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미술공간에서 묵은해와 새해를 잇는 시간대에 열리는 태이(Taey Iohe)의 ‘남해금산 (Namhaegumsan; Southern Sea Silk Mountain)’전은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영역에 걸쳐있으며, 예술적 차원으로부터 사회적 차원에 이르는 언어적 성찰을 보여준다. 한국에서의 개인전 형식은 처음이라 다소 낯선 작가이지만, 멀티미디어 작가로 귀결된 그녀의 선택과 행적은 매우 논리적이고 필연적이라 생각된다. 태이는 한국에서 국문과와 영문과를 복수로 전공하고, 90년대 중반 인터넷의 발흥으로 중요해진 문화적 키워드가 된 하이퍼텍스트를 연구 하다가 2천년대 초반에 영국으로 건너가 멀티미디어를 공부하였다.
고향을 오랫동안 떠난 자에게 모국어는 다시금 생경하고도 경이롭게 다가왔고, 서로 다른 언어 간의 번역 문제, 다른 작가들과의 예술적 대화 등이 자신의 텍스트와 더불어 등장하게 된다. 특히 미국에서 불행하게 요절한 여성 작가 차학경은 ‘여행하는 곳, 한숨 한숨마다 공기가 되어준’ 이로, 그녀의 많은 작품들에 스며있다. 우선 관객은 건조하면서도 냉랭해 보이는 현대적 작품 스타일에 붙여진 ‘남해금산’이라는 고풍스러우면서도 낯선 전시제목에 의아함을 느낄 수 있다.
남해금산은 이성복 시인의 작품에서 인용된 것이고, 원래 노점상의 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남해금산’이란 말 그대로 남해에 있는 금산(경상남도의 명산)을 말한다. 그런데 그 시의 프랑스어 번역이 ‘고통 뒤에 남는 것들’이라고 하니,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무한대의 심연이 있는 셈이다. ‘금산’에 대한 작가의 번역이 골드가 아닌 실크라는 것이 특이하다. 평범하게 직역 하면 실크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작가는 [Fear Note]라 붙여진 소책자에서 ‘silk’ 자리에 ‘golden’이라는 단어를 말소 하에 남겨 두었다.

‘말소 하에 둠’이라는 장치는 데리다의 용어로, 조셉 칠더즈와 게리 헨치가 [현대 문학과 문화 비평사전]에서 정리한 바에 의하면, 말소는 원래 완전히 가시적이었던 각인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한 흔적은 각인 그자체가 아니라, 각인의 부재를 알려준다. 데리다가 어떤 말의 기호를 ‘말소 기호 아래’ 놓을 때 그는 바로 일의적 의미, 진리, 혹은 기원이라는 것의 부재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은폐되거나 망각된 존재(혹은 의미)가 복원가능하다는 가정에 의지하지 않는다. 의미나 진리, 그것은 데리다에게 흔적일 뿐이며 그 흔적은 단어가 지닌 현전하지 않는 모든 의미를, 즉 단어가 지닌 모든 가능한 차연(différance)을 암시하는 것이다.
태이의 어법대로 한다면 ‘금수강산’을 번역할 때도 ‘silk’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남해금산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유목민이 되어버린 작가에게 아련한 유토피아, 또는 동질적인 시공간을 벗어난 헤테로피아 같은 장소를 연상시킬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선 번역을 비롯한 언어적 어려움을 포함하는 실례가 된다. 작가는 결코 완전히 번역될 수 없는, 즉 한 개념을 또하나의 개념으로 환원하기 힘든 미묘한 영역에 주목한다. 거기에는 말해지지 않은 단어들의 번역, 알 수 없는 이야기, 풀리지 않는 관계, 부재와 그리움 등이 존재한다. 그래서 타자와의 끝없는 대화가 요구되고, 작품은 수많은 ‘금산’들과의 대화로 이루어진 풍경이 된다.
1층의 설치 작품 [Threshold Sea]는 옥색과 하얀색 천으로 드리워진 12개의 방이다. 칸막이처럼 드리워진 한복을 지을 때 쓰는 실크 재질이라서 그런지, 커튼이나 가림막이기 보다는 여인의 치마폭을 들추는 듯한 야릇한 느낌을 준다. 또는 한국의 포장마차처럼 가리개를 젖히고 따뜻한 기운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는 구조가 연상되기도 한다. 제목 그대로 문지방 바다처럼 밀고 헤쳐 나가야 한다. 전체 조망이 가능한 투명한 지도가 아니라, 더듬거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그 안에 새겨 있는 한 문장처럼 ‘더듬거리는 말’과 비슷하다. 관객은 ‘목적지도 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기 위해 문지방을 건너는’ 상황, 즉 그때그때의 맥락에 따라 여정을 선택함으로서 맞딱뜨리게 되는 n개의 미지의 상황들은 그자체가 하이퍼 텍스트같은 구조이다. 거기에는 작가가 미국 현지에 있는 차학경의 아카이브를 연구에서 발견한 매우 사적인 일기 내용을 포함하여 상상의 관객에게 전하는 말 등이 새겨져 있다. 문장 형태 뿐 아니라, 대화에서의 인상을 다이어그램 식으로 표현한 것, 별자리 같은 도상 등이 포함된다. 그것은 암중모색 속에서 어떤 언어(parole)를 기다렸던 차학경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다.

2층의 설치작품 [She went through the walls]은 1층 같은 미로적 구조는 아니지만, 어둑한 공간 속에서 전체적 조망이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기둥과 천정을 휘감거나 관통하는 구불거리는 거대한 관들(Flexible Ducts)과 구석진 곳에서 미약하게 비추어지는 조명, 영사되는 빛에 드러나는 흐릿한 텍스트, 반복과 조합으로 환각적인(psychedelic) 느낌을 낳는 소리들이 공간을 채운다. 이전에 전시했던 흔적들을 감추면서 드러내는 부드러운 점들이 공간을 더듬는 이들에게 모성적 육체를 떠오르게 한다. 이리저리 얽히다가 외부(환기통)로 쑥 빠지는 관들은 공간과 몸을 중첩시킨다.
이곳에서 텍스트들은 벽에 비추어진 [구멍과 망치의 대화]같은 재미있는 글부터 접혀진 도큐먼트, 통 속에서 반복적이고 리드미컬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들에 이른다. 텍스트들은 보여지고 들려지지만 그 의미를 명확하게 특정할 수 없다. 여기에서도 머무름이나 정지 보다는 유목이나 표류의 느낌이 강하다. 튼튼해 보이는 낡은 구두 안에 가득 들어있는 반짝이 안료는 끝없는 이동 그 자체만이 그자신의 정체성을 보증할 뿐인 시적 오브제이다. 누군가의 물리적, 또는 언어적 행적들은 대기 속에서 산란하는 입자처럼 흩어지며, 임시적으로나 그러모을 수 있을 뿐이다. 지하 전시장은 전시의 전체 개념이 보다 명료하게 연결되는 장이다. 전시 장소는 트여있으며 밝고 작가가 배열해 놓은 항목들을 조목조목 읽어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빗소리나 파도소리 같은 배경음은 언뜻 서로 무관해 보이는 텍스트들을 ‘남해금산’이라는 테두리 또는 분위기로 묶어준다. 그것은 텍스트들 간의 상호 작용성을 고무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의미로 고정됨 없이 차이의 놀이와 복합성으로 인해 다양한 해석과 번역에 열려 있다.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수반하는 텍스트성(textuality)의 문제는 글자나 이미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 그 자체가 텍스트로 간주될 수 있다.
남해금산에 내재된 서로 다른 언어 간의 번역의 난감함이라는 주제는, 감각이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출연하는 비디오 작품에 다시 울려 퍼진다. 루소는 [언어의 기원]에서 단순한 소리와 조음을 구별한다. 그에 의하면 외침이나 신음소리는 단순한 목소리들이다. 벙어리나 귀머거리는 조음되지 않은 소리만 된다. 감각이 완전하지 않는 자들의 소리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지는 못하지만, 매우 표현적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정확한 전달을 위해 포기한 정념이 남아있다.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 [Pa Pa Possible]은 정상인이 구사하는 수화로 금방 사라지는 자막과 함께 실연된다. 그것은 ‘당신이 저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은 가능합니까?’부터 ‘죽지 않는 것이 가능합니까?’에 이르는 많은 질문들을 채근하듯이 쏟아놓는다. 목소리는 있지만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농아인과 그들을 위한 소통방식인 수화는 인간의 언어에 내재된 맥락, 요컨대, 적절한 분절음과 억양, 몸짓, 상황성 등의 문제를 드러낸다. 작품 [The Signer]는 [Pa Pa Possible]과 달리, 상대적으로 더듬거림이 없다. 그것은 실제 농아인이 등장하여 자막 없이 남해금산에 대한 이야기가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작품 [The Strata of the dialogue]는 박물관 속의 대상처럼 내용물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게 라이트 박스 안에 필적이 살아있는 텍스트와 드로잉 등을 깔아놓았다. 시인, 다른 동료 작가, 또 작가에게 각별한 예술가 차학경 등과의 실제적 혹은 가상적 대화들이 복합적 지층을 만든다. 글자나 이미지는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재현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거듭해서 겹쳐 쓴 양피지(palimpsest)처럼 알레고리의 특징을 가진다. 크레이그 오웬스는 현대문화의 특징을 억압된 알레고리의 복귀로 보는 한 논문에서, 소리와 텍스트, 다양한 오브제들이 등장시키는 여성 멀티미디어 작가 로리 앤더슨의 예를 든다. 그녀의 작품에서 세계는 기호들의 방대한 그물망으로 간주된다고 본다.
여기에서 기호의 독해가능성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앤더슨의 작품이 겨냥하는 바는 바로 해독불가능성의 문제이다. 알레고리를 활용하는 작가는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것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신을 그런 것들의 해석자로 자처한다. 그는 이미 잊혀 졌거나 불분명하게 되어버렸을 수도 있는 원래의 의미를 복원시키기 않는다. 알레고리는 해석학이 아닌 것이다. 그는 상실되거나 마멸될 수 있는 원래의 의미를 보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이미지에다 또 다른 의미를 덧붙일 뿐이다.
태이의 작품에서 대화나 소통 등은 꼭 우호적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슬픈 결심을 담은 작품 [I won’t write to you again]은 얼린 꽃이 녹으면서 씌여진 편지의 글자를 번지게 한다. 그 앞에 놓인 설치작품 [Collapsed Contranstellations]는 붉은 실로 성좌처럼 연결된 탁자가 반으로 부러진 모습이다. 끝없이 이어져야 할 연결망은 단절된 듯하다. 그 뒤에 놓인 쇠스랑이나 삽은 언어의 도구적 측면을 강조한다. 작품 [Two Used Text Tools]는 퍼 올리고 찍어내는 도구들 사이에 한글, 영어, 기호 등이 어지럽게 엉겨 붙어 있다. 그것은 단지 여기에 있는 것을 저기에 옮겨놓는 글쟁이와 진정한 작가의 구별에 대한 문제를 연상시킨다.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의 영도]에서 작가는 단지 독자를 텍스트 너머에 있는 특정한 사물로 데려가려는 이가 아니라, 글쓰기라는 활동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라고 정의 한 바 있다. 이러한 자의식적인 글쓰기 내지 독서에서 글은 안정성과 고정성을 잃고 차연과 대리보충(supplement)의 장이 된다. 여기에서는 어떤 토양 속에서 유기적으로 자라나는 언어의 이미지 대신에, 모종의 생산성을 위해 투여해야 하는 인공적 조치들--노동으로서 대표되는--이 두드러진다. 각자의 토양 속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언어들은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보다 강력한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재배치되고, 끝없이 견주어진다.
우리나라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번역의 문제라는 둥, 패권적 국가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체화해야 하는 등, 강박 관념화된 문제는 자국어로 자국민과 제대로 소통하는 문제도 원활하지 못한 근본적 상황을 흐릿하게 만든다. 크게 볼 것도 없이, 당장에 나와 너와의 대화는 어떠한가? 그리고 나 스스로와의 대화는? 상호적 이해를 위해 인류가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당위적인 문제일 뿐 사실은 아니다. 번역과 해석을 비롯하여 소통의 투명성과 자명성의 문제는 하나의 이상적인 상황이고, 이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은 조금씩 더디게 진전될 뿐이다.
언어 자체에 내재된 불투명성을 인정하는 것은 애매모호함에 탐닉하는 심미적 태도, 또는 정치적 보수주의를 낳는 막연한 불가지론에 함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폭력적으로 가정된 합의나 생산지상주의적인 코드화, 통일이나 총체성에의 가상이 아니라, 한계와 차이에 대한 감식안을 높이는 문제와 관련된다. 언어가 불투명하고 불완전하기에 변화에 대해 열려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의식하는 집단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그것은 예술적 언어가 사회에 용이하게 소통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예술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진가를 되찾을 수 있는 국면이다. 태이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차원의 언어적 소통과 그것에 내재된 난감함은 예술의 오래되고도 늘 새로울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문젯거리인 것이다.
수전 손택의 에세이 [해석에 반대한다]에 의하면, 해석의 문제는 예술을 모방과 재현으로 간주하는 오랜 관습 때문에 발생한다. 무엇인가 확실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가정되는 것을 꺼내기만 하면 된다는 발상이 예술에 대한 폭력을 낳았는데, 필자는 그것이 예술 뿐 아니라 일상어와 외국어를 비롯한 모든 소통 방식에도 해당된다고 본다. 손택이 말하는 ‘해석’이란 해석에 담긴 일련의 암호, 일련의 법칙을 예증하는 의식적인 행위를 뜻한다. 해석의 임무는 실질적으로 일종의 번역작업이다.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하는 것은 현상을 바꿔 말하는 것, 예컨대 현상에 상응하는 것을 찾는 일이다.
손택은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짓이라고 본다. 이는 세계를 이세계로 번역하는 것이다. 반면 진짜 예술에는 우리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해석자는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 다음에 그것을 해석함으로서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손택이 제안하는 해석의 폭력성으로부터 탈주하는 방식은 투명성의 회복이다. 여기에서의 투명성은 해석의 투명성이 아니라,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더 잘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감성의 회복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태이의 작품은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