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과 멜랑콜리
김인영 전 | 10.8--10.23, 아트포럼 뉴게이트
고낙범 전 | 10.7--11.30, 코리아나 미술관


한여름 동안 햇빛과 산소를 흡수하면서 성장이라는 기능에 충실했던 푸른 잎들이 울긋불긋한 색조로 물들며 휴식과 재생을 위한 준비에 돌입한 즈음 열린 김인영과 고낙범의 전시는 색이 가지는 힘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공간 속에 순간 멈춤으로 펼쳐진 색의 향연에서, 색은 특정한 형태를 채우는 역할이나 어떤 기능에 부속된 장식이 아니라, 스스로 우뚝 서서 자체의 힘을 발산한다. 김인영은 에나멜 페인트의 복잡한 마블링 효과를 이용하여 산수화 같은 공간을 구축하였으며, 고낙범은 예술작품이나 현실의 사물에서 추출한 컬러 스트라이프로 미술관 벽면을 휘감았다.

김인영의 ‘Space-Building’전과 고낙범의 Color Pause전은 형태나 기능과 달리, 명확히 고정되거나 이름붙일 수 없는 색에 대해, 그 차이를 소멸시키지 않은 채 그것을 포획하려는 화가들의 독특한 방법론이 있다. 내부에서 뒤섞이며 물컹거리는 색의 흐름을 보여주는 김인영의 작품과 어디선가 추출된 컬러 코드로 또 다른 초상들이 만들어지는 고낙범의 작품은 캔버스나 화이트 큐브라는 기하학적 공간을 모종의 사건이 벌어지는 장으로 맥락화 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구조와 사건을 매개하는 것은 바로 색이다.

일상어 중에서 ‘그 사람의 색깔’은 그만의 개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색은 정서에 직접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지각되고 주관적으로 인식된다. 성공적인 표현이란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으로부터 출발하면서도, 작가가 투입한 형식적이고도 내용적인 숙고를 거쳐 순간적이나마 명료한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때, 색에서 공간과 언어적 요소를 부각시킨 고낙범과 김인영의 전략은 성공적이다. 특히 그들의 작품은 색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과정에서 색의 공감각적인 측면이 강조된다. 김인영의 경우 색 덩어리와 흐름으로 구축된 산수화적 공간에서 메아리가 들려올 듯하며, 고낙범의 경우 색은 영화 및 공연 예술과의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김인영의 경우 물감의 물성과 행위에 내재된 우연적인 효과가 극대화되어 있고, 고낙범의 경우 치밀한 계산적 요소가 깔려 있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하나의 색으로 온통 물든, 혹은 분열된 색 사이에서 침묵하는 깊은 멜랑콜리가 있다.




무정형적인 물감 덩어리가 여러 방식으로 만나 공간을 구축하는 김인영의 작품은 풍경, 혹은 산수화가 그렇듯이 마음의 상태가 투사되어 있다. 어떤 토대와 연결됨 없이 부유하는 모호한 형태와 축축 늘어진 물감의 흐름은 물이나 폭포 같은 풍경의 요소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자기장과도 같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영향 받는 몸과 감정의 흐름과 닿아있다. 작품 구성 요소들은 응집하려 하는 만큼이나 흩어진다. 추상적인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풍선처럼 부풀어 자유롭게 떠오르려는 힘을 제어하는 아래로부터의 힘, 즉 중력의 작용은 막강하다.

거기에는 하나의 형태나 외곽선으로 완결되려하지만, 그 내부에서 요동치는 또 다른 색선들의 흐름이 그녀의 작품에 비결정성과 교란을 발생시킨다. 뭉클거리는 액체적 요소가 지배적인 김인영의 그림은 불특정한 어떤 것을 지시하는 상황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빨렛트에 엉겨 붙은 물감덩어리, 또는 어딘가에 묻은 얼룩 같은 것들은 명확한 분류나 범주화를 통해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폐기물이나 잔여물에 속한다. 김인영의 그림은 어디선가 떨어져 나와 추락하는 것들과 어디에도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들을 담는 그릇이 된다. 이러한 물리적, 심리적 잔여물들은 멜랑콜리를 자아내지만, 그것들이 회화라는 그릇을 통해 성공적인 담아질 수 있을 때 멜랑콜리는 반전된다. 고통과 희열은 둘 다 의미 바깥에 존재하면서 극적으로 조우할 기회를 맞곤 한다.

흩어지려는 힘이 뭉치려는 힘과 긴밀한 역학관계를 가지는 김인영의 작품은 죽음 또한 생의 이면임을 알려준다. 해체가 있기에 생성이 있고, 시간의 힘이 지배하는 생성은 소멸을 향한다. 주체성이 성립되기 위한 선결 요건인 종합은 분리된 요소들을 전제한다. 분리는 인간의 탄생 및 모체로부터의 분리라는 원초적 트라우마로부터 시작된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삶의 기본 정조를 이루는 멜랑콜리, 그 치유할 수 없는 슬픔, 그 슬픔의 극단적인 결과인 죽음의 연원을 여성인 어머니와의 관계로부터 설명한다.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절망적으로 어머니와 분리되어 있는 아이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상상이나 언어의 힘을 빌린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상상과 언어에는 멜랑콜리가 가득하다.

자아와 주체의 성립 과정에서 요구 또는 욕망되는 것인 상상과 언어를 예술 또한 공유한다. 멜랑콜리는 인간에게 그러한 것처럼, 예술의 한 특징이 아니라 본질적인 특징인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아이가 우선은 상상 속에서, 그다음에는 낱말들 속에서 다른 사랑의 대상들과 함께 어머니를 다시 찾으려 노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추구에는 부재와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김인영의 작품은 무정형적인 형태와 범주화할 수 없는 색채가 응결되어 있다. 그것은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삶의 광휘를 가능하게 하듯이, 멜랑콜리로 향한 성향과 정신의 상호 관계가 내재한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보이는 고낙범의 작품 [풍경]은 명화에서 추출한 색띠가 전시장 벽면을 뒤덮고 있으며, 가운데 떠있는 나팔꽃 모양의 형상은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상태, 또는 어떤 강렬한 감정이 폭발되는 분화구 같다. 색은 화이트 홀 같은 나팔꽃의 중심으로부터 나오고 그곳으로 수렴된다. 그의 작품은 분리된 색 띠로 나타나는 분석적 시점과 파토스가 결합되어 있다. 분석 대상은 명화 같은 예술작품 뿐 아니라, 삼겹살 같은 일상적 대상을 아우른다. 아래층의 색 띠 역시 서양고전의 그림들을 추상적 색가로 환원하고 그중 하나를 뽑아 벽면을 뒤덮는다. 마치 신화 속 풍요의 뿔에서처럼, 색채는 그림 정보를 담은 모니터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오토 반처럼 공간 저 너머로 시원하게 질주한다. 화가의 빨렛트에서 얼룩덜룩 엉겨있었을 색 덩어리는 스펙트럼으로 펼쳐진다.

카라밧지오의 [병든 바쿠스]에서 추출된 색으로 지인들의 얼굴을 단색조로 칠한 [초상화 미술관]은 각 인물에 내재된 성격과 그에 대한 기억을 특정한 색으로 환원한다. 하나의 색조로 온통 물든 대형 인물화들은 미술관의 컬렉션처럼 나란히 놓인다. 충만한 색으로 기억되는 어떤 인물에 대한 인상은 기념비적인 형식을 갖추지만, 색은 독특한 표정과 분위기를 발산하는 초상과 결합됨으로서 코드 이상의 것으로 확산된다. 그것은 추상으로부터 구체로의 상승이며, 추상 또한 구체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고낙범의 작품에는 이처럼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이 작동한다.

오방색으로 물들어 있는 여성초상으로 둘러싸인 어둡고 아늑한 자궁 같은 방 중심에는 여성을 상징하는 작은 조각상이 놓여있다. 이 작은 조각상도 그렇고, 고낙범의 전시회에는 지인들의 작품이 카메오처럼 출연하며, 영화나 공연 등 다른 장르와의 교차가 활발하다. 끈적한 영화의 장면들 사이에 놓인 프로이트의 조상, 자신의 작품으로 온통 장식 되어 있는 밴드 공연물이 나오는 공간에서 돌아가는 미러볼은 경계를 넘기 위해서만 경계가 설정될 뿐인 작품 성향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금기가 위반되고, 불경한 힘들이 분출되고 덧없이 사그라지는 무대이다.

색 띠와 더불어 기하학적 요소를 이루는 것이 오각형이나 원 같은 오밀조밀한 형태들이 결합되거나 확산되는 작품들이다. 단자(單子)와 같이 쪼갤 수 없는 단위들은 [견고한 흐름]으로부터 [피부]에 이르는 표면구조를 형성한다. 흩어진 구슬처럼 셀 수 없는 단자들은 캔버스 틀 이외에 어떠한 한계도 없는 공간 속에서 유동한다. 그것은 나팔꽃이나 포도송이 같이 자연에 내재된 소우주부터 무수한 색 점으로 나타나는 은하계 같은 대우주의 기하학까지, 보이지 않는 질서의 연쇄를 통해 이어진다. 색은 기하학과 결합하여 무한의 느낌을 배가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가령 주변으로 확 번지는 색채를 가진 오각형의 꽃 [모닝 글로리], 대조되는 색조들로 인해 결정체들이 조밀하게 맞물리는 효과가 확장된 [견고한 흐름], 포도송이가 나타낼 수 있는 색상이 최대한 집합되어 있는 [모나드], 각기 다른 색으로 인해 크기의 차이를 질의 차이로 전환시키는 [셀 수 있는, 셀 수 없는]이 그것이다.

무지개는 색은 몇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가. 미술사에 존재하는 모든 명화들을 색으로 분석하면 작품의 비밀이 밝혀질 수 있을까. 언어는 이처럼 불명료한 것을 명료하게 만들려는 욕망에 추동되지만, 언제나 진실은 저 만치 달아난다. 분석의 도구가 정교해 질수록 불확실성은 더욱 커진다. ‘검은 태양’(크리스테바)처럼, 모든 것을 명료하게 밝히는 태양을 삼켜버리는 멜랑콜리는, 의미의 이면인 무의미가 표면으로 반전되는 순간에 등장한다. 색은 언어가 수행할 법한 명료한 형태화를 교란시키는 감성적 요소로, 명명할 수 없는 것들과 불투명한 것들로부터 새어나온다. 색을 언어화하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는, 한편으로 멜랑콜리와 더불어 심연으로 가라앉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승화를 향해 비상한다. 초상화가 전자에 속한다면, 후자에 속하는 것들은 색이 단자와 같은 입자들이 되어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조화로운 우주의 상을 지향하는 작품들이다.

출전 | 아트 인 컬처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