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이 놓이는 현실적 맥락을 블루 스크린처럼 지워버리는 어둡거나 밝은 무채색 배경, 상하좌우의 상호적 반사를 야기하는 무기질 표면들, 지문하나 찍혀 있을 법하지 않은 투명하고 깨끗한 용기들, 그 안에 들어 있는 색색의 음식물들이 김형인의 작품 속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이 소우주 속에는 인간이 먹고 마시고 읽고 사용하는 구체적 사물들이 안치되어 있으나, 그것들은 어떤 실제적 사용도 거부한 채 최상의 상태 속에서 오직 보여 지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배열되어 있다. 무중력 공간에 있는 듯한 유리된 느낌은 음식물의 표현에서 극대화 된다.
결코 상할 것 같지 않은 과일, 플라스틱 조각들처럼 보이기도 하는 색색의 초코 볼, 어떤 내용물인지는 모르나 화학적으로 합성된 단내가 풀풀 새어나올 것 같은 아기자기한 소포장의 과자들이 그렇다. 원재료를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식품들은 거의 캡슐이나 봉지에 담긴 약처럼 보인다. 와인이나 과일 쥬스라기 보다는 아니라, 화학약품을 담아 놓은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드는 크리스탈 컵과 유리병 속의 액체들은 미각보다는 오직 시각적 대조가 야기하는 산뜻함에 호소한다. 음식물을 담은 용기들은 몸과 비유--양분과 기관들이 담겨있는 하나의 거대한 주머니--될 수 있는데, 김형인의 작품 속 용기와 내용물이 가지는 인공적 색상과 형태, 표면질감은 그에 상응하는 또 다른 몸을 떠오르게 한다.
스마트 음료와 필수 영양분이 담긴 캡슐 몇 개로 보다 자연에 가까운 이전의 거친 음식물을 대신하는, 새로운 물질적 현실 속에 존재하게 될 그러한 몸 말이다. 가상성이 농후하게 된 새로운 현실 속에서 유기적 신체는 재조정 된다. 그것들은 자연으로부터 더 멀어져 어떤 부분은 더욱 강화되고 어떤 부분은 더욱 약화된다. 새로운 몸은 유리병처럼 더 단단하고 더 깨지기도 쉽다. 마가렛 모스는 [정보사회의 구강논리학]에서 유기적 육체와 그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들--즉 사이보그가 되고자 하는 인간들--이 비(非) 음식, 즉 음식의 유기적 혹은 자연적 가치라는 개념자체를 거부하는 음식을 먹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것은 소화할 수 없는 형태로 되어 있어, 육체를 그대로 통과해 버리고 만다. 그것은 음식의 모사물(simulacrum)이며 텔레비전 화면과 컴퓨터 스크린의 이편에서 축적되는 지방에 대한 해결책, 즉 몸을 씻어내기 위해 생활방식에 아무런 변화도 요구 하지 않는 해결책이다. 스마트한 비 음식들은 맛이 좋지 않고 약과 같다. 그러나 일단 두뇌에 화학물질 사이에 적절한 적합성을 달성하면 스마트 약은 자연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정신적 수행능력을 향상시킨다. 약물에 관한 서술에서 스마트함이란 신경전달의 효과를 증진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우주시대의 혼합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정신활동에 관한 요구사항이 점점 더 늘어날 미래를 준비하는 마술의 일부이다.
음식물의 표현에 보이는 괴리감은 결코 사물에 대한 작가의 묘사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의 엄청난 극사실적 묘사수법은 냉랭한 시각적 환영을 강조하기 위한 듯하다. 그의 그림 속에 보여지는 음식들은 회화가 본래 보기 위한 것, 오직 보기 위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보기 위한 음식들은 상품으로서의 식품이 최상의 이윤을 위해 그 내부를 텅 비워두고 표면에 모든 것을 띄워 놓는 제조 및 마케팅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플라스틱 질감과 색상의 정물들은 재현 대상물의 부재를 부인하는 존재감을 가진다. 번질거리는 무기질적 표현과 말끔히 정리된 배경은 광고 사진 같은 실재효과를 자아낸다.
사진은 회화보다 더 실재를 투명하게 복제할 수 있는 믿음을 주며, 우리 주변을 둘러싸는 사진적 시각 환경들은 현실 그 자체를 만들어낸다. 존재자체를 스스로 증명하는 사진적 코드들은 바르트가 실재 효과라고 명명한 사진술의 투명성과 편재성과 관련된다. 김형인의 그림은 ‘죽은 자연(natura morta)’이라는 정물화의 오래된 의미를 벗어나 합성된 자연으로 이행한다. 죽음, 또는 시간의 흔적을 지운 ‘자연’은 오히려 한 공간에 고착된 죽음 그자체로 드러난다. 특정한 장소성을 지워버린 곳에 놓여 진 정물적 대상들은 자연을 흉내 내는 때깔 좋은 식용색소로 온통 코팅되어 있다. 그것들이 담겨 있는 유리나 플라스틱 용기, 그리고 포장지들은 애초에 자연적 기원이 지워진 대상들의 껍질을 겹겹이 싸고 있다.
김형인의 그림에서 막대사탕이나 과일 등을 전경에 배치하여 그림으로 들어가는 시각적 입구를 마련하는 것은 전통 정물화적 수법임과 동시에, 가상 이미지로 매끄럽게 들어갈 수 있는 형식적 장치가 된다. 그의 정물화는 매우 자세히 그려졌지만, 현실의 재현이나 반영이 아니라 인공적 합성의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것은 인공성이 강한 색채와 질감의 구현에 힘입은 바 크며, 반사성이 강한 기물에 의해 난반사되는 환영들은 저 먼 곳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 명멸하는 신기루 같은 모습이다. 다가가면 더욱 멀어지면서 목마름을 계속 야기하는 신기루들은 유혹의 과정을 끊임없이 연장시키기 위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표면 효과가 필수적이다.
거울이 아니라, 스크린이 지배하는 시뮬레이션의 시대를 언급하는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토탈 스크린]에서 가상적 표면은 원래 텅 비어있어서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있고 실시간으로 공백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상 세계에서 주체가 완벽하게 실현되면 주체는 자동 해체되어 객체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공포이다. 근대 표현주의 풍의 칙칙한 공포는 팝아트 풍의 백색 공포로 변화한다. 보드리야르는 다른 책에서도, 사전에 차갑고 투명하고 광고적인 것이 되어버린 하이퍼리얼한 세계에서 예술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팝 아트가 내놓았다고 본다. 가령 앤디 와홀은 이미지 한가운데로 무(無)를 다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가라는 것이다. 스펙터클 사회의 현란함을 반짝거리는 표면으로 연출한 팝아트에서 처참한 사고와 죽음의 이미지는 짝패 같은 관계를 가진다. 완벽한 화장술을 구사하는 여인처럼 시간의 흐름을 타고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자연의 흔적을 될 수 있는 대로 지우는 김형인의 정물화 역시 이미지 한가운데 존재하는 부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팝아트의 계보를 잇는다. 그의 정물화가 주는 시각적 쾌락과 환상성은 물신이 만들어지는 구조와 같다.
‘나도 알아, 그렇지만...’으로 시작되는 물신 숭배의 메커니즘에 의해, 우리를 에워싼 이미지들에서 무엇인가 핵심이 빠져나간 사실은 상실이나 박탈감이 아닌 매혹과 집착으로 반전된다. 정신분석학이 설명하는 물신처럼, 부재와 상실에 대한 쓰라린 진실을 부인하고, 그것을 대체하는 일련의 대상들에 대한 이끌림이 자리 잡는 것이다. 백색 공포는 끝없는 표면들에의 탐닉으로 반전된다. 그의 그림 속 단내 나는 음식물이 주는 가상적 포만감은 시각적 포만감과 중첩된다. 상품생산에서 기호의 생산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대체물은 무한대로 늘어날 수 있으며, 그것이 현대인의 욕망을 끌고 간다.
출전 | 미술과 비평 2010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