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의 나는 누구인가


김진은 공간과 인간 사이의 괴리를 통해 현대인의 소외를 다룬다. 그가 설정한 소외의 무대는 30대에 오랜 유학생활을 하던 영국의 실내로, 화려하고 고색창연한 곳부터 소박한 농가주택에 이르는 다양한 계열을 가지지만, 그 안을 가득 채우는 각종 사물들과 잘 구별되지 않은 자화상이 공통적이다. 그는 보다 성공적인 적응을 위해 그곳에 융화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융화는 인간의 물화라는 대가를 치룬다. 사물로 가득한 실내에 숨은그림찾기처럼 배치된 그는 마치 보호색을 띈 듯, 또는 투명인간이나 유령처럼 아무런 존재감 없이 퀭한 표정으로 앉아 있곤 한다.

그는 사물들과 구분 없이 보여지는 자신을 회화라는 창으로 다시 바라본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부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더 나아가 현대인의 보편적 존재 조건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폴 리쾨르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그처럼 뿌리 뽑힌 채 고유한 신체와 결속된 모든 시공간적 지표들에 대해 회의하는 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동일자 속의 타자를 강조하는 노 철학자의 대답은 ‘나는 아무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어떠한 동일화도 거부된 인물은 역설적으로 ‘여기에 내가 있다’는 표명으로 통합될 수 있다.

이러한 드러냄의 장치는 회화와 오랫동안 친숙했던 창이다. 김진의 그림에는 창이 자화상과 함께 짝패처럼 등장하고, 전체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이 바라보는 회화의 창 또한 강하게 의식 된다. 실내는 인테리어 잡지 등에서 수집한 것과 실제의 풍경이 혼합된다. 전자는 카메라로 찍혀진 것이지만, 후자는 지나가면서 슬쩍 본 장면이다. 남의 집 실내를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는지라 실재로부터는 분위기와 인상만 취해진다. 인테리어 사진이 외눈의 원근법적 시야를 전제한다면, 작가의 육안은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본 것이다. 이러한 조망은 안정되고 이상적인 재현에 빠져드는 것을 방해한다.




상품 카달로그와 실재의 관계는 소유 욕망의 투사라는 점에서 꼬리를 무는 호환성을 가진다. 이러한 순환성은 이방인의 시점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다가온다. 김진에게 창은 공간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막 같은 것이다. 창은 또한 보는 방식, 곧 세계관이기 때문에 공유할 수 있는 부분과 그러기 힘든 부분이 존재한다. 그것은 투명하기도 하고 이물감을 주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 두드러지는 것은 이물감이다. 그림이라는 창, 창 속의 또 다른 창들은 의식하게 하는 교란 장치들은 각각이 가지는 거리감을 전제한다.

이러한 거리감은 작가가 생활인이자 화가로서 처한 괴리감들을 표현한다. 창들과 그 위의 검은 얼룩들은 일종의 소격 장치인 셈이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영국의 전형적인 실내풍경을 이루는 골동품들이다. 어지러운 붓질 때문에 흐릿하지만, 어느 작품이든 빽빽이 꽂혀 있는 책들, 출처가 불분명한 이국적 사물들,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과도할 만큼 가득하다. 소비와 욕망은 서로 맞물리면서 생활공간을 구축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한데 모여 있다는 것 뿐 어떠한 체계나 질서와도 무관해 보인다. 이방인에게 쉽게 동화할 수 없었던 그 세계가 그러했을지 모른다. 공적 세계와 구분되는 사적 공간으로서 중산층의 실내는 보호와 유폐를 동시에 내포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개인을 보호해주는 소우주이자, 점차 늘어나는 자아의 연장으로 인해 타자와의 조우가 힘들어지게 된 답답한 상자 같은 곳이다. 실내를 가득 채우는 사물들은 사유화된 삶의 환상적 기념비들이다. 이러한 장소는 발터 벤야민이 부르주아적 사물 질서--우연한 획득과 무질서라는 특징을 가진다--의 공간이라고 특징지은 바 있다. 부르주아는 ‘실내에 자신의 꿈과 은밀한 욕망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멀리 떨어진 곳과 과거의 사물들을 수집’하며, ‘대도시에서 사적인 삶의 하찮은 본성을 보상받기 위해 노력하고 막혀진 벽 속에서 보상을 추구’(벤야민)한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한 사물들과 공간을 통해 표현되는 자기만족은 취약하기 그지없다. 감옥과도 유사한 부르주아의 실내는 이방인은 물론이거니와 원주인도 살아있는 시체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곳은 탈출하기도 힘들고 머물러 있기도 힘든 장소이다. 마치 우리의 삶의 무대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작품 제목으로 사용하는 [N_either]라는 단어에서, 작가는 ‘N’이 ‘&’ 같은 느낌도 준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선 끊임없는 ‘그리고’로 연결된 정신분열증적 기표들이 쇄도하고 있다. 작가는 창을 통해서 안과 밖을 나누지만, 작품 속 인간이 그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는 늘 불확실하다.




계절도 시간도 모호하다. 거기에는 어느 시공간대에도 확실하게 속할 수 없는 애매함이 있다. 칙칙한 회색 빛 삶 속의 소외를 만회하려는 듯, 김진의 작품은 보색이 많고 채도가 높은 화려한 화면이 특징적이며, 커다란 화면에 토해내듯 분출하듯 신나게 그어진 선들이 두드러진다. 작품 제작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즉흥성은 당연한 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완고한 대상들에 내재된 임의적 시공간을 폭로한다. 때로는 역동적으로 때로는 어지럽게 보이는 붓 터치는 사물의 의미를 실어 나르는 기호의 투명성을 흐릿하게 만든다.

폴 리쾨르는 기호를 다른 사물을 표상하는 하나의 사물로 정의한다면, 투명성은 기호가 표상을 위해 소멸하고 따라서 사물로서 자신을 잊게 만드는 경향을 드러내는데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물로서 기호의 이와 같은 말소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자신을 불투명하게 함으로서, 그것은 다시 스스로를 사물로 증명하며 존재하는-부재하는 실체라는 역설적인 구조를 드러낸다. 김진에게 기호에 해당되는 상황은 인간에게도 적용되며, 수년간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붙여진 [N_either]라는 작품 제목에 나타나 있다. 그의 작품에서 기호의 불투명성은 사물의 실루엣만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의 형태감과 대상의 고유색을 벗어나는 방식과, 영국의 오래된 창에 있는 때와 스크래치로부터 나왔다는 검은색 선들에서 두드러진다.

그것은 관객의 시야를 방해하고 시선을 겉돌게 한다. 창의 투명성을 교란하는 검은 선은 구상적 기원을 넘어서 회화의 언어로 발전하며, 화면 안의 창이나 화면 위에 떠 있는 공간과 흡착된 검은 선들은 지시대상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수단, 또는 언어로서의 창을 자기지시적인 유희로 만든다. 검은 선들의 비중은 더욱 커지고 장면과 무관한 또 다른 형상으로 꾸물거리며 변모한다. 그것은 작품 [N_either 091309](2009년)처럼 여러 가지 검은 색과 농도로 화면을 잠식하기도 한다. 줄줄 흘러내리는 검은 선들은 각종 보물이 모여 있는 창고 안에 묻혀 있는 인간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듯하다. 이 많은 사물과 함께 있는 사람은 모두 어디서 온 것들이며, 왜 이 자리에 있는가하는 멜랑콜리한 물음을 던진다.

최근 작품 [N_either 1016-하이 인사동](2010년)에서 검은 선들은 벽을 뚫어 확장된 거대한 창문들과 화면 위에 명멸한다. 검은 선들은 폐수같이 쏟아지는 커튼과 어우러져 창밖 풍경을 더욱 낯설게 만든다. 창밖은 인사동 풍경인데, 작가는 거기에서 전통이라 할 수도 문화라고 할 수도 없는 생경한 꼴라주를 발견한다. 그것은 영국의 실내를 가득 채웠던 제국주의의 흔적들과 유사하게 다가왔다. 골동품에서 상품으로 방점이 옮겨졌지만, 그것은 약탈과 소유, 또는 소비의 관계처럼 경계가 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 그는 이방인이었다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 비해 안쪽 공간은 많이 비워져 있지만 역시 비슷하게 퀭한 표정의 사람이 맞딱뜨려진 상황에 대한 무언의 대사를 읊조린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그에게 인사동 풍경은 보다 공격적으로 쇄도한다. 작가는 영국 풍의 실내에 앉아서 거의 재난처럼 다가오는 한국의 문화풍경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영국의 실내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아늑함마저 풍기는데, 그곳이 자신을 발견하게 해준 애증에 찬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타국에 가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계와 마주한 자화상이 일종의 나레이터 역할을 맡는다.

최근 작품에서 비중이 더 커진 창들은 관조적 거리감을 넘어서 몰입의 체험을 낳는다. 그것은 떠도는 우주선 같은 실내를 단번에 박살낼 것 같은 기세로 달려든다. 김진의 작품은 창이라는 원근법적 구도와 지시대상(referent)이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언어의 불투명성을 강조한다. 지우는지 그리는지, 도피인지 돌파인지 알 수 없는 그의 야생적 붓질은, 기표는 지시대상에 뿌리내리지 않고 약간씩 어긋나게 하면서 낯선 세계와 존재를 드러낸다. 화면 속에 부유하는 기표는 작가의 신체를 증명한다. 모든 것이 모호해지지만 폭풍같이 붓을 휘두르는 작가의 현존은 분명하다.

견고한 위치와 명칭을 가지는 소유물과 그것을 담는 숨 막히는 공간에 대해 몸은 동의하고 싶지 않은 이 사물의 질서를 흩어 놓는다. 그는 화면 속 인물처럼 굳어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행동하면서 고립 된 채 무관하게 존재하는 인간과 사물, 그것들을 꽁꽁 싸매고 있는 실타래를 풀어헤친다. 이러한 여정은 단지 허무주의나 포기가 아니라, 가시적인 세계와는 다른 또 다른 세계의 질서와 확실성을 발견하기 위한 작가의 조치이며, 관객 역시 이에 동참시키려 한다. 점차 커져가는 김진의 화면은 이러한 참여를 북돋운다.

출전 | 미술평단 2011년 봄호(100호)