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시티 서울 2010
9.7--11.17, 서울시립미술관 外
1. Trust
격년제로 열리는 미디어 시티 서울의 올해 전시 주제 ‘trust’는 그 사전적인 의미인 신용과 신뢰에 내포된 이중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총 21 개국에서 45개 팀을 초청한 이 전시는 상호간에 서로 긴밀하게 얽히고설켜서, 믿어야 하고 믿을 수밖에 없지만 쉽게 믿기 어려운 현대 사회를 반영한다. 여기에 지구촌을 아우르는 정보 혁명이 가세하여 미디어 아트만이 효과적으로 그 진면목을 드러낼 수 있는 주제들을 포괄한다. 신뢰는 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미디어’든 ‘아트’든 모두 소통이라는 키워드를 공유 한다.
미술의 역사는 소통의 역사와 함께 해 왔으며, 고대의 상형문자로부터 현대의 첨단 단말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 자체가 소통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통이란, 계몽주의적 환상과 달리 투명하게 이루어지기 힘들다. 투명한 소통은 힘의 균형을 필요로 하는데, 현실 자체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통 수단은 힘의 불균형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악역을 맡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자체가 소수자가 되어버린 현대 예술가들이 지배적 권력에 대한 대안적 소통의 방식으로 미디어와 예술에 접근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전시의 많은 작품들에서 지금 그리고 여기는 물론이거니와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젯거리를 발견할 수 있다. 작품마다 거의 하나 이상의 문젯거리가 있었다고 보여 진다. 작품들 속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문젯거리들 때문에, 전시는 통일되고 일관된 면모를 갖추지 못한다. 거기에는 대중들이 많이 알고 있는 사건 뿐 아니라, 매우 지역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한정된 것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기 힘든 작품들도 있다. 하기야 이해하기 힘든 것에서 오는 생경함조차도 심미적인 체험을 야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심미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 내부로 들어가서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를 읽고 공유하기를 원한다.
미디어 아트 전시에 전형적인 방식, 즉 작은 영화관들처럼 꾸며진 어둑한 공간 안에 관객은 얼마간 머무르며 시간의 흐름을 타고 전개되는 서사를 읽어야 한다. 몇 초 이내에 관심 있는 장면이나 소리가 나와야 하는 대중매체에 길들여 있는 이들에게 다소간 지루하고 난해할 수도 있다. 예술을 여가나 장식으로 여기는 태도를 가지는 이들에게도 다소 낯설고 거칠며 머리 아픈 전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날이 갱신되는 매체의 형식과 정보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지각의 마비와 감각의 둔감함에 도발하는 작품들은, 예술의 대체물들이 현실을 장악하고 장식하고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를 알려준다.
미디어를 주무르는 거대 자본은 객관적 현실을 반영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현실을 구조화하고, 이는 미디어의 자기 지시적인 성향을 특징짓는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모든 지시물의 굴레에서 벗어난 미디어의 자기 참조적 이미지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메시지 없는 약호를 발명하거나 혹은 의미론 없는 구문을 발명하는 것과 같다. 영상적 시각은 서로서로 소통하고, 이제 그 자신에 대한 욕망 밖에 지니지 않게 된다. 그것은 자기만을 반영할 뿐인 현기증 나는 거울이 된다. 오늘날 정보와 미디어는 공기처럼 편재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 공간 보다는 유아론적 공간을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기술은 예술을 건너뛰고 그 이전에 존재했던 신화와 유착하려 한다. 원시동굴 벽화부터 시작되는 장구한 이미지의 역사와 달리, 근대에 탄생한 예술은 더 이상 집단적 역사와 공유하는 신화적 장치를 통과해야할 필요가 없다. 레지스 드브레는 근대에 시작된 이러한 시선의 완전한 사유화가 이미지의 마술에 치명적이라고 본다. 근대 예술은 공동체 없는 접촉이라는 불가능한 기획을 만들어냈는데, 오늘날 미디어 역시 그 전철을 밟는다. 그러나 가변적인 인터페이스를 갖춘 전자 미디어가 가지는 속도와 용량, 무엇보다도 액정화면을 통한 소통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의 관객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은 ‘미디어 아트’가 가지는 장점이다. 미디어는 작가에게도 어떤 중요한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미디어’와 ‘아트’ 간의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작가는 여전히 붓을 들고 있건 돌을 깨고 있건 미디어의 매개를 거친 체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2. 미디어와 현실
본전시장 입구에 놓여있는 거대한 꽃다발은 빌럼 데 로이의 작품 [부케]인데, 그것은 ‘trust’를 가늠할 진짜와 가짜의 문제를 다룬다. 풍성한 다발을 분홍 꽃들은 생화와 조화를 반씩 섞어 놓은 것으로, 무엇이 생화이고 무엇이 조화인지 여부를 시각적으로는 알아보기 힘들다. 진실의 여부는 촉각과 후각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미디어의 감각 편향성, 즉 과도하게 시각화되어 있는 문화 속에서 현실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 동원되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김범의 작품 [무제-뉴스]는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뉴스를 재편집하여 원래의 메시지와는 다른 내용의 뉴스를 내보낸다. 아나운서의 본래 음성과 멘트를 완전히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한다.
편집상에서 기인한 약간의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뉴스라는 형식을 유지한다. 그것은 진짜 메시지를 작가가 가짜로 조작한 것이기 보다는, 뉴스가 만들어지는 방식 자체를 드러냄으로서 진짜로 간주된 것의 모순을 가속화 시킨다. 뉴스란 본래 현실 반영이 아니라, 구성이며 작가는 이것을 재구성했을 뿐이다. 시사 뉴스 영상이 가지는 속성은, 근대 이전에 현전했던 성상(聖像)이나 근대의 재현적 예술과 달리, 순간적인 관심에 호소하는 허상에 가깝다. 작가는 대중매체의 허상적 속성을 가속화함으로서, 시뮬레이션 모델에 따라 사건이 만들어지는 역전 현상을 드러낸다.
예술은 투명함과 중성성을 가장하는 대중매체의 방식을 전복한다. 토비아스 칠로니의 다큐멘타리 사진과 영상은 피사체를 관찰하는 시점과 기록 과정의 거친 부분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러한 거친 방식이 현실 속에 내재된 환상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점 또한 특이하다. 작품 [르 벨르 디 스캄비아]는 이탈리아 나폴리 근방의 낡은 건물을 배경으로 현대 도시의 어두운 면을 그려낸다. 수 천 장의 사진으로 찍힌 건물을 애니메이션 필름으로 만든 이 그로테스크한 작품은 번쩍거리는 빛에 조명된 빈민가 특유의 으스스함이 두드러진다. 건축될 당시에는 분명 빈민가가 아니었을 그곳에는 범죄가 일어나기 직전의 긴장감이 가득하다.
피사체 곳곳을 탐색하는 이동하는 카메라의 시점은 이러한 긴장을 더욱 고조시킨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기록 가능한 이러한 방식은 일단 그런 곳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압도적인 느낌을 준다. 카메라는 신성함이 빛을 잃은 저주받은 고딕 성당 같은 이 건물 안팎의 무의식을 그대로 전사한다. 사진 작품인 [빅 섹시랜드]는 대도시의 포르노 영화관 주변에 서성이는 청소년들을 담은 것으로, 도시 하위문화의 생태를 날 것으로 표현한다. 나타나지 말아야할 곳에 갑자기 등장한 야생동물처럼 찍혀진 이미지들은 피사체에 대한 공격성과 공감이 동시에 드러난다.
마크 브래드포드의 대형 평면 작품 [킹덤 데이]는 소수자들의 인권에 관한 자료들이 망라된 것인데, 영상에 내재된 통시성보다는 회화에 내재된 공시성을 활용하여 전자 미디어 못지않은 많은 내용물을 담아낸다. 그 방식은 다양한 기원을 가진 것들을 수집하여 꼴라주를 통해 공간적으로 압축하는 것이며, 이것을 스펙터클하게 펼침으로서 관객의 이동하는 시선에 의해 하나씩 시간의 축(그리고 그에 따른 서사들)이 되살려진다.
실파 굽타의 작품 [노래하는 구름]은 소리를 통한 세상의 수집이다. 수많은 검은 마이크들을 얽어 구름처럼 공중에 둥 띄워놓은 이 작품은 세계에서 들려오는 크고 작은 소리들에 귀 기울인다. 그것은 독백이 아니라 대화이며, 그것도 수많은 대화들이다. 어느 것도 지배적이지 않고 주도적이지 않은 이 귀 기울임은 글자들이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플립보드 작품에서도 관철된다. 그것은 견디기 힘든 소음이나 무질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묘하게 어울리는 다성적 울림을 야기한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전자 혁명이라는 대변혁으로 문자와 시각 편향성은 지양되고 통합된 지각이 부각되었다고 주장한다.
가장 원시적이었던 사회는 지금처럼 청각적 공간이 동시적 관계를 맺는 전체적 장(場)이었다. 맥루한에 의하면 시각적 관점의 세계는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공간이며, 그러한 세계는 공명적인 다양성을 낳는 구술적 세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오늘날 전기적 정보구조라는 동시적 장을 통해 이전의 균질성은 동시성으로, 이전의 연속성은 불연속성으로 전환되고 있다. 실바 굽타의 작품에 내재된 음향적, 혹은 청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 방향적인 공간성은 현시대의 특징인 동시성(simultaneity)을 강조한다.

3. 지구촌
마샬 맥루한이 만들어낸 지구촌이라는 개념은 미디어화 된 현실을 집약한다. 지구는 인터넷과 위성 망으로 촘촘히 엮여짐으로서 중심과 주변, 그리고 지역과 정체성의 문제가 더욱 부각되었다. 나스린 타바타바이 & 바박 아프라시아비의 작품 [위성, 그것이 하늘을 향하고 있기만 하면]은 미국 내에 있는 이란 망명자들의 위성 TV방송국들이 등장한다. 미국이라는 중심 국가와 적대관계에 있는 주변국은 중심에 속해 있는 또 다른 주변으로 지구 저편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그 파장을 동시간대에 공유한다. 다큐멘타리 사진작가 미키 크라츠만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접경의 분쟁 지대에서 그들의 오랜 갈등을 기록한다.
작품 [표적 살인]은 적을 겨냥하는 특수렌즈에 포착된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람들을 살상용 총구와도 비교될만한 카메라의 시점으로 전달한다. 이러한 시점은 정보수집, 관찰, 지배, 압도에 이르는 일련 고리를 형성할 수 있다. 식민지 개발로 시작되었으나 미디어로 가속화되기 시작한 지구촌의 형성은 무엇보다도 시장의 세계화와 밀접하다. 미디어 자체가 상품을 정보의 형태로 실어 나르며, 지구 곳곳에 자본의 힘을 설파한다.
사라 모리스의 작품 [베이징]은 죽(竹)의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사회주의 국가가 2008년 북경 올림픽 때 세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사건을 계기로, 이국적으로 보이는 동양 판 자본주의의 진면목을 아무런 대사 없이 보여준다. 경쾌한 음향에 실려 흐르는 물처럼 펼쳐지는 스펙터클에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역동성이라 할 만한 것들이 있다. 동시에 국가 권력과 자본의 밀착된 관계가 발견된다. 자본은 자본주의 변방에서 특수한 양상으로 펼쳐지지만, 그 근본적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라는 매개 변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뚜안 앤드루 응우옌의 [힙합의 역사를 샘플링 하는 힙합의 역사;레드 리믹스]는 베트남전 이후에 미국으로 이민한 세대의 정체성을 다룬다.
베트남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미국 힙합 곡들이 흘러나오는 베트남의 구식 자전거는 중심과 일체화하고 싶은 주변의 어색한 초상이다. 안토니오 카바예로의 사진작품은 흑백의 옛 사진을 이용해 남미지역에 정착된 헐리웃 영화화된 상상력을 표현 한다. 그것은 오늘날 동남아 국가의 선망의 대상이 된 한국 발 한류 열풍이 만들어내는 주변부 문화의 양상과 비슷하다.
주변부 지역은 중심과의 정치적 관계에 의해 독특한 역사의 굴곡을 밟게 된다. 박찬경과 노순택의 작품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질서에 성공적으로 편승한 한국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식민지의 흔적을 찾는다. 그들의 작품에 깔린 한반도 내의 분단과 냉전이라는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우리를 둘러 싼 초강대국들이 맡았던 역할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박찬경의 [신도안]은 수많은 종교단체들의 흥망성쇠가 되풀이 되었던 계룡산 주변의 문화를 몇 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 보여준다.
이상향에 대한 민초들의 정치적 종교적 열망과 이들을 억압했던 지배 권력들 간의 관계가 다양한 자료를 통해 드러난다. 역사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로 만든 영상은 실제의 또는 가상의 화자들을 내세움으로서 진행된다. 그의 작품은 역사적 소재를 취할 때 발휘되는 미디어의 힘이 드러나 있다. 노순택은 평택의 대추리에서 벌어진 미군기지 이전에 관련된 갈등을 들판에 공 모양으로 솟아있는 고성능 레이더라는 구조물을 통해 다룬다. 한반도에 작동하고 있는 미국의 정보망의 실체를 사진으로 표현한 작품 [얄읏한 공]은 미디어가 지배의 도구도 저항의 도구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을 비추어주는 미디어는 정체성의 문제와도 밀접하다. 사진이나 영상은 즉각적인 반사를 통해 일종의 거울 효과를 발휘하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과 얽히는 심리적 매체가 된다. 서도호의 작품 [나/우리는 누구인가?; 유니-페이스]는 여러 기원을 가지는 초상사진들을 수집하여 합성하는 애니메이션 영상이다. 서서히 변해가는 영상은 수많은 타자들로 이루어진 동일자의 초상을 그려내는데 효과적이다. 율리카 루델리우스의 작품 [영원히]는 영상에 내포된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극대화한다.
자신의 미모에 여전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늙은 여자들의 인터뷰는 미와 부, 권력의 관계를 들추어낸다. 그녀들의 말과 표정, 그리고 태도에는 어떻게 보여 지는가에 대한 지극히 미디어적인 관심이,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잘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생존 및 처세의 전략과 밀접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미디어를 중심에 놓은 이 전시는 미시적 차원에서 거시적 차원에 이르는, 미디어가 가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이 전시에서 미디어는 형식적 차원보다는 다양한 내용을 담아 그것을 전달하는 것에 치중한다. 그러나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맥루한)라는 말이 있듯이 미디어는 형식이자 동시에 내용이므로, 그것들이 전달하는 내용에는 미디어가 가지는 형식적 차원의 담론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미디어가 몸의 확장’(맥루한)이라면, 이 전시에서 미디어는 사회체(social body)의 확장이기도 하다.
출전 | 미술평단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