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의 역학


미술은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한다. 재현적 관습은 이러한 시각화의 과정에서 강력한 줄기를 이루고 있으며, 미술의 역사는 재현이라는 굵은 줄기와 역학관계에 있는 또 다른 흐름들을 곁가지로 거느려왔다. 현대에 와서는 중심의 줄기와 주변의 곁가지들의 관계가 해체되어 뿌리줄기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언제나 중심이라는 암묵적 기준이 있으며, 그것으로 반복적으로 회귀하려는 경향 또한 강력하다. 이러한 재현적 사고는 단지 미술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 뿌리 내리고 있는 우리의 삶 전반에 퍼져 있다.

그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을 동일시할 질서와 체계, 현실 감각을 형성하는 원천이 된다. 이러한 동일시의 모델은 사회와 개인, 그리고 예술에 있어 안정감과 지속성을 부여해주지만, 동시에 거부해야만 하는 질곡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것은 대세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 진리라는 도그마를 낳기 때문이다. 재현주의를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되었고 근대와 탈근대를 거치며 사라진 것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그것을 단순히 시대에 따라 부침하는 문화적 관습이나 유행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재현주의는 분명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지만, 그 뿌리는 매우 깊다.

이 깊은 뿌리로 인해 중심 줄기를 상대화시키는 뿌리줄기 또한 풍부하게 번성해왔다. 중심을 상대화시키는 대안의 흐름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는 재현주의가 전제하고 또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경향성, 요컨대 재현을 둘러싼 역학을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지오토로부터 시작되는 르네상스의 시각혁명은 회화를 사물에 대한 재현으로 만들었다. 그 이전 시대에 이미지는 신이 창조한 신성한 질서를 연쇄적으로 반영하는 유사(類似,analogous)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수백년동안 내려와 익숙해 있던 배열이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르네상스와 함께 연속적, 선형적(lineal) 그리고 획일적인 것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한다.

당시에 혁명적 기술이었던 인쇄술은 구술문화의 전통을 끝내고 무엇인가를 명백하게 보이게 하는 관습을 낳았다. 맥루한에 의하면, 분명하게 밖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의 명시성은 한순간에는 한 가지만 발현되고 한순간에는 한 감각 그리고 한 가지 정신 혹은 물리적 작용만이 발현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 주도적인 감각이 된 것은 시각이다. 공간은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가 되었으며, 그 공간을 지배하는 고정된 시점(하나의 관점)이 중시되었다. 선 원근법은 지배적 시각적 관습이 되었는데, 이 표상(representation)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공간 개념은 직선적이며 균일한 것이다. 한명의 화가를 넘어서 만물박사라고 할 수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현의 관습이 확립된 르네상스 시대처럼 과학과 예술이 근접했던 시대도 없다.

균질성과 선형성에 바탕 하는 과학과 예술의 공식은 바야흐로 전개될 민족(국민) 국가나 상품사회의 기저, 노동 분화와 세계 시장의 창조의 틀을 이루는 것이다. 반복 가능성이라는, 재현에 내재된 기술적인 측면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점은, 기술과 더불어 보편적 문화가 된 상업적 측면이다. 데이비드 서머스는 [재현]에서 재현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이루는 ‘repraesentatio’이라는 말이 ‘존재하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한다. representationalism’라는 단어는 ‘현재’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적 현재는 가까이 있는 것,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으로서, 닿을 수 없는 과거나 미래와는 대조적인 것이다.

그는 또한 ‘repraesentatio’가 현금으로 지불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고 덧붙인다. 그것은 완전한 등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대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대등한 현존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현금이 교환될 상품에 직접적으로 등가인 것처럼, 상상력을 통해 대등한 힘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현은 부분적으로는 상업적인 유비에서 비롯한다. 재현은 등가의 세계를 열었다. 이렇듯 재현주의에는 만물을 균질적인 코드로 환원시켜 가격을 매겨 교환할 수 있다는 해석이 깔려 있다.

물질적이고 현세적 사고를 지향하는 중산계층이 부상할 때 마다,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 등으로 나타난 재현적 예술이 전성기를 구가했음을 미술사는 보여주고 있다. 명확히 ‘보이게 하는 것’에 내재된 현실적이고 상업적인 동기는 첨단 기술의 시대에 더욱 힘을 발휘하고 있다. 세계를 재현의 대상으로 삼는 자리에서 주체가 탄생한다. 데이비드 서머스에 의하면 르네상스식의 투시도법은 가상공간 안에서의 관계들을 특히 양적인 방식으로 재현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명백하게 하나의 주체를 위한 가상공간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투시도법은 객관적 공간 질서보다는 주관적 시점에 대한 은유로서 근대성의 언어로 등장하게 된다.

주체를 위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상상력은 시공간적 지평을 보여주며, 세계의 통일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주체의 통일성으로 인해 통합된다. 이와 같은 통합 내에서 재현은 도식적이며, 모든 경험에 선행하는 잠재적 관계로 규정된다.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나 거울과 비교될 수 있는 재현의 역학은, 카메라 옵스큐라처럼 관찰주체의 위치를 공간적으로 시각화하며, 외적 세계를 표상하는 내적 세계라는 자아의 위치를 규정한다. 원근법은 주체로부터 출발하는 선이 세계 저편의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공간 구성을 말한다.

주체의 자리는 신적인 관점을 대신하는 초월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같은 시점은 같은 비전을 낳는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성의 이면은 획일성이다. 그것은 현대인이 개성적이고 내향적인 개인이자, 동시에 익명의 다수인 대중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재현주의에 담긴 균질성과 획일성은 시인이자 화가인 블레이크가 ‘그들은 그들이 보았던 것대로 되었다’고 한탄 한 근대 문화를 낳았다. 세계를 재현이자 생산의 대상으로 삼는 일률적 과정들에는 소외와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동되기 마련이다. 세계의 수량과, 즉 동일한 시각 코드로의 환원을 통해 같은 것을 생산하고 욕망하고 소비하는 것은 근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미술에서의 재현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분절화와 추상화를 통해 이룩한 생산력 혁명과 세계 시장의 확립이라는 역사적 흐름의 일부이다. 고정된 시점과 지배적 시점은 구별할 수 없이 얽혀 있는데, 현대 미술가들의 과제는 이 고착된 시점을 여러 시점 중의 하나로 상대화시키는 것에 있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세계를 보는 과정 자체에 내재된 이질적 흐름을 전면화한다. 이를 통해 개개인을 비슷한 대중으로 코드화하는 시각적 체계를 해체한다. 시각과 시각성을 연구한 노먼 브라이슨의 [확장된 장에서의 응시]는, 망막과 세계 사이에는 기호들의 스크린, 즉 사회적인 활동의 장을 이루는 시각에 대한 모든 다양한 담론들로 구성된 스크린이 삽입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볼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어떤 그물망, 즉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의미망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유동적 모자이크인 이 그물망은 그것을 다루는 개인적인 수행주체보다 더 거대하다. 내가 볼 때 내가 보는 것은 나의 봄에 앞서 이미 놓여 있던 궤도들 혹은 의미망들에 의해 형성된다. 보고 말하는 것의 주체는 개인을 이미 선점하고 있는 언어의 의미망이다. 시각은 타자의 장 주변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중심으로서의 자율적 주체를 가정하는 재현적 사고는 결코 투명하고 중성적인 구조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목적의 산물이 물화된 것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출전 | 성산아트 2010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