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형식을 파열하는 지각의 일과성


인천 아트 플랫폼에 전시되어 있는 박혜정의 최근 작품은 고정된 중심에 근거한 형식적 통일성이 아니라, 지각의 일과성(temporality)이 특징인 그녀의 작품 경향을 압축한다. 전시된 두 개의 주트로프(zootrope)는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작가의 눈에 띄인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개발공화국의 풍경을 풍자한 것이다. 빙글빙글 돌면서 움직임의 환영을 연출하는 기계 아래에는 토목 공사에나 사용할 법한 거친 나무들로 만들어진 좌대가 있다. 그것은 막대기가 꽂힌 모래더미를 나누는 놀이에서 착안한 것으로, 막대기가 쓰러질 정도로 모래를 상실하면 지는 게임이다. 모래는 나무와 함께 건축 자재의 상징이다. 수많은 간척을 공사를 통해 지도를 변화시킨 인천이라는 장소성을, 모래더미 위에 꽂힌 막대기가 변화하는 모습으로 담아낸 드로잉 15개를 이어서 긴 구멍을 통해 보게 한다. 이 원시적인 애니매이션이 상영되는 원통형 구조물은 그자체가 건축물처럼 보이며,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공사현장을 암시한다.

건물 뿐 아니라 그것이 서있는 땅 자체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이미지를 통해, 유럽에 비해 지나치게 역동적인(?) 한국적 풍경으로 잡아낸다. 2010년 광주에서 발표한 작품 [동그라미 안에서 시간을 줍다] 역시 이동과 순환을 통한 지각의 일과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전시 때문에 서울과 광주를 고속버스로 오가면서 찍은 사진들을 연결하여 뫼비우스 띠처럼 안팎으로 연결한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산책로와 달리, 고속도로를 통한 이동은 출발점과 목적지만 있지 중간 과정은 중요치 않다. 그녀가 찍은 사진들은 대부분 속도를 위해 없어진 공간과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일회용 사진기를 사용하여 찍은 사진이 담긴 책자에는 그 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풍경들이 있다. 잠시의 휴식에 대한 지표인 깔개, 비둘기가 날아간 뒤의 썰렁한 공간, 빈 하늘 등에서 장면의 특별한 주인공과 극적 행동을 발견할 수 없다. 작가는 극히 주변적이고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들에 주목한다.

영원하지 않은 것, 상대적이고 과도기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정체성의 문제에도 관철된다. 2007년에 만든 작품 [double action]은 머리카락 하나를 실로 삼아 한 땀 한 땀의 바느질로 완성한 자수인데, 뒤를 묶지 않아 앞의 정갈한 이미지와는 달리, 머리카락 뭉치가 어수선한 이면이 동시에 만들어진다. 그것은 금발머리 사람들 사이에서 흑발의 정체성을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엉클어진 뒷면은 결코 고정시킬 수 없는 카오스적 정체성을 강조한다. 과도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문이나 움직이는 중심 같은 가구, 또는 건축적 구조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커 펜으로 실제의 문을 베껴낸 작품은 빛을 통과시키는 얇은 문으로 완성되는데, 수없이 그려진 선 자국이 남아있다. 정지된 공간은 수많은 시간의 흔적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것은 주체를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시키는 문턱이 될 것이다. 곧 완성될 작품 [여기 세상과 함께하다/Aweigh]는 일종의 전망대로 야외에 반영구 설치되는 공공작업이다.




규모가 꽤 크지만, 조립식으로 이동 가능하다. 안정된 육각형 구조는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통로를 제공해 준다. 바깥으로부터는 언덕처럼 올라갈 수 있으며 안쪽으로는 계단으로 내려올 수 있다. 그것은 몸의 움직임에 따른 지각의 극적 차이를 강조한다. 위에서 보면 거대한 꽃처럼 보이는 대칭형 구조는, 아래에서 보면 하늘을 향해 뚫린 구멍이다. 그것은 그곳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우주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하지만, 이 중심은 영원한 중심이 아니라, 항해하는 배의 닻처럼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일시적인 것이다. 이 작품은 국제공항과 항구가 있으며, 국내 최초의 정거장이 건설되었던 이 지역의 특수성을 사통팔달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인천은 머물기보다는 통과하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도시이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과도적인 지역 정체성을 강조한다. 대칭형 전망대는 물론, 뫼비우스 띠, 주트로프 등 둥글둥글한 구조에 대한 선호를 보여주는 박혜정의 작품은 직선 보다는 순환적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순환은 고정된 중심을 맴도는 반복이 아니라, 조금씩 움직이는 중심을 선회하는 나선형 운동에 가깝다. 그것은 선이나 원 같은 고정된 궤도가 아니라, 변칙적이고 과도적인 궤도로, 깔끔한 자수 뒷면의 검은 머리 뭉치처럼 무질서해 보인다. 그러나 완전한 혼돈은 아니다. 그녀의 작품은 정리된 질서의 복잡한 이면, 견고한 구조의 불안정한 토대, 시작과 끝 사이에서 생략된 과정들을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박혜정의 작품에서는 대지나 지도조차도 일시적이다. 종이를 뭉친 후 다시 펴서 선을 따라서 지도처럼 그린 작품은 시각보다는 촉각적 지도라고 할 수 있다. 밖으로 접힌 부분은 선으로 안으로 접힌 것은 점선으로 표시하고, 그것을 스캐닝해서 액자에 넣었다. 지도처럼 보이는 선들은 일종의 자동기술의 산물이다. 지도로 구현될 종이 공 만들기는, 그녀로 하여금 무료한 시간을 탈피할 수 있는 출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접힌 종이는 원근법적인 시공간과 달리, 정상적으로는 만날 수 없는 시공간을 만나게 하는 위상학적 변환을 야기하며, 선적이고 인과론적 질서에 의해 구획된 시공간으로부터 탈주하는 수단이 된다. 작품 [만질 수 있는 지도화]는 그렇게 만들어진 ‘지도’를 바니쉬 처리하고 석고로 캐스팅하여 고체화시킨 다음, 이를 부수어서 층과 층 사이의 공간에 죽 펼쳐 놓은 작품이다. 견고한 느낌으로 완성된 지형도 같은 구조물을 거울 깨듯이 파괴한다. 구조에 가해진 액션은 거울 상 같은 안정된 이미지를 파괴하고, 방황하는 시야를 창출한다. 외곽선이 명확한 공간적 대상은 시간의 추이로 해체되며, 투명한 지각이 아니라 끝없는 표면을 더듬는 듯한 지각의 불투명성이 강조된다. 새로운 대지와 지도는 광학적이 아니라, 촉각적인 공간에 놓여있다. 여기에서 실재(real) 세계는 주체가 구축해나가는 것이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조나단 크래리가 근대 시각성의 추이를 탐구한 논문 [시각의 근대화]에서 주장하듯이, 이것은 단순히 회의주의나 상대주의가 아니라, 지각과 그 대상에 대한 적극적인 재구성의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다.




시각에 있어서 중립적이거나 혹은 눈에 드러나지 않았던 신체는 이제 대상과의 투명한 관계들이라는 믿음을 망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박혜정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키워드가 되는 지각의 일과성 문제는, 그녀가 사용한 주트로프라는 시각적 장치가 가지는 의미에 다시 주목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주트로프 장치가 활용된 박혜정의 작품은 시각에서 무시간적 순간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적 시각성의 형식적 전제들을 의문시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이러한 주제를 다룬 논문 [보려는 충동]에서 시각의 비트나 고통 혹은 맥박을 강조한다. 크라우스는 그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원통형 드럼 안쪽에 시퀀스를 이루는 그림들을 붙여 돌려서 연속 동작의 착시를 일으키는 19세기의 시각적 장난감인 주트로프의 예를 든다. 크라우스에 의하면 19세기에 많이 발명되었던 과학적, 오락적 광학 기기들은 어떤 주어진 환영의 효과들을 상기시켜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환영의 생산수단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 주기도 하는 경험이라고 지적한다. 어떤 경험을 갖게 되면서 또한 그러한 경험을 갖는 자신을 외부로부터 지켜보게도 되는 것이 19세기 후반의 대중들이 스펙터클에 매료된 이유라는 것이다.

이 원시적인 영화 장치의 모델은 바로 꿈이다. 새롭게 펼쳐진 지각의 장에서 꿈을 꾸는 자는 관객이나 목격자로서 꿈의 장면을 보지만, 그 장면은 바로 그자신이 그 위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무대이다. 따라서 꿈을 꾸는 자는 그자신의 시각이 스크린 속에 존재하는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그 외부에 존재하는 구경꾼이 된다. 이 이중적 형식은 관찰자가 주트로프 내부와 외부 양쪽 모두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같은 내부에서의 경험과 외부에서의 경험을 동시에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 바로 주트로프 장에 힘차게 흐르는 비트 혹은 고동이다. 박혜정의 작품에서 이러한 시각적 고동은 앞서 언급한 작품 [동그라미 안에서 시간을 줍다]처럼, 뫼비우스 띠처럼 붙인 풍경 안팎의 풍경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에서 비트 혹은 고동이란, 내부의 환영이 보여주는 연속된 이미지들의 명멸을 가리킨다. 이러한 비트 혹은 고동은 형태(gestalt)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말소시킨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탈신체화 된 시각성에 반대하여 시각적인 것을 육체화 한다. 이러한 힘은 지각의 일시성을 강조하며, 모더니즘적 시각성에 대한 요구들, 즉 추상화된 시각과 더불어 또한 합리화된 형식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무시한다는 것이 크라우스의 논지이다.

크라우스에 의하면 이러한 시각적 고동은 형태의 안정성과 자명성에, 즉 좋은 형태의 영속성을 위협하며, 모더니즘적 시각 논리가 의존하고 있는 구별가능성의 개념을 위반한다. 그것은 시각적 공간의 안정성을 뒤흔들고, 시각성이 의존하는 형식의 일관성을 해체한다. 추상화되고 고도화된 시각성의 조건은 순수한 현재성(presentness)이라는 전무후무한 추상적 조건을 말한다. 그것은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회화의 자기 비판적이 차원에 관해서 설명했던 것이다. 시각만이 창출할 수 있는 독립된 경험 영역으로서 회화를 규정하려는 모더니즘의 논리는 근대적 자율성으로 결과 된 고립과 단절을 유토피아적 충동으로 전화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고유의 영역의 확보가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해방과 자유는 단지 희망 사항이거나 도그마였을 뿐이다. 사회 자체, 특히 박혜정이 주목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풍경 자체가 정지되어 있지 않다. 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고정된 형식과 눈이 아니라, 변화하는 풍경을 온몸으로 통과하면서 그 과정을 흔적들로 남겨놓으려 한다.

출전 | 인천아트플랫폼 비평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