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and 그리다. 그리고 또 그린다? 김동석이 자신의 근작에 부친 이 주제는 그 속에 회화의 본성 혹은 본질에 대한 물음이 들어있다.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반성의 대상으로서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자기를 몰입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회화의 행위를 통해서 회화의 본성(회화 자체)을 묻는 일종의 메타회화가 수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물음은 전형적인 모더니즘적 문제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주제는 그리고 또 그리다 보면, 오로지 그리는 과정 속에 오롯이 자신을 투신하다 보면 좀체 자신을 내어주지 않던 그림이 그 투신에 감복해서 마침내 자신을 내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읽혀진다. 그러나 정작 필자에게 이 주제는 그저 막연한 기대나 때론 무의미할 수도 있는 맹목(말할 것도 없이 그림에 대한 기대나 맹목)으로서보다는 일종의 의지로 읽혀진다. 이를테면 내가 진정 투신할 수 있는 것, 나에게 의미를 되돌려줄 수 있는 것,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그림 밖에는 없다고 하는, 일종의 배수진을 친다고나 할까, 자기주술 내지는 자기최면을 건다고나 할까. 해서, 그 주제에선 자못 비장감마저 감돈다. 그 비장감이 그림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로부터 유래한 것임은, 그리고 동시에 이를 통해 궁극적으론 작가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연유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문제는 회화의 본성에 천착하다보면 결국 창작주체의 존재가 지워지고 회화의 형식만이 오롯해지는 지점에 이른다고 보는 것이 모더니즘의 논리라고 한다면, 작가의 경우엔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존재가 더 부각된다는 점이 다르다. 모더니즘과 작가와의 관계는 이처럼 이중적이다.
그리고 필자에게 이 주제는 왠지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기처럼 들린다. 존재에 대한 그리움. 존재의 원형에 대한 그리움. 모든 상실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다 보면 마침내 상실된 것들이 회복되고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 돌아올 수가 있을까. 그런데 작가는 도대체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회화의 본성을 그리워하고, 자신의 존재를 그리워하고, 상실된 것들(이를테면 존재의 원형 같은, 혹은 좀 더 사적으론 유년시절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시절 같은)을 그리워한다. 작가의 그림 속에, 그리고 또 그리는 행위 속에 알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이 묻어나는 것은 다만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김동석의 그림은 문학적이고 서사적이다. 그러면서도 생리적으로 소설보다는 시에 가깝다. 말을 걸어오는 방식이 풀어서 설명하기보다는 함축적이고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문법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런 말 걸기 방식은 그림에서도 나타나고 주제에도 반영된다. 이를테면 어머니의 사계(1996), 어머니의 땅-발아를 꿈꾸며(2001-2002), 어머니의 땅-또 다른 꿈(2005), 어머니의 땅-아름다운 비행(2006-2007), 나에게 길을 묻다(2007-2008), 그리고 and 그리다(2009-2010)와 같은.
그동안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부친 주제를 일별해본 것인데, 작가의 그림에서 그림과 주제는 그 의미가 비교적 일치하는 편이어서 서로 반영하고 대리하는 상호작용의 과정이 감지된다. 이 주제들에서 눈에 띠는 개념이 어머니며, 그 어머니의 존재가 작가의 그림을 지배하며, 다른 개념들로 변주되고 확장된다. 그 어머니는 실재하는 대상으로서보다는 상징적인 대상으로서 나타나고, 무엇보다도 땅을 의미한다. 그 땅은 존재가 유래한 생명의 땅이며(작가의 그림에서 화면을 대지 삼아 그 위에 씨앗을 흩뿌리거나 심는 경우로 나타난), 어머니의 품속처럼 넉넉한 기억과 회상의 보고이며(작가의 그림에서 감지되는 휴식과 쉼의 계기와 관련된), 지모(땅신)로서의 자연(존재의 원형)이다.
그런데 정작 작가의 현실인식 속에 어머니는 없다. 현실 속에서 어머니, 땅, 자연, 고향, 원형으로 이어지는 상징적 연쇄개념들은 다만 부재로써 상실감을 증언해줄 뿐이다. 그리고 그 상실감 속엔 작가와 더불어 현대인 모두의 상실감이 들어있다. 더불어 그 상실감은 더 이상 꽃 피우지 못하는 불모의 땅에서의 발아를 꿈꾸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유년기로의 아름다운 비행을 꿈꾸고, 이곳이 아닌 저곳(내세 혹은 피안?)을 꿈꾸는 것으로서 보상받는다. 비록 불완전한 보상이지만, 이처럼 꿈꾸기가 아니라면 그 상실감은 결코 치유 받지 못한다. 작가는 이렇듯 어머니의 땅을 빌려 현대인이 상실한 것들, 꿈꾸기를 통해서나마 보상받고 싶은 것들, 자연, 고향, 원형을 그린다. 작가의 그림이, 그리고 주제의식이 작가 자신의 개인사적인 경험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공감을 이끌어내고 보편성을 획득하는 대목이다.
한편으로 주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 2007년을 분기점으로 어머니의 존재가 빠져나가고 그 빈자리에 자기가 들어선다. 이를테면 나에게 길을 묻다(2007-2008)와, 그리고 and 그리다(2009-2010, 그 자체 회화적 강박이면서 동시에 자기강박을 암시하는)에서처럼. 사실 어머니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그 존재가 상징적 의미를 대신하는 경우라면, 이를테면 상실된 유년시절, 생명의 땅, 자연, 존재의 원형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경우라면 더욱이 그렇다. 여하튼 작가는 홀로서기를 꿈꾼다. 그동안 어머니의 존재가 베풀어준 상징체계의 길을 따라 우회한 연후에 비로소, 마침내 자의식에 눈뜨고, 자기반성적인 길에 들어섰다고나 할까. 그러므로 그 길의 배면에도 여전히 어머니의 존재가 스며있다(도대체 자기반성적인 인간이 존재의 원형에 가닿는 어머니의 상징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우리 모두는 모태로부터 존재론적 젖줄을 뗄 수가 있을까. 혹 뗄 수 있을 때조차 삶이란 이렇게 떼 내지기 전의 상태를 그리워하는 과정이 아닐까).
작가는 근작에서 일종의 풍경화를 그린다. 대개는 가로로 긴 화면 중간쯤에 지평선 내지는 수평선을 설정하고, 그 선을 경계삼아 땅(보기에 따라선 개펄 같기도 하고, 땅 사이로 지나가는 길 같기도 한)과 하늘이,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맞물리게 했다. 옆으로 긴 풍경 앞에 서면 아득하고 멀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지평선과 수평선은 마치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가름하는 경계선 같다. 더욱이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사람이 없고 풍경만이 오로지 오롯한 경우라면 이 느낌은 더 크게, 더 깊게 와 닿는다. 그 느낌 그대로 관념에 빠져들게 만든다. 풍경이 관념이 될 때, 물질이 사념이 될 때, 외면이 내면이 될 때 나는 더 이상 여기에, 화면 아래쪽 이편 세계에 속해져 있지 않다. 나는 불현듯 경계선 저편의 하늘을 꿈꾸는 이상주의자가 된다. 현실과 이상을 가름하는 경계 위에 서서 유한을 통해 무한을 보던 낭만주의의 상속자가 된다. 구름 위를 나는 배, 하늘 길을 밟는 세발자전거, 그리고 흔들의자가 무한 속으로 사라진 유년시절의 꿈을 현실 위로 되불러온다. 그리고 모든 꿈은 이상적이고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이런 관념적인 풍경화 위에다가 작가는 사군자를 베풀어놓았다. MDF에 섬세하게 판각된 사군자는 배경화면의 풍경에 묻혀 잘 보이지도 드러나지도 않는다. 희미하지만, 오히려 희미해서 자기의 존재를 더 강하게 부각하는 이 사군자로 하여금 작가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싶었던 것일까. 주지하다시피 사군자의 전형적인 의미는 유교 이데올로기로부터 왔고, 선비의 삶의 태도와 자세를 상징한다. 그 이면에는 가부장적 가치체계를 대변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작가는 이보다는 물질문명 시대에 정신적 가치를 복원하고 싶고, 시대정신의 표상으로 삼고 싶다. 흔들리는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정신의 푯대로 삼고 싶다.
김동석은 근작에서 더 이상 생명을 꽃피우지 못하는 불모의 땅 위로 사군자를 꽃피우게 한다. 전작에서 하늘을 나는 배와 세발자전거 그리고 흔들의자를 매개로 부재하는 시절, 돌이킬 수 없는 시절로의 아름다운 비행을 꿈꾸었다면, 근작에서 사군자를 매개로 홀로서기를 꿈꾼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꽤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어머니의 사계를 되불러온다.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사군자와 그 배면에 그림자처럼(무의식처럼) 깔리는 어머니의 사계. 사군자와 사계. 거칠게 말하자면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우. 이 조우에서마저 어머니의 존재는 작가의 홀로서기를 돕는 근원이며 원천이며 샘 역할을 도맡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사군자에서마저 존재의 모태로, 원형으로 되돌려지는 연어의 습성으로 인해, 자기반성적인 관성으로 인해 시적 울림과 함께 특유의 아우라를 느끼게 한다. 자기를 찾는 것은 곧 존재의 원형에로 되돌려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