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은 영혼을 잠식 한다


잔혹동화. 소현우의 조각을 관통하는 주제다. 이 주제는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이다. 잔혹이 동화를 부자연스럽게 하고 비정상적이게 한다. 잔혹과 동화는 같이 놓일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이렇듯 같이 놓일 수 없는 단어가 같이 놓이는 상황이 불편하고 낯설다. 동화란 아동에게 들려주기 위해 고안된 어른들의 이야기다. 아동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답게 유아적이고 순진무구하다. 꿈의 이야기이며, 꿈꾸기에 바쳐진 이야기인 것. 세상이 이처럼 꿈만 같고 순진무구하기만 하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이야기는 현실인식의 결과가 아니며, 현실을 재확인시켜주는 과정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의 결과이며, 사실은 현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욕망한다. 동화 속 서사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서보다는 아이러니 즉 반어법으로 읽으면 된다. 아동이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건너오기 위해선 그 경계를 통과해야 하고, 통과의례를 겪어야 하고, 희생이라는 삯을 치러야 한다. 그 삯이 억압이다. 도덕과 관습, 상식과 합리를 불문율로 받아들이고, 금기와 터부의 금 안에 나를 한정해야 한다. 동화는 아동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기 위해서 꾸며낸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 이야기는 꿈의 이야기가 아니라 억압의 이야기였고, 불문율의 이야기였고, 금기와 터부를 극화한 이야기였다. 이처럼 동화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어른들의 이야기란 점에서, 어른들의 욕망을 투사한 이야기란 점에서 처음부터 이중적이었다.

현실이 결여하고 있는 것들, 현실이 금기시하고 터부시하는 것들이 억압된 형태로 고스란히 탑재된 이야기다. 아이들을 선민으로, 순진무구한 세계시민으로 부양하려는 어른들의 책략이며 이성의 간계가 설계한 이야기인 것. 그러나 그 순진무구한 이야기가 사실은 거짓말임이 판명되는 순간 실재계가 고개를 내민다. 살인과 폭력, 희생(희생양)과 죽음충동 같은 억압된 것들이 꿈과 현실의 틈새로, 이야기와 실제의 차이 너머로 귀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잔혹동화는 사실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다. 모든 동화는 그 이면에 억압된 욕망을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고,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의 계기며 잠정적으론 혁명의 계기를 내장하고 있다.

그 이야기가 거짓임이 판명되는 순간 부지불식간에 드러나 보이는 실재계는 과잉과 잉여, 결여와 결핍으로 구조화돼 있는 만큼 현실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며, 현실원칙에 반하는 것이며, 나아가 현실을 위태롭게 하기조차 한다. 이 모든 일들은 동화가 일종의 거짓 이야기며 속이는 이야기라는 사실에서 예고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속이는가. 어른들이 아이들을 속인다. 그 이야기의 자장을 아이들의 세계로부터 어른들의 세계로 옮겨 놓는 것, 동화로부터 사회로 확장시키는 것에 소현우의 작업이 위치해 있다.

이렇게 확장시켜놓고 보면 제도와 자본이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된다. 제도와 자본이 소위 현대인을 위한 동화라는 이데올로기를 발명해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제도의 관점에서 볼 때, 이를테면 상식이 통하는 사회, 질서가 존중받는 사회, 성실한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원래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은 이를 통해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규준을 학습시키고, 상식과 합리의 준칙을 내재화하기 위한 구실로 변질된 것이 현실이다. 계몽주의는 권력에 악용되기가 쉽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란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바로 이 계몽주의다.

계몽주의가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힘 있는 자들의 자기논리를 위한 도구며, 사실상 도구화된 이성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제도가 그렇다면 자본은 어떤가. 제도는 자본에 비하면 순진한 편이다. 자본은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이고 자동적이다.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이다. 자본에는 격이 없고, 관이 없다. 자본은 욕망을 요리하는 산업에 복무한다. 그 산업은 심지어 그로테스크하지도 않고, 낯설지도 않고, 공공연하다. 대중문화의 클리세를 파고들며, 착한 것들, 선한 것들, 순진무구한 것들을 뻔한 것들, 통속적인 것들로 만들어버린다.

꿈꾸기 위해, 꿈을 꾸게 하기 위해 고안된 이야기를 아예 산업으로 만들어버린다. 꿈의 산업이며 욕망의 산업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꿈꾸게 하고 욕망하게 하라. 현실에 대한 보상심리를 만족시키고 대리만족하게 하라. 대리만족? 아예 꿈과 욕망으로 하여금 현실을 대리하게 하라. 나아가 현실(현실인식)을 지우고, 그렇게 현실이 지워진 자리에 꿈과 욕망의 제국을 세우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유토피아, 진정한 유토피아, 전능한 유토피아가 도래했음을 만방에 알려라. 그렇게 무차별적인 자본 앞에서 꿈은 더 이상 순진무구하지가 않고, 욕망은 혁명의 계기이기를 멈춘다.

소현우의 조각은 이처럼 무차별하고 무분별한 자본 앞에, 더 이상 꿈꾸게 하지 못하는 꿈(꿈의 산업) 앞에, 멈춰선 욕망의 녹슨 기계 앞에 서게 만든다. 근작에서 소현우는 신화와 동화 그리고 종교와 같은 거대서사를 차용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반인반마 혹은 반인반수(사티로스와 목신 판)를 차용하고, 동화로부터 요정을 차용하고, 특히 신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극적인 장면으로 유명한 종교적 스펙터클을 차용한다. 이렇게 차용된 서사 속 주인공들은 흡사 대중문화 속의 캐릭터들 같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섹스머신 같고, 온갖 무기로 무장한 게임 속 전사들 같다.

거대서사의 주인공들이 스테인리스스틸 소재 특유의 차갑고 날카롭고 샤프한 몸을 덧입고, 더욱이 상대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현대판 무사들로 재생한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신화를 전복하고, 그 서사를 뒤집어 보인다. 롤랑 바르트는 문화적인 사실을 자연적인 사실인 양 가장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본다. 이데올로기를 인문학적 사실이 아닌 자연현상인 양 가장하는 것. 결국 살인무기들로 재탄생한 작가의 캐릭터들은 신화와 동화와 종교의 이름으로 대리되는 거대서사가 은폐하고 억압한 욕망을 폭로한 것이다. 유토피아 이데올로기가 작동되는 곳에서 디스토피아로서의 현실인식을 읽어내는 것.

그런가하면 감각적 쾌감을 자아내는 외관과 세련된 마무리 역시 자본의 상품화 논리에 부합하는 것. 이처럼 작가의 조각은 거대서사의 아우라를 돌파해 그 실체에 직면케 한다는 점에서 행간읽기 내지는 이면읽기와 통하고, 아방가르의 낯설게 하기 전략과도 통한다. 이 일련의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무분별한 것들을 뒤섞는다. 반인반수의 탐욕을, 예쁘고 귀엽고 깜찍한 디즈니랜드 풍의 요정을, 팬시상품의 큐티를, 롤리타신드롬을, 유혹하면서 처벌하는 사이렌을, 섹스머신을, 팜므파탈을, 피 튀기는 게임 속 살풍경을, 게임 속 캐릭터를 흉내 내는 코스튬 플레이어를, 그리고 종교적인 성상과 여기에 부수되는 아우라까지.

이처럼 무분별한 것들이 혼성된 유기적인 덩어리에는 빛을 난반사하는 번쩍거리는 표면질감마저 더해져 현란하고 어지럽다. 이렇듯 무분별한 것들의 집합으로 구조화된 외장은 우선은 자기동일성의 논리에 견인되는 자본의 상품화 기획에 반하는 것이지만(비동일성의 논리, 차이의 논리), 다른 한편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욕망과 생리에 부합하는 것이다(부조화의 조화, 미적 부적절성의 법칙으로 진화한). 그리고 이 이중성(자본의 기획에 반하면서 부합하는)은 그대로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일종의 패치 구조와도 통한다.

즉 작가의 조각은 감각적으로 어필해오는 매력적인 상품과도 같은 외장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마치 조각 천들을 하나로 잇대듯 스테인리스스틸 조각들을 일일이 용접해 덧붙인 것이다. 그 구조는 얼핏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증언하는 것 같지만(그래서 상품화의 기획에 부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보다는 다만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부분들의 집합일 뿐이기도 한 것이다(그래서 상품화의 기획에 반하는). 이로써 작가의 조각은 그 구조나 외장에 있어서(그리고 서사마저도) 자본의 상품화의 기획과의 이중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이중성과 이중관계는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이며, 또한 그 의미는 무엇인가. 자본은 욕망을 요리하는 산업이라고 했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촉발하는 산업이다.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순간 자본은 죽는다. 자본이 계속 살아있게 하기 위해선 욕망을 촉발하는, 즉 언젠가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이 온다는 환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본은 환상의 산업인 것이고, 꿈의 산업인 것이다. 나아가 욕망 자체가 이미 잉여이며 과잉인 것. 그래서 현실 속에서 그것의 대응물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 그러므로 이처럼 욕망을 매개로 한 환상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한 나는 자본의 기획에 동참하고 공모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해서 작가의 조각에 나타난 그 관계의 이중성이, 이율배반이 설명이 된다. 자본은 욕망의 산업이고, 꿈의 산업이고, 환상의 산업이다. 욕망은 과잉이고 잉여며 결여고 결핍이다. 현실 속에 부재하는 것들이다. 자본은 이처럼 부재하는 욕망을 매개로 꿈꾸게 하는 환상기계다. 그 환상기계는 더 많이 꿈꾸게 할수록, 그리고 그 꿈이 더 환상적일 수록 더 잘 작동한다. 그 기계가 현실인식을 지우고, 현실 자체를 사라지게 하고, 그리고 마침내 영혼마저 잠식한다. 게임을, SF를, 애니메이션을, 큐티를, 코스튬 플레이어를 연상시키는 작가의 살인병기들은 이처럼 부재하는 욕망을, 그리고 그 욕망에 기댄 자본의 기획을 증언하고 폭로한다. 더욱이 매력적인 상품과도 같은 감각적인 외장이 그 기획을 더 잘 숨기면서 더 잘 폭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