친근하면서 낯설고, 안온하면서 두렵다. 속속들이 알려져 있으면서,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채로 남겨져 있다.
또한 얀 페터 E.R. 존탁은 방 하나를 초록색 광선으로 꾸몄다. 팔레트에 담아낼 수는 없는, 초목의 다채로운 색조로도 옮길 수는 없는 빛의 색이다. 빛의 색으로 감싸인 공간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심리적이고 관조적인 경험에로 유도한다는 점에서 제임스 터렐과도 상통한 부분이 있다. 터렐의 경우도 그렇지만 존탁의 방은 부드러운 색감과 우호적인 질감으로 그 자체가 여성의 자궁이며, 원초적인 우주며, 존재의 모태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정의 색채로 환원되지는 않는, 풍부한 스펙트럼을 내장하고 있는 이 비결정적인 빛의 질감이 성결정론의 경계를 허무는 또 다른 제스처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작가 토마스 엘러는 축구선수 토마스 엘러를 만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축구친선경기를 했다. 여기서 두 사람은 Doppelpass 즉 상대방을 피해 두 명의 선수가 재빠르게 공을 주고받는 기술을 구사한다. 내가 공을 주고 네가 공을 받는다. 내가 공을 주고 또 다른 내가 공을 받는다. 나는 공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고 공을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연하게, 혹은 우연찮게 일종의 자기역할극(자기가 자기를 연기하는, 자기를 객관화시켜보는) 내지는 자기 분신극(자기가 타자로 전이된 또 다른 자기를 연기하는)을 연상시키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정체성이란 마치 역할극과도 같은 것이어서 결정적이지가 않다.
이와 함께 카타리나 지버딩은 분장한 자신의 얼굴들을 하나의 화면 위에 중첩시켜 여러 이질적인 개성들이 하나로 포개진 인격의 레이어를 연출한다. 트랜스포머. 정체성이란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지가 않다. 그것은 변형되고 미끄러지며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인격(타자)들의 집합이며, 그 자체로는 규정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질 들뢰즈는 주체를 그저 막연하게, 그리고 습관적으로 주체라고 부르는 허명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랭보는 자신이 곧 신이며 악마며 타자라고도 했다. 남성과 여성, 주체와 타자, 그리고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나누는 경계는 모두 이데올로기가 그어놓은 선에 지나지가 않는다. 나는 곧 너다.
그런가하면 정정엽의, 칠흑이지만 투명함으로 청명한 느낌을 주는 우주 속을 부유하는 얼굴 위로 싹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실핏줄이 실개천처럼 흐르고, 콘크리트 잔해가 허물어져 내린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내 생각의 주름 속에 기입되고, 그곳으로부터 샘솟는다. 분수처럼 샘솟는 생각의 다발들. 얼굴은 더 이상 사회에 내어준 기호(예컨대 우호적인 얼굴 혹은 적대적인 얼굴)가 아니라, 사사로운 감정의 편린들이 차곡차곡 쟁여지는, 혹은 들락거리는 생각의 저장고가 된다. 생각은 더 이상 정신, 이성, 관념 위로 샘솟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한 감정들 위로, 몸 위로, 얼굴 위로 밀어 올려진 그 무엇이 된다. 얼굴은 더 이상 사회학적 기호도 아니고, 정신을 대리하는 브레인센터는 더더욱 아닌, 다만 무분별한, 걷잡을 수 없는 생각의 조각들이 등재되는 표기할 수 없는 지표가 된다.
그 자체 새로울 것은 없지만, 성에 대한 널리 알려진 통념을 재확인시켜주고, 그 통념을 교란하고 교정하는 실천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아람미술관이 기획한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 중 하나로 기억되지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