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생물체로 가득한 백기은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모티브는 알, 달팽이, 새싹, 뿌리, 비늘, 털, 심장, 허파, 자궁, 주름, 물 사마귀 같이 종이나 기관, 세포의 일부들과 비슷한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이 붙여지고 섞여서 종을 확정지을 수 없는 생명체가 되어 꼬물거린다. 부분들이 조합되고 접합된 것들이지만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불완전한 부분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러했다는 듯, 자체의 생명력으로 박동한다. 그림의 경우 A4 크기 내외이고 철사로 제작된 입체의 경우에도 작가의 키를 넘지 않는 아담한 스케일이지만, 0.25mm 중성 펜으로 그어진 선이나 가는 철사로 짜여진 덩어리의 밀도가 매우 높다. 각자 자율적이면서도 서로 간에 잠재적인 연결망이 구축되어 있어, 벽과 공간을 숨 쉬는 생명으로 가득 채우곤 한다. 다양한 변이를 보여주는 백기은의 생명체는 종적인 한계를 무시하며, 방향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증식하는 이미지로 인해, 병적이며 징그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괴상함을 위한 괴상함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 에서 발원한 것임을 알게 될 때, 긍정에 내포된 저력을 느끼게 된다. 가령 그녀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알의 형태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만능 구슬’같은 것으로, 말살해야 하는 재난이 아니라 미지의 가능성이다. 기형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들은 상처에서 돋아나는 새살 같은 치유의 의미가 강하다. 그것은 치유이지만, 선재(preexistence)하는 것으로 가정된 원본의 재생이 아니라, 파생된 실재이며 그자체로 새로운 표본이나 증거가 된다. 예기치 못한 형태로 난데없는 장소에서 출몰하는 미지의 생명체는 작업과 생활이 완전히 일체화된 시공간에서 탄생한다. 그것은 삶과 예술을 구별함으로서 생산력과 전문성을 높이려는 통상적인 작업 패턴과는 차이가 있다. 그녀에게는 마치 숨을 쉬듯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인가 아닌가 만이 중요할 뿐이다.

백기은의 작품 속에는 인간 사회 보다는, 삶 속에서 교감하였던 동물들이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다. 부득이하게 인간과 동물 간에 설정된 불균형한 권력 관계가 드러나며, 동물 모티브는 인간을 중심으로 놓는 사고체계에 의해 타자화 된 자연 역할이 맡겨진다. 틸 바스티안은 [가공된 신화, 인간]에서 자연을 목적지향적인 호모 사피엔스와 구별한다. 특정한 목적성을 띈 문화의 창출은 동물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성향, 즉 다가올 일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고, 이러한 두려움이 프로메테우스적 충동을 야기했다. 그러나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은 자연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는 인간 지배를 포함하게 되었다. 문화를 통해 동물과 분리된 인간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동물에게 전가하곤 한다. 동물성은 우리 안의 타자로서 인간성을 위해 굴복시키고 통제되어야 하는 본성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동물 변신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원죄에 대한 처벌이라는 예술적 주제로 이어져 왔다. 백기은의 작품에 출몰하는, 한계를 초과하는 미지의 생명체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침식함으로서 불안감을 준다. 이러한 이질적인 모습은 신화시대부터 현대 실험실에서 탄생하는 괴물들--살아있는 생명체의 망상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이종장기 이식에 내재된 위험성을 포함하여--이 야기하는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한다. 이러한 괴물은 인간 이상이거나 인간 이하로 간주된다. 그것은 인간을 수호하는 전능한 힘, 아니면 타락으로 이끄는 불경한 유혹이었다. 틸 바스티안은 고대의 키메라는 파수꾼의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을 유혹하거나 인간을 징계하는 존재로 등장하지만, 이 두 가지 기능의 경계는 유동적이라고 말한다. 백기은의 작품에서 동물성은 전자에 가깝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인간 안의 동물성을 의식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불안감의 표출이다.
백기은의 작품이 가지는 타자 지향성은 괴물 같은 존재와 연관된 불안감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화시킨다. 그녀의 작품은 확고한 인간 정체성을 중심에 놓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비정상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모델 자체가 부재하다. 동물과의 교감에 친숙한 이들이 가질 법한 인간 사회와의 소원함도 느껴진다. 거기에는 자연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데, 유일의 주인공이 됨으로서 야기되는 주변화 된 자연에 대한 연민과 경고가 드러나 있다. 작품에 곧잘 등장하는 토끼나 고양이, 그 밖의 미확인 동물 모티브들은 자연이 가지는 무한한 변이의 폭을 드러낸다. 그것은 인간이 중심이 되는 진보와 자연이 중심이 되는 진화의 대조이다.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풀하우스]에서 진화란 위나 아래로 움직여 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변이 정도가 변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진화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의 예측 불가능성과 우연성을 주장하며, 진보가 생명의 역사를 규정한다든지, 진화에 보편적 경향이 있다든지 하는 견해를 부정하는 일반 이론을 제시한다. 백기은의 작품은 사다리, 연쇄, 선형성을 나타내는 비유들로 나타나는 (향상)진화(anagenesis)가 아니라, 정교하고 복잡하게 갈라지는 가지처럼 (분지)진화(cladogenesis)하는 방식이다. 작품의 경향은 하나의 길을 따라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 분화 사건에서 다음 종의 분화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복잡한 전환 또는 옆길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 사회가 믿고 싶어 하는 전반적인 발전이나 어디로 움직여 가는 실체가 아니라, 변이와 다양성의 변화이다. 그것은 인류의 오만함이 뿌리째 뽑아내는 다윈 혁명, 즉 생명이란 예측 불가능하고 방향이 없다는 진화론의 의미로 이해된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플라톤 식의 이데아적 본질 대신, 다양한 변이를 강조한다. 변화의 누적에 의한 점진적 진화가 아닌, 도약과 합병을 통해 새로운 종들이 생겨난다. 그에 의하면 플라톤의 세계에서는 변이가 우연한 것이고 본질이 더 높은 현실이었지만, 다윈의 혁명에서는 변이가 확고한 현실로서 가치를 갖는다. 플라톤적 본질은 인간을 생명나무의 정점에 두는 필연적인 진보라는 추상적 사고를 낳았다. 작은 단위들이 증식되어 불확정적인 형태를 형성하고 보이지 않게 전체 환경을 잠식하는 백기은의 작품은 인간에 대한 비유를 벗어나 최초의 생명체이자 지금도 여전히 지구 생명체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미소 생물체, 가령 박테리아 같은 존재들과 더욱 가깝다. 생명나무의 뿌리줄기를 이루고 있는 이 미소한 존재들은 더 다양한 장소에서 더 다양한 물질대사를 활용하며 서식한다. 인간을 중심에 놓는 사고는 시간의 지평을 점차 단기적인 것으로 축소하고, 똑같은 규칙으로 작동되는 경쟁 시스템을 강조하면서 선택에 의한 진보를 강조하며 변이를 부차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보다 장기적인 시간의 지평은 단선적 진보나 필연성 대신에, 그 체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일관된 방법이나 인과관계가 원래 존재하지 않으며 무작위적임을 예시한다. 오늘날 온 자연에 해악을 끼치고 인간중심주의가 전제하는 것은 경쟁과 진보이다. 이 협소한 전망에 의해 그어진 단선적인 궤도에서 멀어지는 것들에 차이와 다양성이 보존되어 있다. 백기은의 작품 속 미지의 생물체는 다양한 개체들에 의해 이루어진 전체가 자연의 참 모습임을 깨닫게 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변이(variation) 그자체로 세계가 이루어져 있다고 강조한다. 자연적 과정에서 우연의 산물인 인간을 정점에 놓는 진보는 자연과는 다른 문화에도 전이되곤 한다. 이러한 협소한 문화적 지평은 무한경쟁을 촉발시키는 동질성을 증가시킨다. 역설적이지만 현대사회나 자연의 일면에서 보이는 거대성과 복잡성의 증가 현상은 이러한 동질성의 이면이다. 이에 반해 변이와 다양성, 넓게 퍼져 있는 차이들이 있는 백기은의 작품은, 자연의 진화처럼 끊임없이 갈라지고 달라져 가는 과정을 강조한다.
출전 | 2010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위크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