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생명이 공존하는 유토피아


인간과 동식물들이 바글거리는 구연주의 그림에는 대상의 고유색과 형태가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지만, 개체의 온전한 모습과 암수의 짝을 이루는 균형이 유지된다. 많은 작품들이 위아래 없이 둥글려가며 볼 수 있는 대칭적 구조를 가진다. 태극 문양을 떠오르게 하는 이러한 구조는 만물에 내재된 동등한 권리와 자연의 순환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순환적 화면 구조를 가지는 작품의 경우 가운데 부분이 검은 바탕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태초의 음양이 만나서 새로운 생명을 낳는 상징적 우주의 중심이 된다. 그의 작품 속 생명들은 적대적인 다수와 경쟁하는 단독자로 살아가는 존재의 쓸쓸한 모습은 발견할 수 없다. 온 생명의 어울림이 펼쳐지는 그의 작품은 축제의 활기와 풍요, 그리고 유토피아적 비전이 느껴진다.




작가는 ‘내 그림의 테마는 생명, 공존, 유토피아’ 이며, ‘이 세 가지 주제를 이어주는 것은 생명사상’이라고 말한다. 그의 그림에는 나무와 풀 같은 식물, 어류나 양서류로부터 조류, 곤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들이 번성하고 있으며 서로의 영역을 침해함 없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어떤 종이든지 사람 같은 발을 가지고 있어, 인간과 차별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동류에 놓인다. 서로 구별되지만 동등한 힘을 가짐으로서 상호 보완하는 구조는 색에서도 관철된다. 그는 존재의 순수함을 표현하기 위해 원색을 사용하고, 보색 대비를 활용하여 화면에 활기를 부여한다. 그 외에 흰색과 검정색이 추가되어 원색과 보색 대비의 남발에 따른 시각적 부담감을 완충한다.

작품 속 형식적 장치는 그가 수 십 년 간 몰두하고 있는 성리학적 생명사상과 연관된다. 그는 보색 같은 효과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음과 양처럼 상반되는 가치들 간의 상호보완과 견제를 통해 조화로운 관계가 형성된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것은 차이가 보완이나 풍요로움이 아닌 투쟁과 갈등으로 귀결되며 불균등한 권력 관계로 점철되어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다분히 이상주의적인 세계관에 속한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였고 다시 읽혀지고 재해석되어야 할 가치로 다가온다. 철학과 종교, 그리고 예술에는 이러한 이상주의의 씨앗이 자라서 번성할 수 있는 해방구가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것은 가혹한 현실에 대한 위로, 또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으로 전화될 수 있다.

구연주의 그림이나 생각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균형 장치의 하나이다. 대립되는 것들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작가의 싸인 까지 두 개로 남겨놓을 정도지만, 그것은 가장 편리하고도 위험한 사고체계인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와는 구별 된다. 어느 한 편만이 옳고 서로 다른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사고는 투쟁의 악순환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구연주가 주목하는 성리학의 생명사상은 자신의 상대를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공존이다. 공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신이나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구연주는 성리학의 세계관이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자연의 이치에 맞추어 살려고 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교에서 궁극의 가치로 제시한 것이 생명 사상이고, 생명은 각기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조화를 이룰 때 얻어지는 것으로 본다. 그의 작품은 잊혀지거나 잘못 받아들여진 전통을 고쳐 읽는 오랜 연구와 밀접하다. 자연으로의 회귀라는 결론은 서구의 양대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도 있지만, 그 맥락은 다르다. 서구 미학에서, 고대로부터 자연은 ‘가시적인 사물의 총체’를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의 생성과 자연법칙, 또는 자연적 사물의 생성원리, 힘’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다시 말해 창조된 자연과 창조하는 자연이 구별되었다.

창조하는 자연은 예술사에서 자연의 원인, 근본, 본질을 모방하려는 경향으로, 창조된 자연은 자연적 사물의 총합의 모방으로 나타난다. 예술사는 양자의 경향을 왕복하곤 하였다. 법칙을 중요시하는 자연관은 주체와 객체 간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자연을 인식하고 통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현상을 중요시하는 자연관은 주체와 객체 간의 일치를 바탕으로 한 일원론의 경향으로 기울어진다. 고전주의는 이원론을 바탕으로 하는 지배적 전략이, 낭만주의는 일원론을 바탕으로 순응적인 경향이 주도적이었다. 고전주의는 규율과 절도, 이성을 중요시하지만 낭만주의에서는 자연이 거의 주인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낭만적 태도는 무한성을, 고전적 태도는 언제나 한계의 개념에 충실하였다. 고전주의는 미에 있어서 고정된 표준적 형식들을 중요시하여 수학은 아카데미 미술의 시발점이기도 하였다. 고전주의가 이상 미와 아름다운 자연에 기울었다면, 낭만주의는 자연의 분위기, 기괴한 국면들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공통점은 한정된 현실생활에서 도피하여 영원한 세계에 이르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내세가 아니라 현세이며, ‘하나’와 ‘둘’을 넘는 진정한 다원주의일 것이다. 이것이 성리학적 생명사상을 비롯한 전통이 대안의 가치로서 재해석 되어야 할 맥락이다. 진정한 다원주의는 차이가 차별로 전화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된다.

이점에서 구연주가 주목하는 생명사상은 서구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다르다. 신/인간/자연의 위계질서를 전제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은 인간이 자연을 초월하여 이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태도를 낳는다. 이러한 태도는 형식적으로 원근법을 만들게 했다. 구연주의 작품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 중심이자 척도가 되는, 그래서 자연의 세계를 인간의 관점으로 도해하는 인공적인 방식, 즉 인간적으로 이해된 자연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원근법이다. 원근법이 완성시킨 것은 공간의 수량화, 즉 수학적인 공간이다. 그것은 신-인간의 관점으로 외부의 세계를 총체적으로 표상하려는 의도가 있다. 표상적 세계관은 앎을 통한 지배를 낳았다. 근대 과학의 관점과도 교감하는 표상적 세계관은 세계를 하나의 기계로 간주한다. 그 기계는 처음에 신에 의해 창조된 후 어떤 정해진 원리에 따라 기능을 발휘한다.

자연과 이성은 동일시되었고, ‘아는 것이 힘이다’를 모토로 한 실용적 과학, 또는 데카르트가 말한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들어줄 과학이 현대 세계를 지배했다. 그것은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로서 그가 살고 있는 우주를 알고 지배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모든 언어활동의 동질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예술과 자연 사이의 조화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표현이다. 앎을 통한 지배보다는 삶에 순응하는 낭만적 미학은 고전적 미학에 비해 동양의 전통과 조응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기원은 자연과 신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이나 물활론적 세계관이다. 자연을 유기체로 간주하는 사상, 즉 자연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자연 현상의 원인은 생명이 가진 감각과 욕망들로 간주하는 미학은 질서에 대한 은유로서 기계론보다는 유기체론을 옹호한다.

낭만주의는 자연의 부동성을 거부하고 생명의 창조력, 무한한 변형 능력과 운동을 강조하며, 자연을 주관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 주관이 자아의 연장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꾀하는 낭만주의 미학에서 ‘존재하는 것은 일체 자아’(피히테)가 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전 우주와 자신을 연결 짓는 신의 감각을 묘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기계나 유기체로 세계를 간주하는 철학과 미학은 오늘날 보편화된 현대성의 기원이 된다. 구연주가 주목하고 다시 읽어낸 성리학의 생명사상은 이러한 현대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가치의 하나로 다가온다.

출전 | 미술과 비평 2010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