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 없는 삶, 떠도는 삶




노마드와 디아스포라, 유랑하는 삶과 유민으로서의 삶. 작가 김주영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그러나 이 말은 작가에게 단순한 수식어가 아닌, 구체적인 실체를 얻는다. 겉돌지 않고, 몸이 있는 말이며 살이 있는 말이다. 길 위에서의 삶을 사는 것. 그는 길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누군가가 흘린 타인의 시간을 줍기도 하고, 과거에 닻을 내린 채 멈춰서버린 시간의 흔적을 캐내기도 한다. 선입견을 뒤로 한 채 예술이 뭔가를 생각해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헤아리고 곱씹는 행위야말로 가장 존재론적인 예술이 아닐까. 작가는 바로 그 존재론적인 예술, 자기 반성적인 예술, 원초적인 예술, 예술의 개념에 선행하는 예술을 실천하고 있는 것.



작가는 세계의 변방을 떠돈다. 비무장지대와 시베리아의 평원 그리고 오사카 등지로 일제와 한국전쟁의 상흔을 찾아 떠돌고, 티베트와 몽골 등지를 찾아 영혼의 갈구로 헤맨다. 익명의 실화를 찾아 떠도는 그의 떠돔은 공중에 흩어지지가 않고 진정성에 안착한다. 흔히 익명은 추상을 위한 구실에 머물기 쉽지만, 그래서 실체가 없는 허언에 빠지기 쉽지만, 작가에게 익명은 역사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희생양을, 비석마저 없는 무명씨를 의미하며, 지금도 여전히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영혼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구체적인 실체를 얻는다. 그리고 그 실체는 작가의 개인사와 가족사와 일정부분 맞물리면서 더 단단해진다.

이렇게 해서 작가의 작업 속엔 한국근현대사의 상흔이, 작가의 개인사와 가족사의 상처가, 존재론적 트라우마가 오롯이 탑재되는 것. <송화강은 흐른다-회상 속의 상흔들>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한국역사의 상흔을 찾아 떠돌고,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하얼빈과 장춘과 길림으로 이어지는 이번 여정에는 일제의 생체실험이 이루어진 731부대와 만주국의 수도 신경과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이 결성된 장소가 포함된다. 아버지는 신경에서 어머니를 처음 만난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 의열단의 일원이었을지도 모르고, 731부대에 희생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르고 또 모른다.

바로 작가가 주목하는 익명의 실화의 실체가 이렇게 해서 드러난다. 이처럼 있으면서 없는 영혼을 만나면, 작가는 어김없이 제사를 지낸다. 광목에 불을 붙여 태워서 날리는 것으로 지방을 대신하기도 하고, 길게 광목을 깔아 사자를 맞이하기 위한 길을 내기도 하고, 광목으로 둘러친 원 속에 사지를 바닥에 대고 누워 사자의 영혼과 만난다. 제의에는 쌀과 소금이 동원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쌀은 말할 것도 없이 사자를 위한 음식을, 그리고 소금은 정화를 의미한다. 이 긴 여정에서 돌아온 작가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유품으로 박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그대로를 떠낸 데드마스크로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어머니와 화해하고, 어머니의 삶에 오마주를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