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묵 전 | 10.15--11.7, 금호미술관
금호미술관 전관에 가득 채워진 것은 가히 ‘예술 베이커리’라 할 만한 풍경이다. 조성묵은 자신의 이전 작품을 포함하여, 관심이 가는 일상적 사물을 오직 빵의 이미지로만 통일 시켰다. 2000년 이후, 돌이나 나무, 금속 등 기존의 조각 재료 대신에 사용했던 국수가 설치 작품에 부분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2층 전시장에, 거실 가구 아래의 카펫이나 탑 아래의 풀 같은 이미지로 빼곡히 박혀 있는 국수가 그것이다. 조성묵의 작품에서 주요 형태소를 이루는 식재료는 강조점의 변화를 보여준다. 국수가 직선적이라면 빵은 곡선적 이미지를 가진다. 국수를 잇는 새로운 소재는 같은 밀가루 제품인 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실제의 빵은 아니다.
작가는 공업재료인 폴리우레탄으로 형태를 만들고 빵을 굽듯이 표면을 그을렸다. 보글보글 부풀려진 굴곡, 노릇노릇한 표면들이 영락없는 빵이다. 원래, 밀 같은 곡물 가루 반죽에 효모를 넣고 부풀려서 요리된 음식인 빵은, 발효 작용에서 발생한 기체를 품는 구멍들, 그리고 오븐에 구워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그을음으로 독특한 형태와 표피, 냄새와 질감을 가지게 된다. 조성묵의 작품 아래에 붙어있는 철망들은 다양한 모양의 빵을 오븐에서 막 꺼낸 듯한 착각을 더해준다. 아마 관객 중에서 그의 작품 가까이에 코를 킁킁대지 않거나 손으로 한번 쯤 찔러보지 않은 이들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빵을 만드는 과정 중에서 조각과 가장 비슷한 부분은 점토와 밀가루를 다루는 방식일 것이다.
점토나 밀가루 반죽은 맘껏 주물러지면서, 작업자에 의해 관습적인 혹은 자유롭게 창안된 형태로 빚어진다. 그리고 뜨거운 화덕에 들어감으로서 완벽히 조절되기 힘든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연금술처럼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섞여 전혀 다른 것이 태어나는 과정이다.

하인리히 야콥의 [빵의 역사]는 이러한 과정을, ‘잘 알려진 물질이 잘 알려지지 않은 법칙에 따라, 오븐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오븐은 연금술과 화학, 그리고 예술의 공통적 산실이 된다. 무엇보다도 빵은 동질성에 침투된 이질성의 산물이다. 하인리히 야콥은 빵의 발명이, 순수한 곡물 가루 반죽에 우연히 이물질이 들어가 시큼하게 변한 상태를, 실패가 아닌 색다른 방식으로 봄으로서 가능했다고 지적한다. 효모를 통해 부풀려진 빵은 이전의 죽이나 납작한 빵에서 진일보한 형태였던 것이다. ‘농부의 인내심과 화학자의 호기심이 결합된 형태’(야콥)로, 인류의 문명과 문화에 근본이 되었던 빵의 발명에 내재된 과정들은 예술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을 통해 빵과 예술은 인류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일상어에서 ‘빵의 문제’라는 표현은 생존의 문제로 해석된다. 예술도 빵이 될 수 있다면! 인류 역사는 빵을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누가 흰 빵을 먹고 누가 검은 빵을 먹는지에 관련된 경쟁과 투쟁의 역사와 밀접하다. 빵을 요구하는 배고픈 민중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대답한 철없는 왕비는 혁명에 의해 처단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3층에 설치된 수많은 물방울 모양의 빵처럼, 인류에게 빵은 눈물이고 핏물이고 땀방울이어 왔다. 그러나 인간은 빵 만으로만 살수 없기에 예술이라는 것도 만들었다.
작가가 국수에 이어 같은 계열의 소재로 빵을 생각한 것인지, 색다른 조각의 재료로 발포 수지를 실험하는 와중에 우연히 빵과의 형태적 유사성을 발견한 것이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인공적 재료로 만들어진 빵의 흉내는 매우 절묘해서, 조각 작품으로서의 스케일과 보존성의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했다. 각종 이벤트성 행사를 통해 거대한 스케일로 음식물을 만드는 일은 종종 있기에, 그것이 실제의 빵이 아니라 전혀 이질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빵의 흉내라는 점은 더 감탄할 만하다. 아마도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빵의 향기 대신에 고약한 플라스틱 냄새로 가득했을 것이며, 이 화학 재료는 작업자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대신, 건강을 좀 먹는 해로운 것이었을 것이다.
제조과정의 우여곡절이 생략된 채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이 거대한 선물에는 물신적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것은 우산이든 화분이든 탑이든 그 고유한 형태와 의미에 주목하게 하지 않고, 단지 일련의 빵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물신주의자의 수집품처럼, 그 목록은 끊임없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의 대상을 지시하거나 각인하는 것에 실패하거나 그것을 부인하면서 환상 속의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 현대사회에서 빵은 이미 상품이 되었기 때문에, 상품 물신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거기에는 빵이라는 어감에서 파생되며, 먹을 것 천지라는 이미지로 이어지는 축제적인 분위기가 팽배하다. 마치 끊임없이 풍요의 이미지를 쏟아내고 있는 광고판들처럼 결코 고갈될 것 같지 않은 기대감이 구워지는 빵의 표면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것들이 가지는 포만의 이미지, 그리고 나뭇결이나 대리석 무늬가 붙여진 싸구려 물건들처럼 표피와 내용물이 일치되지 않는 방식은 키치적이다. 이러한 방식은 빵이라는 가장 보편적--국수나 빵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양인에게도 보편적인 음식으로 다가온다--이고 세속적인 소재와도 잘 어울린다.

진실이 거짓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이자 이면이 되기도 하는 위상학적 구조를 가진다면, 가장 세속적인 것은 가장 성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빵과 비교되었으며, 자신을 먹으라 하지 않았던가? 인류 문화사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던 희생제의, 그 성과 속의 변증법 속에서도 예술과 빵은 만난다. 작가가 작업 노트에서 ‘빵은 먹는 것으로부터 보는 것으로 진화 한다’고 말하고 있듯이, 전시 부제로 붙여진 ‘빵의 진화’라 함은, 빵이라는 소재가 기발한 형식적 장치의 고안을 통해 예술로 진화함을 예시한다. 조성묵이 만든 형태들은 세상의 수많은 이미지들 중에서, 자소상을 비롯하여 ‘메신저’ 시리즈로 잘 알려진 기념비적인 의자 등, 이전 작품의 소재들에 집중되어 있다.
1층에 있는 작품처럼 천정에 매달린 거대한 물감이나 지하에 있는 작품처럼 사다리 같은 형태는 미술 작업의 도구들을 떠오르게 한다. 의자 안에 놓인 알 같은 형태나 의자에서 돋아나는 날개, 그리고 화분에서 자라나 홀씨처럼 이동하는 우산은 작품이 잉태되고 전개되는 과정을, 의자와 마주해 있는 탑은 예술에 대한 관조적 태도와 연관되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3층 전시장의 공중을 가득 메운 빗방울 같은 형태는 작업 과정에서 흘렸을 수많은 땀과 눈물을 연상시킨다. 빵과 예술의 중첩은, 예술 작품도 빵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소박한 욕망과 닿아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그것은 물질적 필요와 노동으로부터 발원하였지만, 정신적 만족과 상징으로 고양될 수 있는 모든 활동에 대한 은유가 된다.
출전 | 계간 조각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