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현대미술의 원천은 무엇이며 그 저력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아마도 전 세계에 수출되고 있는 망가, 귀엽고 예쁘고 깜찍한 팬시적 감수성을 자아내는 애니메이션, 망가와 애니메이션에 그려진 허구적 세계에 심취한 오타쿠, 에로틱판타지와 그로테스크가, 냉소와 블랙유머가 결합된 B급 영화, 그리고 사이코패스와 히키코모리가 혼성된 서브픽션을 아우르는 일본대중문화라는데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망가는 단연 대중문화의 꽃에 해당할 듯싶고, 일본현대미술 작가 중 직간접으로 망가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경우를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이번 전시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각종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 대해 사실상 망가가 주요 소프트웨어 내지는 콘텐츠를 배급하는 역할을 도맡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망가가 가지는 예술적 가능성(망가의 미학적 측면)과 소통수단으로서의 매체적 가능성(망가의 서사적 측면)을 실험한 것. 망가는 원래 1인 매체다. 흔히 골방에서 망가와 대면할 때 망가는 더 망가답다. 저 홀로 꿈꾸고 저 홀로 상상하기에 최적의 매체다. 이번 전시는 이런 1인 매체를 골방으로부터 전시공간으로, 사적공간으로부터 공적공간으로 끌어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다중매체로서의 가능성을 가늠해본다.
그리고 매체 내적으로는 평면의 이미지를 공간설치로 끌어내 확장시킨다는, 망가를 공간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아트선재센터와 일본국제교류기금이 공동으로 주최하고 기획한 이번 전시는 작년 여름 일본의 미토미술관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한국을 경유해 오스트레일리아와 필리핀에 순회전시가 예정돼 있다. 평면과 입체 그리고 영상을 아우르는가 하면 읽기에서 보기로 진화하는 망가의 현재를 조망한 전시로서, 매체혼합과 웹툰 등 최근 수년 내에 형식실험이 두드러져 보이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초대 전시했다.
총 9명의 초대작가와 작품 중 교 마치코의 센넨화보와 구라모치 후사코의 역에서 5분을 빼고는 모두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작품들이다.
일상에서 신화, 평면에서 하이퍼텍스트까지
참여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우선 아사노 이니오는 얼마 전 영화화돼 국내에도 개봉한 소라닌에서 20대 젊은이들의 일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현재 일본의 사회적 초상화를 그려낸다. 사회 초년생인 여성과 프리터로 살아가는 남성 커플 간의 사랑과 꿈, 열정과 고뇌를 그린 작품으로서 평화롭지만 무기력한 불안정성을 내장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그리고 그 분위기에 편승한 젊은이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전시공간에 원룸을 설치해 현대일본의 보통의 젊은이들의 일상의 단면을 엿보게 했는데, 일본 팝아트 작가 요시모토 나라와의 협업으로 널리 알려진 도요시마 히데키가 공간 연출을 맡았다.
니노미야 토모코의 노다메 칼타빌레는 2001년 연재를 시작해 2009년 4월 현재 판매 부수가 3000만 부에 달하는 스테디셀러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후 만화에 등장하는 음악들로 구성된 컴필레이션 음반이 발매되기도 하고, 만화 속 오케스트라가 실제로 결성되기도 하고, 영화와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쳐 노다메 현상이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으며, 일본에 클래식 붐을 불러오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샹들리에와 고풍스런 액자 그리고 자동피아노로 연주되는 음악 등 만화에 묘사된 거실풍경 그대로를 재현해 만화 속 분위기에 교감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전 국내에 영화가 개봉된 한편으로 만화에 등장한 기타가 이후 실물로 출시되기도 한 해롤드 사쿠이시의 Beck은 중학생인 주인공이 록밴드 활동을 하면서 점차 음악에 눈을 떠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록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와, 좌절과 실패를 자양분 삼아 성장해가는 청춘서사를 담은 이야기다. 전시장에는 만화 속 밴드의 콘서트 장면을 3개의 스크린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현해놓고 있는데, 사운드가 없는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본래 만화에서처럼 음악을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 일종의 연상 작용을 매개로 시각정보와 청각정보가 서로 통한다고 보는 공감각이 실현된 경우일 것이다.
와카키 타미키는 신만이 아는 세계에서 게임에 빠져 현실세계에 매력을 못 느끼는 소년을 통해 그 자신 오타쿠였던 경험을 작품에 녹여내고 있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고수인 주인공은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을 사랑하는 만큼 현실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그런 그에게 현실 속 여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지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해 묻고 있는 한편으로, 감각적 현실과 가상현실간의 애매한 경계에 대한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라를 건드리고 있는 것. 전시공간에는 교실을 꾸며놓았는데, 칠판에 모에라는 신조어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모에는 오타쿠들이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에게 갖는 애정을 뜻한다. 이런 애정이 캐릭터들의 모형을 수집하게 하고, 그 모형들과 더불어 살게 하고, 나아가 캐릭터 그대로를 흉내 내는 코스튬플레이어로 나타날 것이다. 가상으로써 현실을 대신하고, 페르소나로써 아이덴티티를 대체하는 것.
마쓰모토 타이요는 넘버 파이브에서 생태계가 파괴된 이후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다. 생태계가 파괴돼 지구의 70%가 불모의 사막으로 변한 미래를 가정해 본 것으로서, 그 와중에서도 살아남은 인간들은 최첨단 생명공학의 힘을 빌려 일종의 초인류를 창조하고, 그들을 구성원으로 한 평화군 레인보우 부대를 창설한다.
이렇게 창설된 평화군과 저항군 간의 쫓고 쫓기는 과정이 주요 줄거리다. 그 서사가 던지는 현실에 대한 암시로 인해 9.11 사태 이후 세계가 직면한 화두를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해수의 아이는 무한한 생명력의 보고인 바다의 신비를 다루는데, 만화에 그려진 그 서사, 그 비전이 오히려 세계의 거대한 쓰레기처리장으로 황폐해가고 있는 바다의 현실과 대비되면서 의미 있는 울림을 자아낸다. 또한 안노 모요코는 슈가 슈가 룬에서 어린 마녀들이 인간의 마음을 빼앗는 대결을 벌이면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았다. 80년대 이후 쇠퇴한 순정만화를 현대에 부활시킨 경우로 평가된다.
그런가하면 일상적인 이야기를 함축적이고 서정적인 터치로 그려낸 교 마치코의 센넨화보는 작가의 블로그에 연재된 웹툰 형식의 인터넷 연재만화로서, 만화의 보급형태가 인쇄매체에서 웹 매체로 옮아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구라모치 후사코의 역에서 5분은 다중적인 이야기 구조가 주목된다. 하마조메초라는 가상의 마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전개되는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면서 하나의 그물망으로 얽혀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서로 얽히고설킨 이야기 구조가 핵심인데, 전시장에는 이 이야기 구조를 마치 미로 같은 공간으로 구현해놓았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놓치면 덩달아 서사 역시 놓치게 만든 것. 이를 통해 한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입장과 시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살인사건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해석의 차이를 다룬 영화 라쇼몽의 이야기구조를 이어받고 있고, 요새 식으론 하이퍼텍스트의 서사구조를 계승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다카하시 미즈키는 일본에서 만화가 하위문화로 인식된 시기는 1990년대로 막을 내렸으며, 이후 2000년대 들어 만화는 메인 컬처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했다.
만화는 이제 단순히 만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을 위한 소프트웨어 내지는 콘텐츠를 배급하는 핵심 서사매체로서 자리 잡았고, 만화에서 제안된 서사가 일상 속에 구현되는 등 허구의 경계를 넘어 현실과 소통하고 있다. 파인아트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특징적인 만화 양식의 그림과 팝아트를 접목한 소위 포쿠(poku, Pop과 Otaku의 합성어) 스타일의 그림이 일본현대미술 작가들의 보편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전시는 그 원천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망가를 통해서 일본현대미술의 이면을, 그 실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