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래는 20년 동안 [기억으로부터]라는 유일한 작품제목을 고수해 왔다. 그것은 단순히 생각의 수고로움을 덜기보다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처럼 장편 소설을 하나 쓴다는 생각의 발로이다. 그의 작품에서 기억은 사(私)적인 것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전통에 대한 연구로부터 출발했다. 대학원 졸업논문을 고구려 고분 벽화에 대해 쓰면서,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1991년 첫 개인전 작품에서 사신도 형상이 등장했고, 차츰 비구상화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고대 벽화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물감이 아닌 흙을 안료로 사용하게 했다.
초창기에는 단청안료에 흙을 개어 쓰는 식이었는데, 차츰 물감이나 안료가 배제되고 90년대 중후반부터는 100% 흙만 사용하게 되었다. 그림에 쓰는 흙도 다양해서 시골의 무밭에서 채취한 붉은 흙부터 태백의 탄광촌, 서해안의 뻘 흙, 도자기 공방에서 구한 청자토, 백자토, 옹기토 등을 활용하였다. 흙에 대한 작가의 매료는 그것이 물감에 비해 안정적인 화학구조를 가지고 있어 햇빛에 색이 바래지 않고 거의 영구불변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흑백사진처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가령 같은 흰색이라도 장석가루, 석영가루, 운모가루의 흰색이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감은 색을 발산하지만 흙은 흡수하기 때문에, 시각적 부담이 덜하고 쉽게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인간의 피부색과 같은 계열인 황토색은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흙이 얹혀지는 바탕도 수축과 이완이 많은 장지나 화선지 등,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 보다는 캔버스 아사 천을 쓴다. 아교처리 하지 않은 생천을 공장에서 주문해서 쓰는데, 견고함과 보존성이 있다. 김창래의 작품에서 흙은 형식적인 면 뿐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질서를 생성하는 원초적 혼돈이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내가 바로 흙이고, 흙은 지구를 만든 기본요소이며, 인간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에게 흙은 오랜 시간의 지층을 내포하며, 작업이란 이 지층을 헤집어 꺼내는 기억에 관련된 것이다. 다양한 명도와 채도, 색상, 방향, 속도를 가지는 황토색 계열의 형상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화면은 시간의 편린들이 떠 있는 공간이다. 김창래에게 흙이라는 물질은 지각과 기억의 매개로, 정도 상의 차이만을 가질 뿐이다. 그의 작품에서 구현된 기억의 층들은 단지 시간에 의해 흐릿해지는 습관적인 기억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과거와 미래는 매 순간 변화하는 현재의 감성과의 관계망으로 재 맥락화 된다. 화면 속에서 절편화 되어 있는 시간의 이미지는 즉발적으로 휘두르는 붓에 의해 부침하는 무의식의 자료들이다. 작품의 출발이 되었던 고대 벽화는 무의식에 내재된 고고학적 측면을 드러낸다. 그램 질로크는 유년의 도시를 고고학적으로 조명한 발터 벤야민에 대한 연구서에서, 고고학자의 과제는 과거 생활의 증거와 무의식에 깊숙이 박혀 있는 충격을 발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억하고픈 개인의 유년시절은 어떤 문화의 여명기를 발굴하는 작업과 동렬에 놓일 수 있다.
작품란 개인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만나는 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이라는 은유에서 미로(발굴계획, 같은 장소로의 지속적인 귀환), 의식적 회상(주의 깊은 탐침, 결실 없는 조사), 무의지적 기억(기대하지 않은 발굴)은 모순된 계기들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작가의 고고학적 실천은 과거가 완결되고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망각되고 죽은 자를 되살리기 위해 현재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의 결을 거슬러 올라가 개인적인 기억이라는 형태로 역사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회상된 시공간은 영원히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이다. 그것은 고분벽화처럼 깨지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다. 프로이트의 생각처럼, 아름다움이 그 속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것이 소멸과 죽음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구상적인 형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김창래의 화면에서는 화면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거나 위로 떠오르는 식의 표현을 통해 원근감이 형성된다. 잠재적인 것이 현재적인 것이 되고, 현재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이 된다. 현재성과 잠재성은 명확히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서로 뒤섞인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기억의 개념을 연구한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무엇이 현행적 이미지이고 무엇이 그 반영인지는 종종 분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분별불가능성을 가시화하는 것은 비(非)연대기적 시간의 끊임없는 균열과 쪼개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시간 이미지의 여러 면은 분별 불가능성의 형상을 조직하는 네 가지 축, 즉 현행태와 잠재태,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투명한 것과 불투명한 것, 배아와 환경으로 결정화한다. 물질과 기억은 상호침투하며 기억의 층위를 확장해 간다.
김창래는 흙을 유기적이고 자연스러운 매체로 간주하며 즐겨 사용하고, 그것은 그림에 적합한 재료로 만들기 위해 많은 연구를 거듭하였지만, 표현방식 자체는 유기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은 명확한 참조대상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은 같은 책에서, 유기적 체제에서 사유함과 결정체적 체제에서 사유함을 대조한다. 전자의 경우는 자기 동일적인 존재를 지향하는 것이며, 부인과 반복을 통해 개념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 사유함은 지속적으로 열리는 생성 내에서 차이와 비동일성을 통해 개념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유기적 묘사는 대상의 독립성을 상정한다. 즉 영화화 이전의 공간은 카메라에 의한 묘사보다 앞서 존재하는 실재를 대표한다고 전제된다. 그러나 시간 이미지는 비유기적 이미지, 즉 결정체적 이미지를 지향한다. 사물의 표상을 벗어나 순수묘사를 지향하는 현대예술은 이러한 결정체적 이미지와 관련된다. 순수묘사는 이미지를 사물에 부착하는 지칭의 고리를 느슨하게 한다. 결정체적 묘사는 감정적, 우발적이다.
그것은 대상을 대신해 지속적으로 그것을 지워나가는 한편, 대상을 새로이 창조하고 마찬가지로 적절한 또 다른 묘사로 대체되며, 이는 앞서 묘사를 변경하거나 심지어는 그와 모순될 수 있다. 결정체적 묘사에서 이미지는 대상을 통해 유기적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탈구성되고 다양화된 대상을 구성하는 묘사 자체가 된다. 묘사된 대상은 형태를 잃고 새롭게 창조됨으로서 대상이 고무하는 정신적 그림을 확장 심화한다. 그것은 행동과 운동을 연장하거나 서로 연결되지 않고 잠재적 이미지의 팽창하는 원을 형성한다.
현대예술은 이러한 방식으로 고전미학, 요컨대 인과관계의 사슬로 연결되어 더 큰 유기적 전체에 통합되는 형식으로부터 탈피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김창래의 작품에서 기억은, 기억의 원이 회복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플래시백처럼, 선형적 인과성이나 실재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더욱 잘 회복하기 위해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이미지는 순수묘사를 통해 직접적 시간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러한 결정체 기호(Hyalosigne) 또는 결정체 이미지는 시간의 지층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출전 | 미술과 비평 2010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