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순간을 여는 육체


1. 고전적으로 재현된 몸

몸은 누드라는 형식을 통해 미술의 기본을 이루어왔다. 고대 그리이스 시대부터 인체는 다른 자연물과는 달리 비례의 모범 형이 되어, ‘팔이나 다리를 뻗음으로서 완벽한 기하학적인 형태인 정방형과 원에 딱 들어 맞춘’(비트루비우스) 체계에 속해 있었다. 인체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념과 이성의 질서를 구현하는 이 체계는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미술작품에 보편적인 질서와 척도의 감각을 부여했다. 몸은 재현의 과정을 통해 그 자체가 아닌 기호로 나타나며, 그 시각적 기호가 매개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그것이 역사와 함께 부침하는 형식인 한, 이데올로기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보여 지는 몸은 시각적 이데올로기가 투사되는 대표적인 장으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모든 겉치레를 다 벗겨내고 원초적인 몸 그 자체에 기대되는 바의 진실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애써 구축되어야만 하는 담론이었던 것이다. 누드라는 형식은 물론, 생물학적 대상으로서의 몸이라는 과학적 관념 역시 임상의학이 탄생하던 시대에 부각되었다. 어둠의 대륙으로 간주되어 온 몸을 의학적 시선에 의해 투명하게 개방시키려는 근대는 ‘앎을 통해 결정하고 지배하려는 시선의 왕국’(미셀 푸코)을 건설하였다.

푸코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임상의학은 문법구조와 수량적 가능성의 영역을 도입함으로서 가시성의 장을 열었다고 말한다. 시선은 열려진 장을 의미하며, 연속적인 독해과정을 규정하는 하나의 질서이다. 임상의학은 구체적 인간의 몸을 합리적 언어에 접목시켜 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몸이라는 대상이 드러나는 장을 완전히 새롭게 코드화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몸에는 투명하게 코드화 될 수 없는 잔여가 있다. 투명하게 드러난 것 배후에 잔여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잔여물에 의해 투명함이 드러난다. 객관적인 대상으로 완전히 재현될 수 없는 몸을 끊임없이 구조화 하려는 책략은 규범화된 몸을 프로그램화 된 삶정치(biopolitics)의 장에 배치한다. 18세기 말 임상의학 탄생 이래, 기술공학적인 권력들은 타자의 몸을 지배하려는 사회적 권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본질과 원리, 기준으로 환원되는 자기 동일적인 몸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몸은 근대적 주체나 자아 같은 관념에 내재된 초월성과의 유착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유착으로 인해 지배의 대상으로 가려져 왔던 타자들의 몸이 부각됨으로서 결코 감추어질 수 없었던 진실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각 문화에는 각기 특유의 이상적인 육체를 가꾸기 위한 노력들이 있어왔지만,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로 보편화된 문화 속에서, 이상형은 점차 통일된 남성과 여성의 모습으로 수렴된다. 오늘날 보디빌딩이나 다이어트로 대변되는 몸의 열풍은 욕망의 해방이기 보다는, 자본이 그 배후에 있는 생체통제 권력이 작동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반면 예술은 지배적 문화가 강제하는 여성, 남성의 몸의 전형성을 탈피하여 특이한 기호학의 산물인 낯선 육체를 드러낸다. 그것은 세계와 대면하는 주체라는 이전의 관점을 벗어나, 세계와 깊숙하게 연결된 몸이 지각하는 현장을 가시화하려는 역동적인 움직임이다. 알폰소 링기스는 [낯선 육체]에서 몸에 대한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적 관점을 따르면서, 몸과 세계를 주체와 대상이 아닌 자유로운 원소들의 응결 물로 본다. 그는 이 응결 물들을 만지고 포옹하고 체험하는 인간의 관능적인 본성을 강조한다. 육체는 자신이 다룰 수 있고 상호 교감할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을 자신 앞에 가져다 놓고 그 사물의 형상을 파악한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단지 주어진 환경에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보존하면서도 평형이나 마비 상태가 아니라, 자극과 긴장을 요구하며, 자신의 힘을 방출하는 능동적인 감수성을 가진다. 과도함으로 치닫곤 하는 원초적 감수성은 실재하는 힘들과 조우한다.

2.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표면으로서의 몸

몸은 코드화 할 수 대상이기 보다는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원초적인 바탕이다. 육체는 단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구조만은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자체 내에서 고통과 쾌락을 생산하는 감각의 실체이기도하다. 육체가 권력과 담론의 주체이면서도 그것들에 종속되는 것은 육체가 고통과 쾌락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알폰소 링기스에 의하면 몸에 고통과 쾌락을 안겨주는 저주와 축복은 힘의 무상 유출이자 대가없는 지출이다. 그것들이 발휘하는 힘은 결코 붙들어 두거나 회수할 수 없다. 감수성은 본래 원칙들이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무정부 상태에 있다. 강하고 능동적인 감수성은 원초적이고 유아적이며 비도덕적이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상징적 교환을 명령하는 것은 타자이며, 이 타자와의 상호적 교환은 죽음에 가까운 헌신을 요구한다. 헌신은 서로 침투하는 육체들의 지상적인 물질성을 구현한다. 축제나 예술의 근본적인 원리이기도 한 이 상호적 헌신은 ‘육체에 대한 정신의 헌신으로서의 사랑’(링기스)과 닿아있다. 링기스에 의하면 한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사로잡히거나 추구하는 이상적인 육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러한 에로틱한 갈망은 ‘가장 극단적인 초월이며, 타자를 향한 자기 자신의 투사’(레비나스)이다. 여기에서 몸은 단순한 융합이나 일치가 아니라, 차이 화 할 수 있는 타자와의 접촉을 위한 장이 된다.

몸은 단지 해부학적인 육신이나 기계적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받아들이는 공간이다. 예술은 이 공간을 넓히고 심화시키는데 복무해왔다. 타자와의 접속을 통해서 몸은 사회적으로 확장된다. 몸을 생물학적이나 물리적인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전형적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에서, 이분법적인 사고는 두 가지 양극화된 용어들을 반드시 서열화 시키고 등급을 매김으로서 하나가 특권적인 용어가 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억압되고 종속적이며 부정적인 상대편이 되도록 만든다고 지적한다. 마음/몸의 관계는 이성/정열, 분별력/감수성, 안/바깥, 자아/타자, 깊이/표면, 실재/현상, 메커니즘/활력론, 초월/내재, 시간성/공간성, 심리학/생리학, 형식/질료 사이의 구분과 빈번히 관련 된다. 이러한 이원론에 바탕 한 철학은 심각한 육체공포증 위에 자신을 정립하고 여기에서 몸은 이성의 작용을 방해하는 원천이자 위협으로 간주된다. 안과 밖이 연결된 유연한 표면으로 육체를 간주하는 것은 지배와 억압을 낳는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몸은 ‘문화적으로 직조되는 자연의 산물’(그로츠)이며, 몸의 한켠이 문화에 닿아있는 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권력의 요청에 부응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몸이 있다.

미술이 주로 의존하는 감각인 시각은 이원론적 사고를 낳는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정화열은 [몸철학]에서 근대의 시각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나(I)와 눈(eye)을 동일시함으로서 자아중심주의 또는 유아론과 시각중심주의를 접목시킨다. 코기토는 시각의 지배이며 시각적 기계인 것이다. 데카르트적 근대적 유산의 특징은 탈육체화, 자아중심, 시각 중심이다. 그는 서구의 논리중심주의가 그리이스의 로고스가 이성으로, 즉 육체에서 분리된 이성으로 변형되고 계몽주의 사상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하나의 세계관이라고 지적한다. 임상의학이 확립되기 전까지 시각이 투과할 수 없는 몸은 어두운 대륙으로 간주되었다. 정화열은 정신이 필연적으로 독백 적이지만 몸은 철저히 대화적이라고 말한다. 근대의 독백적 사고는 타자공포증(heterophobia)을 낳았다. 반면 타자와의 대화는 전신적인 기쁨(jouissance)의 장으로서 몸을 중시하고 또 강조한다. 전신적 기쁨은 시각 중심적인 인식론을 전복하고 변형하려한다. 세계와 대화하는 ‘흥겨운 몸’(canne/vale)은 세계를 축제화 한다. 바흐친은 르네상스의 축제문화에 대한 연구에서 축제화 된 세상, 즉 거꾸로 뒤집힌 세상에서 육체가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를 강조한 바 있다.

3. 몸과 예술

몸은 세계와 구별된 실체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부단히 운동한다. 현상학은 세계에 대한 지각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알폰소 링기스는 감각적인 육체의 행태를 이해하려면 육체가 스스로를 지각하는 환경을 염두에 두어야 한고 말한다. 현상학적 언어는 육체의 그런 움직임들을 체험하는 우리 자신의 육체를 기술한다. 세계에서 지각되는 것은 그것의 법칙이아 원리가 아니라 유형(style)이다. 이때의 감각은 대상을 피상적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붙잡고 포획하는 능동성을 발휘한다. 하나의 몸짓은 어떤 사물에 대한 감각을 포착하는 행위이다. 감각의 대상은 주체와 공생하는 것이며, 감각 요소를 수용하는 행위는 ‘외부세계가 우리에게 침투하는 통로이자 방편으로서 주어지는 것’(메를로 퐁티)이다. 예술은 감각적 인상에 대한 기계적 반응이 아니라, 동적인 감성과 관련된다. 미술이 의존하는 시각적 감각 자체가 처음부터 공감각적(synesthetic)인 어떤 것이다. 한 대상에서 풍겨 나오는 여러 감각이 종합되어 그 대상은 더욱 가시적인 것이 된다. 온 몸을 통해 대상을 응시하면서 형태화 되는 것은 나를 포함한 육체의 이미지이다.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은 세계와 몸이 의사소통하는 경험의 세계를 기술하는 방식으로 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은 자기 동일성으로서의 주체라는 관념은 철저히 비판된다. 대신에 살이라는 낯선 것이 강조된다. 살은 수동적인 고깃덩어리가 아니다.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살은 물질이 아니고 정신이 아니며 실체(substance)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살은 물, 공기, 흙, 불같은 원소라는 옛 용어처럼 지칭된다. 원소는 일종의 육화된 원리나 유에 속하는 사물이라는 의미이며, 살은 존재의 한 원소인 것이다. 살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들의 합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장소와 지금에 유착되어 있다. 살이란 보는 몸 위로 보이는 것이 감기는 것이요, 촉각 하는 몸 위로 촉각 되는 것이 감기는 것이다. 살과 세계는 서로 넘나드는 관계에 있다. 세계와 존재 이 둘의 관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잠재성)의 관계이다. 현상학적 사고에 의하면 세계 자체가 살이므로, 몸과 세계의 경계를 구별할 수 없다.

몸의 두께는 내가 나를 세계로 만들고, 사물들을 살로 만들어서 사물의 심장부로 가는 유일한 수단이다. 메를로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도 현상학적 세계란 순수 존재가 아니라 나의 경험들의 교차, 그리고 나의 경험들과 타자의 경험 사이의 상호 맞물림을 통한 교차에서 비쳐 드러나는 의미라고 말한다. 우리가 바로 관계들의 매듭이기 때문이다. 몸은 자기충족적인 존재가 아니며, 시각은 보이는 것에의 참여이고 결속이다. 오랫동안 육체는 타자로 간주되어 왔고, 예술이 드러내려는 것은 억압된 타자들이다. 정신의 물질적 기반이며 지상적인 물질성의 화신인 몸은, 그것이 기호화 되는 예술 속에서 억압된 타자라는 대역을 벗어나 무대의 전면에 서려 한다. 기호는 속성상 그 대상이 되는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경향이 있다. 현대 예술에서 복귀된 타자들은 의미체계 속에 몸을 포함시키려는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동시에 몸을 가두어왔던 금기들을 위반하는 도발적인 행위이다. 현대미술에서 비천하리만치 과격하게 드러나는 몸은 단지 또 다른 기이한 구경거리나 상품화가 아니라, 몸의 안팎을 둘러싸는 담론을 활성화하여 몸의 해방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출전 | 미술문화 잡지 B-ART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