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자 소외인 인간 괴물


선명한 흑백 스트라이프 벽면을 배경으로 빽빽이 놓인 박스 안이나 선반 위에서 고개를 디미는 색색의 괴물들이 있는 고은강의 그림은 현대와 원시, 문명과 야만이 공존한다. 다양한 무늬를 만들며 환경을 잠식하는 무채색 패턴들은 다채롭고 화려한 존재들이 드러나기 위한 배경이나 바탕 면이 되어준다. 다양한 곳에서 기원한 것들이 조합되어 있는 존재들은 괴물이며, 인간적인 표정이나 해부학적 구조들의 접합 등을 통해 그 이질성을 벗고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인공적 패턴들로 이루어진 배경 및 바탕 면은 두터운 물질적 현실감보다는 환영의 속성이 강하며, 굳이 현실과 비교하자면 작가 노트에 인용된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용어대로, 유혹적인 현실(seductive reality)에 가깝다. 리얼리즘 보다는 시뮬레이션의 산물인 고은강의 작품 속 배경과 존재는 적절한 한계를 가지는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투명하고 무중력적인 기호의 세계로 진입한다. 이 기호의 그물망 속에서 자연적 필요에 의거한 욕구 이상의 상징적 욕망이 양과 방향, 그리고 속도를 확정짓지 않은 채 유통되고 있다. ‘인간의 매너리즘에 관하여-사회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이기성을 중심으로’라는 다소 학술적인 전시제목은 화려함과 다채로움, 그리고 유머와 풍자로 가득한 고은강의 작품 속 수수께끼 같은 도상의 의미를 설명해준다.

각자의 구멍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존재들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이기성을 재미있게 도해한다. 그리고 그것의 원인을 패턴으로 나타나는 코드화 된 현대사회로 지목한다. 각자의 구멍들에서나 왕일뿐인 겉 무늬만 다른 존재들은, 나름의 개성을 가짐과 동시에 유아(唯我)론적 세계에 갇혀 있는 개인주의에 대한 풍자이다. 작품 [human interaction]은 줄무늬 벽 위에 열린 서랍들에서 괴물들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무채색의 일러스트 무늬로 덮여 있는 서랍과 달리, 괴물은 화려하다. 그들은 탐색하고, 엿보고, 기어 들어가는 등 여러 가지 행동을 하는 중이다. 작품 [we always think outside of box]에서 다양한 무늬들이 있는 각각의 박스들에 들어 있는 괴물은 코끼리 얼굴에 사람 몸, 사람 얼굴에 문어 발, 사람 얼굴에 사마귀 팔다리 양서류 몸통, 나비 날개인간 등 여러 동물의 부분들이 합쳐져 있으며, 그 기원의 다양성에 걸 맞는 화려한 색채로 칠해져 있다. 작품 [everybody is different]는 각자의 구멍 속 괴물들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다양함이라는 판단에 전제되는 설득력 있는 분류 원칙은 발견되지 않는다. 작가는 존재들을 무질서하게 또는 기계적으로 병렬시킨다. 작품 [shelves]는 두루마리처럼 가로가 매우 긴 작품으로, 세로 줄 배경 면에서 선반 같은 구조들이 규칙적으로 돌출하고 그 위에 존재들이 하나씩 걸쳐 있는 그림이다. 그것은 벽지무늬 같은 전면(all over)구조이며, 존재들 역시 서로에게 철저히 비관계적이다.




작품 [we all carry out own burden]은 세로 줄과 점무늬 입방체로 복잡한 배경 사이사이로 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코드화는 실재의 무게를 휘발시키지만, 코드화 된 존재들이라고 삶의 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고난은 다른 차원으로 평행 이동될 뿐이다. 자연, 인간, 역사, 실재 등으로부터의 해방을 설파하는 시뮬레이션의 사회에서 파생된 존재들이 감내해야할 희노애락은, 현실에서 탄생한 존재들만큼이나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고은강의 작품에서 벽이나 서랍, 선반, 상자 등으로 존재들이 맥락화 되는 무채색 배경들은 마치 자연이나 전통에서와 같은 전체성과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하학적 맥락은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내부 존재들 간의 직접적 소통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들은 각자의 상자나 통에 칩거한 채 다른 존재들과 아주 가까이에 있지만, 소통은 간접적이거나 피상적이다. 그것은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은 잘 몰라도, 각종 네트워크상의 ‘이웃과 친척들’과의 친분 쌓기에 여념이 없는 현대적 소통구조를 반영하는 듯하다. 전통사회에서는 근린 지역의 사람들과 직접적 소통이 활발했지만 전체적인 연결망이 부족한 반면, 현대사회에서는 그 반대이다.

근대가 열어젖힌 민족(국민) 국가에 와서야 지배와 착취를 위한 도구이기도 한 총체적 연결망이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탈근대 사회에서는 전면화 되었다. 전통으로부터 근대,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역사적 추이는, 지역과 혈통에 근거한 유기주의(organicism)를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고은강의 작품에서 다양한 무늬를 가진 존재의 집은 규격화되어 있고 상자나 통처럼 쉽게 이동할 수 있는데, 그것은 존재가 비롯되었을 독특한 기원들을 삭제하고, 무엇으로라도 대치시킬 수 있는 가변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변화를 지체시키는 전통적 안정성이 근대에 와서 느슨해지거나 해체된 상황을 드러낸다. 작품 속 개별자는 아마도 자신의 외피가 되어줄 상자들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유아론적 세계에 매몰된 괴물들은 마치 달팽이들처럼 존재를 담는 틀과 일체화되어 있다. 선택의 자유는 ‘개인을 사회질서 안으로 배치시키고 사회적 의무와 책임 망을 구축해주는 것을 도와주는 전통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체계’로부터 ‘파괴적인 상대주의와 과격한 주관성으로’(에드워드 쉴즈) 이동시킨다. 이전의 체계는 또 다른 체계로 바뀌고, 체계가 근대화를 거치면서 보다 치밀하게 구조화 될수록 그 안에 배치된 존재는 이상한 모습으로 왜곡된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모더니티가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사회적 소외를 야기 시켰다고 지적한다. 자연이나 전통의 뿌리로부터의 단절은 해방이자 소외였던 것이다. 다채로운 외관을 가진 고은강의 작품 속 존재들은 자유와 유폐의 이미지를 중첩시킨다. 그것은 유쾌한 장면이면서도 절망적인 장면이다. 다양한 무늬들은 철창처럼 보이기도 하는 스트라이프 무늬에 복속되고 있으며, 존재의 극단적인 이질성은 곧잘 동질성으로 전화하기 때문이다. 고은강의 작품에는 자유분방함 이면에 전체를 총괄하는 시스템의 힘이 가시화되어 있으며, 존재들은 비슷한 방식으로나 개성적일 뿐이다. 대량 소비 사회에서 개성이라는 것이 작품 속 수많은 포장 용기(容器) 같은 것들이 상징하는 바처럼, 소비에 의해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돈 슬레이터는 [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소비자라는 개념은 자유라는 개념과 욕망의 개념을 결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유와 욕망이라는 용어는 대립된 개념들이다. 모든 것을 매개하는 보편적인 틀 거리가 된 시장은 정체성의 위기를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한다. 그러나 끝없는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소비는 정체성의 위기를 강화할 뿐이다. 쇼핑 상자들처럼 보이는 고은강의 작품 속 용기들 속의 불확실한 것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것은 현대 사회가 시장으로 더 치밀하게 조직화될수록 개인적 아노미 상태는 더욱 커진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듯이, 소비자 대중은 사회의 논리와 한계를 초월하게 되며, 또한 사회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소비가 안겨주는 쾌락은 갈수록 비인간화가 심화되는 억압적인 생산 조건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 유혹이다. 보드리야르는 복잡하고 오묘한 유혹의 형태가 체계적 재생산과 사회적 통합의 과정에서 중요성이 증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중 개인주의의 모습은 고은강의 작품에서 만화처럼 희화화 된다. ‘그 자체에만 속하는 질서(즉 무질서)’(미셀 푸코)의 산물인 괴물은 원초적 혼돈이 가졌을 법한 야생성이 무력화되어 있다. 그러나 자체의 광기는 여전히 남아있다. 특히 괴물의 광기는 ‘노동의 부재’(미셀 푸코)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것들에 내포된 소비성이 강조된다. 이 이질적 존재들은 소비를 통해 체계에 동화된다. 이 존재들은 사회적 질서를 위한 분류체계를 와해시키거나 금기를 위반하는 불경한 힘이 아니라, 체계의 안전한 귀속물이 된다. 괴물이 상징하는 바의 비이성과 폭력이 자기이해의 합리적 추구로 길들여지는 과정은, 귀족과 폭군이 지배하던 전통사회에서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시민사회로의 변화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 변화를 앨버트 허쉬먼은 ‘열정에서 이해관계로’의 변화로 요약한 바 있다. 물론 전쟁에서 평화로의 진보는, 전쟁이 더 이상 피 흘리지 않고도 경쟁자를 죽이는 또 다른 차원으로 이양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고은강의 작품 [shelves]처럼 서로가 완전히 무관하게 떨어져 있는 상황에도 경쟁과 전쟁을 야기하는 이기주의는 작동하고 있다. 돈 슬레이터는 같은 책에서 모더니티가 문화적 황폐화와 사회적 소외를 야기 시키고, 공동체 개념과 진실한 사회를 향수적 기억, 유토피아적 꿈으로 변질시켰던 것은 경제적 합리성을 통해서였다고 지적한다. 소비문화가 개인의 자유화와 사회발전이 아니라, 아노미와 병리로서 이해되는 것은 이 맥락이다. 그에 의하면 소비문화는 탈 전통 사회에서 우리가 상실한 세계를 인공적이고 대량 생산적이긴 하지만 아주 빈약하게 대체한 개념이다. 근대는 개인을 지역공동체에 의한 공공감시와 신분질서로부터 도시의 익명성과 방임, 자유 노동시장과 불안정한 신분질서로 풀어놓았다. 그러나 근대세계의 물질주의와 형식적 합리성은 부를 낳을 수는 있지만, 가치를 낳을 수는 없다. 부의 생산 역시 빈곤, 착취, 불안정성을 지속적으로 초래했다. 돈 슬레이터는 자유주의 전통이 자기의 이해추구라는 동기를 통한 물질적 성공, 기술적 발전, 개인의 자유와 결합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자유는 시장에 대한 개인주의적 자유와 선택할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수지 개블릭이 [모더니즘은 실패했는가]에서 지적하듯이, 자유롭게 개인주의적인 현대성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는 그들에게 유용한 것과 좋은 것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단순한 장소일 뿐이다. 실용적인 자유주의는 생활의 사적인 즐거움과 자유를 위해서 모든 초월적인 목표를 포기하게 한다. 돈의 리얼리즘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초월성은 과도하게 숭배되거나 평가절하 된다. 예술 또한 이 널뛰기 속에서 부침하는 운명을 따른다. 고은강의 작품에서 특정한 종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체들은 이성이나 자유 등에 근거한 근대적 개인주의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근대적 유산의 어두운 측면들이다. 오늘날 개인적 자기 이해의 추구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아담 스미스)같은 전지전능한 질서가 아닌, 무정부주의적 힘에 휘둘리고 있으며, 무정부적 상황에서 힘의 불균형은 사회를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로 기울어지게 한다. 고은강의 작품에서 화려한 이질적 존재들을 맥락화 하는 무채색의 틀 거리들은 시장과 시장가치의 익명적 체계와 닮아있다. 또한 고집불통의 괴물로 표현된 ‘인간의 이기성’은 ‘자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근대지배의 한 전략’(미셀 푸코)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