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의 최근 작품은 금속성 구조물과 유기적 형태 사이의 극적 조합이 특징이다. 모종의 기능을 위해 고안되었으며, 입력된 방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구조 안팎에는 기계와 어울리지 않는 알, 머리카락, 거품 등 유기적 잔여물들이 끼워져 있곤 한다. 가차 없이 예정된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 기계는 유기체를 보호하고 배려하기 보다는 자신의 기능에 맞춰줄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계는 그것들을 단번에 으스러뜨리고 사라지게 할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움직이는 그의 작품은 머지않아 유기체에 가해질 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며, 그것이 불안과 긴장을 자아낸다. 막강한 구조의 작용과 취약해 보이기만 하는 유기체 및 그 잔해들의 조합은 폭력을 내포한다. 그 폭력은 내밀한 쾌락에서 처참한 죽음에 이르는 다양한 스케일을 가진다. [disease-reveal a body]처럼, 기계가 없는 작품도 사건 전후에 그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 작품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앞차에서 추락한 살아있는 돼지들이 다른 차들에 치어서 으깨진 시체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인데, 죽 펼쳐진 잔해들은 자동차라는 기계와 속도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는 작품 [국가]에서 이 잔해를 한반도 지도 모양으로도 배열하기도 하였다. 찢긴 살덩어리가 산 모양이 되고, 나머지가 그 사이를 흐르는 물이 되는 시각적 유사성 속에는, 자연과 몸 사이를 잇는 신성한 유비의 그물망이 사라져 있다. 최근 인천 아트 플랫폼에서 전시한 작품 [나는 그렇게 보였다](2010)에서는 모터 장치에 의해 앞뒤로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와 머리털을 결합시켰다. 유기체와 분리된 머리털은 고전적인 물신으로, 정신분석학에 의해 거세를 부인하는 환상적 타협물이라는 해석이 제시된 바 있다. 주기적으로 반복 운동을 하는 구조물 위에 켜있는 다섯 개의 백열전구는 차가운 기계에 물활론적 생기를 부여함과 동시에, 이 기계가 밤낮없이 작동중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 끝에 붙은 둥근 구조와 거기에 걸쳐 있는 머리털들은 피스톤 운동과 연결되어 섹슈얼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기계의 욕망, 또는 욕망의 기계적 특성을 예시한다. 땅에 발을 딛고 우뚝 서있는 기계는 유사 이래의 모든 수직적 기념비가 그러했듯이, 인간에 대한 유비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기계이고, 인간의 욕망 역시 기계적으로 작동된다. 욕망은 기계를 통해서 증폭되고, 기계는 욕망에 의해 추동된다. 양자는 상호적으로 상승한다. 물론 박자가 맞지 않으면 기계와 욕망은 동시에 멈춰 설 것이다. 그 옆에는 센서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머리털들이 있는데, 그것은 응시와 관련된 욕망의 구조를 강조한다. 정신분석학의 가설들이 예시하듯이, 물신은 무엇보다도 시각에 의해 생겨나고 증폭된다. 그것은 소년이 어머니의 거세를 확인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본 사물--가령 속옷, 신발, 털 같은--이 고착된 것이다. 특정 사물은 환유(換喩)에 의해, 마술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그 출발이 환유인 물신은 언제나 부분으로 나타난다. 물신은 사진을 비롯하여 온통 부분으로 잘려진 부분들로 포화된 현대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작동된다. 이 물신적 사회는 온전한 육체와 노동이라는 진실을 부정함으로서 그것을 억압한다. 여성은 언제나 육체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 노동 역시 자본에 의해 타자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이 억압된 진실의 실체이다. 부분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진실의 상을 형성하려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신은 무엇보다도 진실의 외면과 부인의 산물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도시 개발에 사용되는 타워 크레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크레인에 달린 관절에 의해 좌측과 우측을 오고감을 통해서 건물이 세워진다. 이러한 반복 운동을 통해 오르가즘처럼 상승하는 기념비들이 생겨난다. 그것은 성적인 물신과 상품 물신을 중첩시킨다. 아파트를 비롯하여 수요를 초과할 만 큼 많이 세워진 고층 빌딩들은 살기라는 사용가치보다는 사고팔기라는 교환가치가 우위를 점하게 됨으로서 야기된 것이다.
교환가치는 실제와 연관된 기능을 넘어서, 기호가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 단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성적인 물신이 실제의 성행위와 무관한 다른 기호들에 엉겨 붙은 욕망인 것과 비슷하다. 만족이나 결실을 낳지 못하는 이 욕망은 손발이 잘 맞는 기계 부품들처럼 구조적으로 작동한다. 이탈의 작품에서 성과 상품은 물신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된다. 작품 [나는 기억해야 될 의무가 없다](2009)에 사용된 지름 2cm의 수천 개의 빨간 딱지들은 욕망이 집중되는 대상--가령 팔린 작품에 붙여지는 딱지들--에 붙여지는 표시들을 연상시킨다. 이 딱지들이 60센티 높이로 쌓여지는 영상 옆 광목천에는 빨간 딱지들이 둥글게 붙어있다. 하얀 바탕의 붉은 원은 마치 일장기처럼 보이며, 제국처럼 작은 빨간 점들이 모여 더 큰 빨간 점들로 확대된다. 그것은 욕망들이 집중하는 거대한 과녁이 되어, 사적인 영역(성)으로부터 공적인 영역(전쟁)까지, 미시적인 차원(분자)으로부터 거시적인 차원(집합)까지 관통한다.
물신이 작동되는 체계라는 것이 그렇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관계일 뿐이고 목적이 없는 수단일 뿐이며, 그 자체를 재생산하는 것 외에 특정한 목적이 없다. 도장을 떠오르게 하는 이 붉은 점들은 실제가 아닌 명목들의 집합이다. 잘 팔리는 작품이란 소장자에게 예술적 만족을 줄 뿐 아니라, 교환가치가 있는 상품을 말한다. 미술품이라는 고가의 물건은 차익에 대한 기대 없이 거래가 성사되기 힘들다. 미술품 역시 상품처럼 교환가치의 회로에 진입할 것을 요구한다. 회로라는 체계에 진입하지 못한 것은 이익을 내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욕망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누구나 욕망하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작품 [다른 것 같지만 하나로 움직이는 욕망](2009)은 그 욕망의 실체를 들여다본다. 거품이 나오면 CCTV 7대가 왔다 갔다 하고, 화면에는 CCTV가 찍는 거품이 부글거린다. 무엇인가 씻어낸 끈적한 부산물은 거품처럼 실체가 없다.

그러면서 대량 생산 라인처럼 도열한 기계들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걷잡을 수 없는 거품은 구조를 교란시키기도 할 것이다. 인간은 무시되고 구조의 힘이 강조되기도 하였지만, 구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구성되고 해체되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인간이 등장한다. 비록 그 인간이 더 이상 이전 시대의 휴머니즘적 모델에 의거한 신적 인간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에 인간이라는 이물질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하면서, 구조적 동일성을 와해시키거나 재구성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여기에는 구조보다는 욕망, 코드(영토)보다는 탈 코드화(탈영토화)에 방점을 찍는 탈 근대적 흐름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흐름은 공간보다는 시간의 범주를 강조한다. 움직임, 즉 시간성은 이탈의 작품에서 핵심적이다. 또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유기물들은 구조의 산물이자 원인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계란 부화기가 등장하는 작품 [전란의 기억](2009)은 신인류의 탄생 설화 같은 내러티브가 있다. 투명 용기 안에 부화기 같은 장치가 있고 백열전구들 아래의 알들은 부화를 위해 기계에 의해 흔들린다. 어미 닭이 알에게 하듯, 주기적인 물리적 자극은 물론이거니와 온도와 습도까지 유지했다. 실제로 알이 부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작품은 대량생산 단계에 편입된 생명의 과정에 내포된 상징이다. 어미 품을 떠나 애비 없이도 태어날 또 다른 생명들은 자연이 아닌 인공, 즉 기계로부터 발원한다. 이 부화기 안의 알들은 학교, 공장, 감옥, 군대, 정신병원 안에 태어나고 살고 죽을, 끊임없는 감시 뿐 아니라 관리되고 조절될 인간의 생애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인간은 생산에 필요 없는, 또는 이익을 내지 못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감별되고 가차 없이 살 처분되는 생체 공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노동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운명을 가진다.
정육 절단기 같은 살벌한 기계가 등장하는 작품 [도살장의 성 요한나]는 우리 역시 한 덩어리의 고기, 즉 희생된 고기를 섭취하고 또 다른 희생을 준비하는 육(肉)적 존재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게 한다. 기계의 반복된 움직임은 욕망과 죽음의 연결고리를 예시한다. 자연계에서 생태적 사슬에 의해 먹고 먹히는 과정은 거대한 인공적 체계로 진화된 상태이고, 이 체계 속에서 생명은 자연이 부여해준 시간 보다 더 빨리 고갈된다. 그 안에서 인간을 포함한 생명은 태어나기도 전에 제거되거나 더 빨리 성장하고 더 일찍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기계적 구조와 연관된 욕망의 흐름이나 차단을 보여주는 이탈의 작품은 매우 충격적이고도 비극적이지만, 이러한 구조가 유지되고 확대 재생산되는 또 다른 원동력을 간과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권력은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작용한다. 그것은 고통도 낳지만 쾌락도 낳는다. 부정만으로는 권력이 유지되지 못한다. 그것은 억압할 뿐 아니라 생산한다.
절단된 것들이 모여 이룬 체계라고 볼 수 있는 기계, 그리고 유기체로부터 분리된 기관을 충돌시키는 이탈의 작품에 흐르는 기조는 페티시즘(fetishism)이다. 자연의 법칙이 아닌 인위적 규칙의 체계는 강제 뿐 아니라, 내부자의 동조 또는 공모를 통해서 작동한다. 성적 물신은 자연적 한계를 넘어선 쾌락을, 상품 물신은 무제한의 경제적 이익을 약속한다. 이탈의 작품은 인공적으로 구축된 체계 속에서 일어나는 기호의 놀이와 그것에 바쳐진 희생이 공존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속 각종 기계는 희생의 제단을, 유기물의 잔해는 희생물을 떠오르게 한다. 이탈의 작품은 중층적 상징을 깔면서 비밀스럽게 진행되지만, 참극으로 귀결되곤 하는 피 흘리는 희생은 더 이상 고대 신화의 그것처럼 성스러움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작동하는 희생의 구조 역시, 체계의 질서를 위한 필요악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출전 | 인천 아트플랫폼 비평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