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체투지. 불교에서 행하는 예법의 한 형태로서 온몸을 던져서 절하는 자세를 말한다. 오체에 해당하는 신체부위 즉 양 무릎과 양팔 그리고 이마를 바닥에 대는 것이니 사실상 온몸으로 바닥에 엎드린 자세다. 절 중에서도 가장 큰절에 해당하는 오체투지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경외심 그리고 간절한 마음을 전달한다. 최광호의 사진 찍기가 그렇다. 최광호는 온몸을 던져서 사진을 찍는다. 이 말은 흔히 실체가 없는 허사나 허언에 그치기 쉽고, 짐짓 꾸밈말이나 수사적 표현에 머물기 쉽지만, 작가의 경우에 이 말은 사진을 찍는 과정이나 사진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 말 그대로 꼭 들어맞는다.
작가는 사진과 더불어 살고 사진과 한 몸으로 생활한다. 사람은 관계적인 동물이다. 그는 결코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다. 타자와의 온갖 관계들 속에서 비로소 그 존재가 성립되고 발현되는 것. 작가는 이렇게 자신과 인연의 망으로 연결된, 그래서 자신의 일부가 된 사람들의 삶의 순간들을 기록하고, 나아가 무슨 입회라도 하듯 죽음의 과정들을 기록한다. 심지어 죽음 이후에 사진으로 지방을 대신하기조차 한다. 한마디로 그에게 사진은 삶이며, 죽음이며, 순간이며, 과정이며, 시간이며, 호흡이다. 존재하는 이유이며, 존재 자체이다.
특히 죽음의 과정을 기록하는 작가의 사진 찍기에는 어떤 맹렬함이 있고 치열함이 있다. 지금까지 장인, 장모, 할머니, 동생, 아버지, 누나, 외삼촌 등 피붙이들의 죽음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비록 사진 속에는 없지만, 부재의 형식을 빌려서 그는 분명, 그곳에 존재했었다(사진에서, 흔히 사진 속에 있는 사람보다 사진 밖에 있는 사람이 흥미로운 경우가 많다). 존재했었다? 왜 과거형인가? 여기서 작가는 사진의 본질 문제를 건드린다. 사진의 본질은 죽음이다(롤랑 바르트). 즉 사진은 부인할 수 없는 존재의 증명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의 근거가 되고 있는 현실을 결코 붙잡을 수는 없다.
사진은 현실을 붙잡아 과거 속으로 밀어 넣는, 무슨 회상장치 같고 회고기계 같다. 그 언어는 언제나 과거형으로만 기술될 수가 있을 뿐이다. 사진은 이처럼 언제나 과거를 매개로해서 현재를 이야기하고,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한다는 점에서 향수와 멜랑콜리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더 멀리까지 소급시켜보면 죽음에 가닿는다(낭만주의의 테제는 죽음이고, 그 상징색이 청색이다. 작가 역시 눈에 띠게 죽음에 천착하는 편이고, 수조에 사람을 담근 작가의 근작에는 유독 청색이 많다. 더욱이 수조는 무슨 관의 메타포 같다. 그렇다면 작가에겐 낭만주의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하튼).
이 유난한 죽음들을 겪으면서 나와진 것이 소위 광호타입 사진이다(사진사에는 사람의 이름을 붙인 프린트가 많다). 죽음을 기록한 사진이 삶을 기록한 사진과 같을 수는 없다. 삶을 기록한 사진은 좀 더 삶다워야 하고, 죽음을 기록한 사진은 좀 더 죽음 쪽에 가까워야 한다. 단순한 죽음의 기록임을 넘어, 사진 자체가 죽음의 화신이고 분신이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한 장의 정상적인 사진이 가능해지기 위해선 정량의 빛과 약품과 시간을 거쳐야한다. 여기서 작가는 그 화학작용에 필요한 최소한의 과정을 철폐한다(임의로 처리한다). 그렇게 해서 비정상적인 사진을 얻는다.

정상적인 사진과 비정상적인 사진이 부닥치고,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충돌한다. 작가가 철폐한 것은 단순히 정량의 빛과 약품과 시간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사진과 비정상적인 사진, 나아가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가름하는 상식과 합리를 철폐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누렇게 변색된, 비정형의 얼룩들로 거뭇거뭇해진, 흐릿해진, 마치 실패한 것 같은 사진을 얻는다. 그 피사체가, 그 사건이 한때 존재했었음을 침묵으로써 증언해주는 시간의 질료들로 뒤덮인 사진을 얻는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도 그렇지만, 걸핏하면 훌렁훌렁 벗는다.
세계와 독대한다고도 벗고, 서로 교감한다고도 벗고, 고성산불이 나 산이 헐벗었다고도 벗고, 칠흑 같은 암실 속에서 어둠을, 심연을, 우주를 품는다고도 벗는다. 도무지 그에게 가식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가 벗는 것은 가식 없는 세계와 가식 없이 대면하고 교감하고 서로 품기 위해서다. 세계가 가식이 없으니 나도 가식이 없어야 서로 격이 맞다. 이처럼 벗는 행위에는 의미심장한 의미가 있다. 주체로서의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 거칠게 말하자면 옷을 입으면 내가 아니고, 옷을 벗으면 비로소 내가 된다. 나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사회에 내어준 내가 그 한 주체라고 한다면, 그렇게 내어준 내가 억압한, 때로는 나 자신에게마저 알려져 있지 않은(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으면, 내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다) 또 다른 주체가 있다. 제도적 주체와 실존적 주체다. 여기서 옷은 제도적 주체를 상징하고, 그 상징의 옷을 벗는다는 것은 그 상징에 가려진 실존적 주체를 쟁취하고 원초적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징이란 문화적 소산이며, 제도적 주체는 그 문화로부터 나에게 건너온 것들(내가 보고 들은 것들)의 축성물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아니다.
이로써 작가는 벗는 행위를 통해서 진정한 자기와 대면하고 싶은 것이며, 여기에는 자신을 제로의 지점에로 되돌려놓으려는, 그 지점에서 세상으로부터 들려온 소문이 아닌 세상 자체에 직면하려는 일종의 현상학적 환원이 수행되고 있다. 벗는다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세계의 근원과 만나지는 경험을 위한 것이며, 그 자체 현상학적 에포케를 수행하는 상징적 제스처로 볼 수 있을 것.
최광호는 온몸을 던져서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자신과 지인들의 몸을 등신대 크기로 찍어낸 일련의 포토그램 사진들에서 이 말은 꼭 이 말 그대로이다. 전작에서 작가는 자신과 더불어 산, 그래서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된 자연과 사물과 교감한 순간과 과정과 흔적을 포토그램 사진으로 찍었었다. 그리고 근작에서 그 대상을 신체로 옮겨왔다. 하지만 정작 이처럼 신체를 모티브로 한 포토그램 사진은 사실은 자연과 사물을 대상으로 한 경우만큼이나, 혹은 그 보다 더 오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주로 명실 포토그램 사진을 통해서는 자신을, 그리고 암실 포토그램 사진을 통해서는 지인들을 찍어낸다.
이 가운데 자신의 신체를 소재로 한 경우의 사진을 보면, 온몸에 정착액을 바르고 인화지 위에 드러눕는다. 그러면 몸의 형체 그대로가 실루엣 형태로 찍혀져 나오는데, 무슨 액션 페인팅을 연상시키는 회화 자국(그린 것 같은)이 여실한가 하면, 그 와중에도 디테일이 살아있는 몸 자국(찍어낸 것 같은)이 보인다. 회화 자국과 몸 자국이 삼투되고, 성근 자국과 섬세한 자국이 어우러진다. 원래 회화에서 액션 페인팅은 말 그대로 액션이 실린, 몸이 실린 그림을 말한다. 작가의 사진 역시 액션이 실린, 몸이 실린 사진이다. 자신의 존재를 온몸으로 확인하려는, 모든 말단세포가 올올이 살아서 자신의 존재를 전폭적으로 인준해주기를 원하는 몸부림이 만들어낸 사진이다(우연하게, 혹은 우연찮게도 사진의 도저한 미덕은 바로 이렇듯 존재의 증명에 있는 것이 아닌가).
작가는 곧잘 자신의 삶이, 자신의 존재가 곧 사진이라고 말해왔다. 사진에다가 자신의 발가벗은 온몸을 던지는 것(사진의 제단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 사진과 자신의 몸이 합체되고 합일되는 현상 내지는 경지를 보여주는 이 일련의 사진들에서 작가의 이 말은 직접성을 얻고 진정성을 얻고 절실함을 얻는다. 이처럼 자신을 피사체로 한 경우의 사진들이 몸에 바른 정착액이 인화지에 남긴 여실한 흔적으로 인해 회화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지인들을 모티브로 한 경우의 사진들(그 가운데에는 일부 작가 자신을 모티브로 한 예도 있다)은 상대적으로 보통의 사진의 질감이나 생리에 가깝다.
실루엣 형상으로 축약된 것이면서도, 부분적으로 음영이 살아있고, 가장자리 선의 섬세한 세부를 간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투명한 느낌을 준다(이에 반해 회화적인 느낌의 사진은 이보다는 더 불투명한 인상을 준다). 작가는 근작에서 마음을 찍는 것을 주제로 정했다(생각하기에 따라서 그 주제는 작가의 모든 사진에 해당하기도 한다). 신체 이미지가 곧 마음일 수야 없겠지만, 이처럼 세부가 지워진 텅 빈 투명한 육체, 마치 그 실체가 빠져나간 육체의 흔적(실루엣 곧 육체의 그림자)이 주는 느낌은 왠지 마음의 생김새를, 마음의 메타포를 떠올려준다.
그리고 여기에 물이 가득한 바트에 몸을 담아낸 신체 이미지가 물속을 헤엄치는 듯도 하고, 밑도 끝도 없는 심연(마음) 속을 유영하는 듯도 하고, 가없는 우주 속을 부유하는 듯한 친근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여기서 수조는 특히 자궁이며, 수조 속에 담긴 물은 양수를 암시한다. 그리고 그 속을 부유하는 신체 이미지는 원초적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원초적 생명력은 화면에 흩어져있는 곡물들, 밥의 알갱이들이며 생명의 씨알들로 변주된다. 이로써 작가는 이 일련의 사진을 통해서 저마다 자신이 유래한 자궁으로 되돌려지는 원초적 경험(자신을 제로의 지점에 세우는 현상학적 환원과도 통하는)을 환기시켜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등신대 크기의 풀 사이즈나, 마치 액션페인팅을 보는 것 같은 회화적인 화면, 그리고 최소한의 음영만을 간직한 실루엣 형상이나, 모노톤의 은근하고 절제된 색조가 보통의 사진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일반적인 포토그램 사진과도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신체를 매개로 한 회화 같고 드로잉 같은 사진, 사진이 무색한 사진, 사진의 형식을 지양하는(부정하면서, 파괴하면서 실현하는) 사진이라고나 할까. 이렇듯 사진 같지 않은 사진(?)을 통해서 마음을 찍는다는 것, 그것은 결국 내가 아직 원초적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었던, 혹은 원초적 생명력 자체였던 시절로 되돌려지는 것이며, 그렇게 거슬러간 시절로부터 미처 나로 명명되기 이전의 나를 보는 것(찍는 것?), 그 사건이 아닐까. 이로써 작가의 마음 찍기(마음을 찍는다는 의미와, 마음으로 찍는다는 의미가 중첩된)는 저마다의 심연에로 하강하게 하고, 존재의 근원과 만나지게 하고, 진정한 자기에 맞닥트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