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들, 이중 이미지와 다중적인 의미


이길우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비엔날레로서 올해로 14회째를 맞은 2010 방글라데시비엔날레(10.8-11.6)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대상을 수상한 작품 <무희자연>은 전기인두를 이용해 한지에 수많은 구멍을 뚫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통적인 무희의 춤사위와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중첩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한국으로 대변되는 동양의 전통문화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대중문화가 하나로 만나지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문화코드를 통해서 동서양 문화의 정체성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래 동명의 시리즈 작업 중 하나인 <무희자연>은 제목 그대로 무희와 자연 이미지가 하나의 화면 속에 오버랩 된 형식의 일련의 그림들을 아우른다. 전통적인 무희의 춤사위와 역시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차용해온 이미지를 중첩시킨 것인데, 그 이면에는 동양의, 혹은 작가 나름의 자연관이 반영돼 있다. 춤사위와 자연을 연관시킨 것이며, 자연 속에서 노니는 소요유의 경지를 무희의 춤사위로 표상한 것이다. 자연(소요유 즉 노니는 자연)과 인간(춤추는 인간)이 합일되는 경지를 통해서 소원해진 그 관계에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무희자연> 시리즈는 이처럼 전통(전통적인 춤사위)과 또 다른 전통(전통적인 산수화)이 만나지는 계기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과의 진정한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염원을 담고 있다.
그런가하면 전통적인 무희의 춤사위와 최소한의 실루엣 형상으로 축약 표현된 현대적인 댄서를 대비시켜 전통과 현대를 연관시키기도 하고, 화면 가득한 여인의 초상에다가 각종 꽃문양을 중첩시켜 여인과 자연의 상징적 의미를 연관시키기도 하고, 이번 수상작품의 경우에서처럼 전통적인 무희와 서구 대중문화의 아이콘(특히 유명 배우)을 결합시켜 동서양의 문화적 충돌현상을 건드린다.

특히 이 부분 즉 동양의 전형적인 아이콘과 서양의 전형적인 아이콘을 비교하거나 대비시키는 식의 문법은 현재 일정한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고, 이러한 사실은 작가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차용과 함께 작가의 작업을 일종의 팝코드와의 연관성 속에 정초하게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현재 창작 환경은 이미지의 생산으로부터 이미지의 소비로 그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그래서 창조와 천재 개념이 전통적인 예술가상을 결정했다면, 현재는 기왕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독특한 방식이 예술가의 개성과 정체성마저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맥락이 달라지면 이미지의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이미지 자체의 성분이나 생리마저 달라진다고 하는, 소위 탈맥락과 재맥락, 그리고 재배열과 재배치에의 인식론으로부터 그 당위성을 얻고 있다. 여기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차용이다.
그리고 문화적 충돌현상의 밑바닥에는 소위 문화적 순수주의에 대한 의심이 깔려있다. 외관상 상호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문화가 서로 부닥치는 과정에서 유래한 제 3의 문화현상 즉 문화적 크레올 현상, 하이브리드컬처, 크로스오버,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특히 내 속에 타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소위 혼성에의 인식 내지는 자의식은 이제 현대인의 보편적인 경험이 되고 있다. 때로 그 경험은 여타의 억압적인 계기를 파생시키기도 한다.

여하튼.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차용으로 나타난, 이미지와 관련한 달라진 인식론과, 문화적 충돌현상을 내재화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중성이 나오고, 이로부터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 작업인 <동문서답>의 문제의식이 유래한다. 동쪽에서 묻고 서쪽에서 답을 찾는다. 불통이다. 아마도 문화적 충돌현상에 대한 작가의 입장은 소통 쪽이기보다는 불통에 가까운 것이었는가 보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두 사람 이상의 초상 이미지를 오버랩 시키는데, 여기서 오버랩은 이미지 읽기를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하는 것 같다.

마치 이쪽에서 보면 이 이미지가, 그리고 저쪽에서 보면 저 이미지가 보이는, 그리고 그 각각의 이미지는 서로 어떠한 개연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랜티큘러를 연상시킨다. 그 자체가 관점의 차이에 대한 메타포 같다. 여기서 동쪽에서 묻고 서쪽에서 답을 찾는다는, 문제의식이 재차 주목된다. 동쪽에서 물었으면 동쪽에서 그 답을 찾아야지 왜 서쪽인가? 자생성의 문제고, 주체성의 문제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대면하고 있는 동양의 미인과 서양의 미인. <동문서답>에 반영된 작가의 자의식은 불통으로 나타난 현대인의 소외의식을, 관점의 차이를, 그리고 여기에 자생성과 주체성의 문제를 아우른다.

이렇게 해서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랄 수 있는 차용과 이중 이미지가 해명이 된다. 차용된 이미지를 통해서 소위 문화적 충돌현상에 반응하는 한편, 이중 이미지를 매개로 관점의 차이와 함께 현대인이 저마다 앓고 있는 불통을, 소외를 건드린 것이다.

의미를 파생시키는 구멍들

이 모든 이미지의 이면에 작가의 작업의 또 다른 한 특징이랄 수 있는 구멍들이 있다.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촘촘한 구멍들이 작가의 주제의식을 지지하고 있는 것. 지금은 전기인두를 사용해 화면에 구멍을 뚫지만, 원래 이 구멍들은 일일이 향불로 뚫은 것들이다. 전기인두로 뚫은 구멍이 상대적으로 균일한 느낌을 준다면, 향불로 뚫은 구멍들은 이보다는 더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이고 우연성에 더 많이 노출되어져 있다. 이를테면 향불을 종이에 대고 누르는 힘의 강도와 미세한 시간상의 차이에 의해 얼핏 어슷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똑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구멍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구멍들에는 어김없이 불에 탄 자국이 가장자리 선으로 남겨진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형태도 틀리고 크기도 다 틀린 구멍들이 흡사 좀 벌레가 갉아먹은 종이나 무명천을 보는 듯, 시간에 풍화된 흔적을 보는 듯 고답적이고 낡은 느낌을 준다. 비록 도구가 전기인두로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마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 밑바닥에는 여전히 향불로 구멍을 뚫는 행위에 대한 남다른 의미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한 도구적 차원을 넘어서는 그 의미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한국화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카테고리로 치자면 지필묵을 들 수 있다.

한국화와 관련한 모든 문제의식과 형식실험은 그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종이에 향불로 태워 만든, 때로 촘촘하고 때로 성근 비정형의 구멍들이 그려진 이미지를 대신하는 작가의 화면에서 그 범주 즉 종이에 먹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특정성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그림을 그리는 대신 향불로 태운 구멍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한국화와 관련한 재료적 한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이나 방식, 형식이나 표정마저도 사뭇 다른, 혹은 판이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는 그림으로부터 만드는 그림으로 이행하는 것, 그림으로부터 공작으로 이행하는 것, 그것은 분명 한국화의 생리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거나 확장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그림은 한국화 고유의 아우라를 잃지 않는다. 한국화의 아우라 내지는 고유성으로 치자면 종이의 성질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작가의 그림에서 종이의 성질 곧 종이 고유의 물성은 그려진 그림에서보다 오히려 더 잘 드러나 보인다. 불에 탄 여실한 자국과 흔적이 종이의 물성을 즉물적으로 증언하거나 실현한 것인데, 그 흔적은 주지하다시피 작가가 한 땀 한 땀 수놓듯 종이 위에 새겨 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 한 땀 한 땀에는 그대로 작가의 호흡이, 일종의 수행적인 과정과 의미가 탑재돼 있다. 말하자면 화면 가득히 빼곡한 구멍을 심는 과정에 긴장과 이완이 교차되고, 이는 그대로 들숨과 날숨의 표상처럼 보인다.

그림에 일종의 숨구멍을 내는 행위를 매개로 종이의 생리와 작가의 생리가 상호작용하는 것. 어쩌면 작가는 그림의 생리를 호흡과도 같은 것으로 보았고, 그 호흡의 생리 그대로를 종이에다 고스란히 옮겨놓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호흡 곧 숨고르기에는 어떤 정신적인 측면이 있다. 더욱이 예로부터 향불을 사르는 행위에는 이런 정신적인 행위 내지는 정성과 애틋한 마음을 상징하는 부분이 있고, 작가의 작업 역시 어느 정도 그 상징적 의미와 무관하다고만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향불에 탄 종이에 난 구멍은 이처럼 종이의 물성을 증언하고, 호흡을 표상하고, 그 호흡에 실린 수행적인 의미를 상징한다.

처음에는 그 흔적 곧 향불 자국만으로 이미지를 만들다가, 이후 점차 그 위에 흑백 모노톤의 색채와 그림이 탑재된다. 그림은 흔한 자연풍경들, 그리고 작가의 유년이나 학창시절 등 개인사를 반영하는 사진들, 그리고 일부 근대사적인 생활사를 반영하는 사진들을 바탕으로 이를 축약된 형태로 재현한 것들이다. 독립된 상으로 제시되기도 하고(주로 자연풍경을 소재로 한), 일종의 이중 이미지의 형태로 중첩된 것들도 있다(주로 사진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이 일련의 그림들은 마치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고, 시간의 켜를 헤집어 과거의 한 시점을 현재로 호출한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고, 부재하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아득하고 서정적인 정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이중 이미지에 의해 더 강화된다. 이중 이미지는 말하자면 이미지를 현재로 불러내기보다는 과거로 밀어 넣는 것처럼 보이고, 부각하기보다는 은폐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와 과거 사이, 부각과 은폐 사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 어정쩡하게 위치해있는 이 그림들은 그대로 기억의 속성을 상기시킨다. 기억은 언제나 부재하는 것들을 기억하는 법이고, 이로부터 그리움과 향수가 딸려 나온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흐릿할 때 더 기억답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처럼 기억이 그리움과 향수의 정서로 전환되는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우연하게, 혹은 우연찮게도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에 <소멸과 생성>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부쳐 놓았다(물론 일부 다른 제목들도 있지만, 대개는). 소멸하는 과정을 통해서 생성시킨다? 향불로 종이를 태워 만든 구멍들의 집합으로 이미지를 일군다? 이처럼 이 제목은 작가의 작업에 내재된 과정과 생리를 함축하고 있고, 소멸된 것들을 생성시키는 기억의 속성을 반추하고 있고, 소멸과 생성 사이에 위치해 있는 (이중) 이미지의 운명을 상기하고 있고, 향후 그림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일종의 사이에 대한 인식이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게 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고, 이는 또한 일종의 이중 이미지의 형태로 현상할 것임을 예시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후 점차 지금의 그림에 보이는, 다른 색채와 그림들이 오버랩 되면서 좀 더 복잡하고 중의적인 의미망을 전개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된다. <소멸과 생성> 시리즈, <동문서답> 시리즈, 그리고 근작의 <무희자연> 시리즈를 역추적하면서 재구성해본 것인데, 이 일련의 그림들의 이면에는 어김없이 구멍들이 있다. 구멍은 그림을(그리고 그림의 의미를) 넘나들게도 하고, 헐렁하게도 한다. 작가는 그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인 구멍을 매개로 한국화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면서, 그 경계를 넘어선다. 그리고 이제 작가의 작업을 한국화로 범주화하는 것은 무의미한 지경에 온 것 같다.

그런가하면 외관상 팝코드의 적자처럼 보이는 작가의 그림은, 다른 한편으로 그 경계를 허물면서 유형화를 무색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 여기서 다시 작가의 그림이 일종의 이중성(그리고 사이에의 인식론)에 바탕을 둔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중적인 그림은 다중적인 그림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림은, 그림의 의미는 확장되고 이산된다. 그리고 여하튼, 작가의 그림은 쉽게 와 닿는 미덕이 있고, 그 미덕 속에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들을 탑재해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